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白公子張諫靈王諷刺
[大義]諫言을 애써 구한 군주의 흥성과 무시한 군주의 敗亡. 대의>
王
이 患之
하야 謂
曰 吾欲已子張之諫
하노니 若何
오 對曰
對曰 昔
은 能聳其德
하야하고 以入於河
라가 自河徂亳
하야 於是乎
라
卿士患之하야 曰王言은 以出令也어늘 若不言하시니 是無所稟令也로소이다 武丁이 於是作書하야 曰
以余
로 正四方
이어늘 余恐德之不類
라 茲故不言如是
로라 而又使以象夢
하야求四方之賢
하야以來
하야 升以爲公
하고
而使朝夕規諫曰 若金
이어든 用女作礪
하고 若津水
어든 用女作舟
하고 若天旱
이어든 用女作
하리라
若藥不瞑眩이면 厥疾不瘳하며 若跣不視地면 厥足用傷이라하니이다
故三年黙以思道하고 旣得道오도 猶不敢專制하야 使以象旁求聖人하고 旣得以爲輔오도 又恐其荒失遺忘이라
故使朝夕規誨箴諫曰 心交修余하야 無余棄也라하니이다
今君或者未及武丁이어시늘 而惡規諫者하시니 不亦難乎잇가
齊桓‧晉文
은 皆
也
로대할새 不敢淫逸
하고 心
德音
하야 以
有國
이러니
是以其入也
에 四封
而至
有
하고 以屬諸侯
하야 至于今爲令君
이니이다
君不度憂於二令君하고 而欲自逸也하시니 無乃不可乎인저
有之曰 弗躬弗親
을 庶民弗信
이라하니 臣懼民之不信君也
라
不然
이면을 其可盡乎
아 其又以規爲瑱也
리잇가 遂趨而退歸
하야 杜門不出
하다
214. 백공白公자장子張이 영왕靈王에게 간쟁諫諍하는 말을 받아들이도록 풍자諷刺하다
초영왕楚靈王이 학정虐政을 행하여 백공白公자장子張이 자주 간諫하는 말을 하였다.
왕이 걱정되어 사로史老에게 말하기를, “내가 자장의 간하는 말을 중지시키고자 하는데, 어떻게 해야겠느냐?” 하니, 대답하였다.
“그의 말을 채용해 쓰는 것은 실로 어려우나 그것을 중지시키는 것은 쉽습니다.
만일 임금님께 간하는 말을 하거든, ‘내가 왼손으로는 귀신 명부를 들고서 그들을 마음껏 부리고 오른손에는 채 스무 살을 못 살고 죽은 자들이 사는 곳을 적은 장부를 들고서 그들도 마음대로 부리고 있다.
모든 역대의 잠언箴言이나 간언諫言을 내가 다 들어 알고 있다.
어찌 다른 말을 들을 일이 있겠느냐?’ 하십시오.”
백공白公이 또 간諫하는 말을 하자, 영왕이 사로가 했던 말대로 하였다.
그러자 백공이 대답하기를, “옛날 은殷나라 무정武丁은 능히 자신의 덕을 공경히 지녀 신명神明과 통하는 경지에 이르렀으나 황하黃河 쪽으로 들어가 지내다가 황하로부터 도읍인 박亳 땅으로 옮겨 가 다시 삼년상을 지내며 침묵하면서 나라를 다스릴 방도를 생각하였습니다.
경사卿士들이 걱정하여 말하기를, ‘임금님의 말씀이 있어야 국가가 명령을 내릴 수 있는데 이렇게 말씀을 아니하시니 명령을 받을 곳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무정이 글로 써서 말하였습니다.
‘내가 사방을 바로잡아야 하는데, 나의 덕이 그와 같지 못한 것이 걱정되어 이같이 말을 하지 않고 있었노라.’ 하고서 또 한편으로 꿈에 본 사람의 형상을 그려 사방으로 그런 어진 사람을 찾도록 하여, 부열傅說을 찾아서는 도읍으로 모시고 상공上公 자리에 발탁하였습니다.
그리고서는 아침저녁으로 바로잡아 간하는 말을 하게 하여, ‘내가 철제鐵製 기구를 만들고자 하면 그대를 숫돌로 삼을 것이고, 나루를 건너고자 하면 그대를 배로 삼을 것이고, 날씨가 가뭄이 들면 그대를 장맛비로 삼으리라.
약 기운이 어질어질하지 않으면 병이 낫지 않고, 맨발로 걸으면서 땅을 보지 않으면 발을 상하게 된다.’ 하셨습니다.
무정武丁은 신명과 통할 수 있고, 성스러운 덕은 슬기롭고 광범하고, 그 지혜는 흠결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스스로 덕이 모자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3년 동안을 침묵하며 나라 다스릴 방도를 생각하였고, 이미 나라 다스릴 방도를 깨닫고서도 오히려 감히 혼자서 다스리고자 아니하여, 얼굴 모양을 본떠 사방으로 성인을 구하게 하였고, 이미 얻어서 보좌輔佐로 삼고서도 또 자신의 직무를 소홀히 하여 잊을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침저녁으로 권면勸勉해 가르치고 경계해 간하도록 하면서 말씀하기를, ‘반드시 수시로 나를 닦아 주어서 나를 버림이 없도록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임금님께서는 아마도 무정에게 미치지 못하실 터인데, 권면해 간한 사람을 미워하시니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제환공齊桓公과 진문공晉文公은 모두 적자嫡子의 아들이 아니면서도, 망명하여 수레를 타고 제후국을 떠돌면서 감히 음탕하거나 안일에 빠지지 아니하고, 마음으로 덕스러운 말 듣기를 좋아하여 나라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까운 신하들은 간하는 말을 하게 하고, 먼 데 있는 신하들은 비평의 말을 하게 하고, 뭇 백성들은 여론輿論을 외게 하여 스스로의 경계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본국에 들어갈 적에는 사방 국경이 1백 리도 채 못 되었으나, 사방 1천 리의 땅을 소유하는 데에까지 이르러, 제후들을 불러 모으는 맹주盟主가 되었으며 지금까지 훌륭한 군주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임금님께서 두 훌륭한 군주에 비교하여 근심하려 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편안하고자 하시니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주시周詩〉에 ‘몸소 아니하고 친히 아니한 것은 서민들이 믿지 아니한다.’라고 하였으니, 신은 백성들이 임금님을 믿지 않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 다급하게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를 얻겠사옵니까?”라 하였다.
내 비록 능히 그 말을 쓰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귀에는 담아 두리라.” 하니, 대답하였다.
“임금님께서 써 줄 것을 믿고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파巴 땅과 포浦 땅의 코뿔소‧검정소‧외뿔소‧코끼리 등의 뿔이며 상아象牙들을 다 〈장신구로〉 쓰실 수 없을 터인데 또다시 간하는 말까지 귀마개로 쓰려 하십니까?” 하고서는 마침내 빠른 걸음으로 물러나 집으로 돌아가서는 대문을 닫아걸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후 7개월 만에 건계乾谿의 난리가 일어나 영왕靈王이 그곳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