定王使
襄公
으로 聘於宋
하고 遂假道於陳
하야 以聘於楚
하다
어늘 道茀
하야 不可行
하며 候不在疆
하며 司空不視塗
하며 澤不陂
하며 川不梁
하며
野有庾積
하며 場功未畢
하며 道無列樹
하며 墾田若蓺
하며 宰不致餼
하며
不授館
하며 國無寄寓
하며 縣無
어늘 民將築臺于
러라
及陳
하니 陳靈公與孔寧儀行父
로 以如夏氏
하야 留賓弗見
이러라
單子歸하야 告王曰 陳侯不有大咎면 國必亡하리이다 王曰 何故오 對曰
故先王之敎曰 雨畢而除道하고 水涸而成梁하고 草木節解而備藏하고 隕霜而冬裘具하고 淸風至而修城郭宮室이라
其時儆曰 收而場功
하며 하야 에 土功其始
하며 火之初見
에 期於司里
라하니
今陳國은 火朝覿矣어늘 而道路若塞하고 野場若棄하며 澤不陂障하고 川無舟梁하니 是廢先王之敎也니이다
周制有之
하니 曰 列樹以表道
하고 하며 國有郊牧
하고 有寓望
하고 藪有圃草
하고 囿有林池
하니 所以禦災也
오
不奪民時하고 不蔑民功이면 有優無匱하고 有逸無罷하야 國有班事하고 縣有序民이라하니이다
今陳國
은 道路不可知
하고 田在草閒
하며 功成而不收
하고 民罷於逸樂
하니 是棄先王之法制
也
니이다
賓至
면 以告
하고 以節逆之
하고 候人爲導
하고 卿出郊勞
하고 하고
하고 司里授館
하고 司徒具徒
하고 司空視塗
하고 司寇詰姦
하고 入材
하고
積薪
하고 監燎
하고 監濯
하고 膳宰致
하고 하고 陳芻
하고 工人展車
하고 百官
以物至
어든
今雖朝也不才나 有分族於周하고 承王命以爲過賓於陳이어늘 而司事莫至하니 是蔑先王之官也니이다
故凡我造國은 無從非彝하며 無卽慆淫하야 各守爾典하야 以承天休라커늘
今陳侯不念胤續之常
하야 棄其伉儷妃嬪
하고 而帥其
以淫於夏氏
하니 不亦
姓矣乎
잇가
陳
은 我
之後也
어늘 棄袞冕
하고 而南冠以出
하니 不亦簡彝乎
잇가
昔先王之敎
를 茂帥其德也
라도 猶恐
越
이어늘 若廢其敎而棄其制
하고 蔑其官而犯其令
이면 將何以守國
이리오
六年
에 單子如楚
하고 八年
에 陳侯
於夏氏
하고 九年
에 楚子入陳
하다
21. 단양공單襄公이 진陳나라는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고 논論하다
【大義】임금이 淫亂하고 게을러 직분을 소홀히 하고 不義한 짓을 많이 행하면 반드시 자신의 몸을 망치고 나라는 멸망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말하다.
주정왕周定王이 단양공單襄公을 파견하여 송宋나라에 빙문聘問하게 하고, 곧 진陳나라의 길을 빌려 초楚나라에 빙문聘問하게 하였다.
새벽에 대화심성大火心星이 나타나는 입동立冬 때인데도 길에 풀이 우거져 다니기 불편하고, 손님을 접대하는 후인候人이 국경에서 영접하지 않으며, 사공司空은 도로를 시찰하지 않고, 못에 둑을 쌓지 않았으며, 하천에 다리를 놓지 않았고,
들에 노적가리가 방치되어 있으며, 타작을 끝마치지 않았고, 도로에는 나무를 늘어심어서 표시한 것이 없으며, 개간한 전지田地는 마치 모종해 놓은 것처럼 띄엄띄엄 있고, 선재膳宰는 고기 음식을 제공하지 않으며,
사리司里는 객관客館을 주지 않고, 국도國都에는 묵을 객사客舍가 없으며, 현縣에는 여관이 없는데 백성들이 하징서夏徵舒 집의 누대樓臺를 축조하려 하였다.
진陳나라의 국도에 당도하니 진영공陳靈公이 공녕孔寧‧의행보儀行父와 함께 남관南冠을 쓰고 하씨夏氏의 집에 가서 즐기면서 손님을 머물러 둔 채 접견하지 않았다.
단양공單襄公이 돌아와서 정왕定王에게 보고하기를 “진후陳侯는 큰 재앙을 만나지 않으면 나라가 반드시 망할 것입니다.” 하니, 정왕定王이 말하기를 “무슨 까닭으로 그런가?” 하니, 대답하였다.
“각성角星이 새벽에 나타나면 우기雨期가 끝나게 되고, 천근天根이 새벽에 나타나면 물이 마르며, 본성本星(氐星)이 새벽에 나타나면 초목이 장차 말라 떨어지고, 사성駟星(房星)이 새벽에 나타나면 서리가 내리게 되며, 대화심성大火心星이 새벽에 나타나면 장차 찬바람이 불어올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선왕先王의 가르침에 말하기를 ‘우기雨期가 끝나면 도로를 정비하고, 물이 마르면 다리를 완성하고, 초목이 말라 떨어지면 식량의 저장을 준비하고, 서리가 내리면 겨울에 입을 갓옷을 준비하고, 찬바람이 불어오면 성곽과 집을 수리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령夏令에 말하기를 ‘구월九月에는 길을 정비하고, 시월十月에는 다리를 완성한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의時宜에 맞는 경계하는 말에 ‘추수하여 타작하며, 삼태기와 들것을 준비하여 영실성營室星이 초혼初昏 무렵 하늘 중앙에 나타나면 토목공사를 개시하며, 대화심성大火心星이 동방에 처음 나타나면 연장을 가지고 사리司里에게 모인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선왕先王이 재물을 허비하지 않고도 천하 백성들에게 널리 은덕을 베푼 것입니다.
지금 진陳나라는 대화심성大火心星이 새벽에 나타나는 입동절立冬節인데도 도로를 정비하지 않아 막힌 것 같고, 들판의 타작 마당은 버려진 것 같고, 못에는 둑을 쌓아 물을 가두지 않았고, 하천에는 배와 다리가 없으니, 이는 선왕先王의 가르침을 폐기한 것입니다.
주周나라 제도에 말하기를 ‘나무를 늘어심어서 도로를 표시하고, 변방에 숙식宿食을 제공하는 집을 두어 길 가는 사람을 수호하고, 국도國都에는 교외에 목장을 두고, 국경에는 임시 머무는 집과 후망候望하는 사람을 두고, 늪에는 무성한 수풀이 있고, 원유園囿에는 숲과 못이 있어야 되니, 이것은 재난災難을 막는 것이다.
그 나머지 땅은 모두 곡식을 심는 땅이니, 백성들은 쟁기를 매달아 놓아 놀리는 일이 없고, 들에는 묵어서 우거진 풀이 없어야 된다.
농사철의 인력人力을 빼앗지 않고, 농민의 노동력을 버리지 않으면 부족함이 없는 넉넉한 생활을 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고 피로하지 않아 국도國都 안에는 집행하는 일들이 차서次序가 있고, 지방 현縣에는 백성들이 하는 일에 질서가 있게 된다.’ 하였습니다.
지금 진陳나라는 도로에 표시가 없어서 알 수가 없고, 논밭은 잡초 속에 묻혀 있으며, 지은 농사가 성숙했는데도 거두지 않고, 백성들은 임금의 즐거움을 위하여 피로해 있으니, 이는 선왕先王의 법제法制를 버린 것입니다.
‘지위가 대등한 나라의 손님이 오면 관윤關尹은 조정에 보고하고, 행리行理는 부절符節을 잡고 영접하며, 후인候人은 앞에서 인도하고, 경卿은 교외에 나와 위로하며, 문윤門尹은 문정門庭을 소제하고,
종축宗祝은 손님을 모시고 종묘宗廟에서 제사를 집행하며, 사리司里는 관사館舍를 안배해 주고, 사도司徒는 일할 사람을 배정하며, 사공司空은 도로를 순시巡視하고, 사구司寇는 불순不順한 사람을 조사하며, 우인虞人은 접대에 필요한 각종 재료를 들이고,
전인甸人은 땔나무를 운반해 쌓으며, 화사火師는 뜰에 불을 밝히는 일을 감독하고, 수사水師는 물을 준비하여 씻는 일을 감독하며, 선재膳宰는 숙식熟食을 바치고, 늠인廩人은 양식을 드리며, 사마司馬는 짐승 먹일 꼴을 준비하고, 공인工人은 수레를 펴서 검사하며, 백관百官은 맡은 직책대로 물품을 바치면
손님은 마치 자기 집에 돌아온 것처럼 여기게 되니, 이 때문에 손님과 그를 수행하는 대소大小 인원들이 모두 관대款待에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만일 대국大國의 귀빈貴賓이 오면 접대하는 격식을 한 등급 올려서 더욱 공경히 대하고,
천자天子의 사신使臣이 오면 모든 부서의 장관長官이 영송迎送하고 접대하는 일을 맡아 하며 상경上卿이 감독하고,
만일 천자天子의 순수巡守하는 행차가 이르면 국군國君이 직접 감찰監察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 단조單朝는 재능이 없으나 주왕실周王室에서 갈려나온 종친宗親이고, 왕명王命을 받들어 진陳나라를 지나가는 손님인데 손님을 주관하는 관원官員이 나타나지 않으니, 이는 선왕先王이 규정한 직관職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도道는 선善한 사람은 상賞을 주고 음란한 사람은 벌을 준다.
그러므로 우리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떳떳한 도리가 아닌 것은 따르지 말며 방종하고 음란한 데로 나아가지 말아서 각기 자기가 지켜야 할 법전法典을 지켜 하늘이 주는 경복慶福을 받아야 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진후陳侯는 역대로 이어오는 떳떳한 법규法規를 생각하지 않고서 자기의 부인夫人과 비빈妃嬪을 버리고, 그를 보좌하는 경卿들을 거느리고 하희夏姬와 음란한 짓을 하니, 동성同姓을 더럽히는 것이 아닙니까?
진陳나라는 우리 태희太姬의 후손인데 곤룡포袞龍袍와 면류관冕旒冠을 버리고 남관南冠을 착용하고 출타하였으니 상도常道를 소홀히 여긴 게 아닙니까?
이는 또 선왕先王의 법령法令을 위배한 것입니다.
옛 선왕先王의 교훈을 받들어 힘껏 그 덕행德行을 따르더라도 떨어뜨릴까봐 걱정해야 되는데 만일 그 교훈을 폐기하고 선왕의 제도를 버리며, 선왕先王이 제정한 직관職官을 멸시하고 법령法令을 위배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나라를 지키겠습니까?
큰 나라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이 네 가지를 지키는 것이 없으면 어떻게 오래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정왕定王 6년에 단양공單襄公이 초楚나라에 갔고, 8년에 진후陳侯가 하징서夏徵舒에게 시해弑害당하였으며, 9년에 초장왕楚莊王이 진陳나라를 공격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