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陽畢敎平公滅欒氏
[大義]군주가 흔들리는 민심을 다잡고 勳舊大臣을 제거해 가는 순서와 방법. 대의>
公
이 遂逐
할새 謂
曰 自
로 以至於今
히하야 民志
하고 禍敗無已
하며
若之何
오 陽畢對曰
猶樹
라 枝葉益長
이오 本根益茂
니
今若大其
하야 去其枝葉
하고 絶其本根
이면 可以少
이리이다
公曰 子實圖之
하라 圖在明訓
하니 明訓
은 在威權
하고 威權
은 在君
이니이다
君
이賢人之後
로 有
하야 而立之
하고 亦掄逞志虧君以亂國者之後
하야 而去之
니
民畏其威
하고 而懷其德
이면 莫能勿從
이니 若從
이면 則民心
을 皆可畜
이오 畜其心而知其
면孰偸生
이며
欒書實
하고 殺厲公以厚其家
하니 若滅欒氏
면 則民威矣
요
陽畢曰 夫正國者는 不可以暱於權이며 行權에 不可以隱於私니
暱於權이면 則民不道요 行權에 隱於私면 則政不行이니이다
彼若不敢而遠逃
면 乃
而勉之
하야 以報其德
이 不亦可乎
잇가
公許諾
하고 盡逐羣賊
하고 而使
及陽畢
로 適
하야 逐欒盈
이러니 欒盈
이 出奔楚
하다
自文公以來
로 有力於先君
호되 而
는 將授立之
하리니
欒盈不克
하고 出奔曲沃
이라 遂
欒盈
하고 滅欒氏
하다
165. 양필陽畢이 평공平公에게 난씨欒氏를 멸망시키도록 하였다
진평공晉平公 6년에 기유箕遺와 황연黃淵과 가보嘉父가 난리를 일으켜 성공하지 못하고 죽었다.
평공平公이 마침내 여러 잔당들을 내쫓으려고 양필陽畢에게 이르기를, “목후穆侯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난리와 전쟁이 그치지 않아 백성들 마음이 못마땅해 하고 있고 환란도 그치지 않고 있소.
마음이 떠난 백성들에 의해서 또 외환까지 초래되고 있으니 내 몸에 화가 미칠까 두렵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하니, 양필陽畢이 대답하기를, “환난의 밑동이 아직 존재해 있어 가지와 잎이 더욱 크게 벌어지고 있고 환난의 밑동이 더욱 성하여지고 있습니다.
지금 만일 그것을 벨 도낏자루를 크게 준비해서 그 환난의 지엽枝葉들을 제거하고 그 밑동을 끊어 버린다면 조금은 종식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평공平公이 말하기를, “그대가 실제로 그 일을 강구해 보도록 하라.” 하니, 양필陽畢이 말하기를, “강구한다는 것은 훈령을 밝게 함에 달려 있고, 훈령을 밝게 하는 것은 권위 있는 시행에 달려 있고, 권위 있는 시행은 임금에게 달려 있습니다.
임금님께서 어진 사람의 후손으로 나라에 대대로 공훈이 있었으나 중간에 미약해진 후손을 가려서 벼슬에 임명하고, 또 가진 뜻을 펴 보고자 임금을 훼손시키고 나라를 어지럽힌 자의 후손을 가려서 제거하도록 하십시오.
이는 위엄을 이루고 군주의 권력을 장구하게 하는 일입니다.
백성들이 군주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군주의 덕을 그리워한다면 능히 따르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며, 만약 따른다면 백성들의 마음을 감싸 안고 교도敎導할 수 있고, 그들 마음을 감싸 안고 교도하여 그들에게 무엇을 하고자 해야 하고 싫어해야 할 것인지를 알게 한다면 어느 백성이 구차한 삶을 살려 하겠습니까?
만약 구차하게 살려 하지 않게 되면 난리를 꾸미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또 난씨欒氏는 진晉나라를 속여 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난서欒書가 실제 진晉나라의 종실宗室을 뒤엎고 여공厲公을 시해하여 자신 집안의 이익만을 두텁게 했으니 만약 난씨欒氏를 멸망시킨다면 백성들은 임금님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만약 하가瑕嘉‧원진原軫‧한만韓萬‧필만畢萬의 후손을 기용해서 상을 내리고 벼슬에 임명한다면 백성들은 임금님의 덕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위엄을 세우고 은덕을 그리워하게 함을 각기 곳에 따라 합당하게 한다면 나라는 안정될 것입니다.
임금님께서 그렇게 다스려서 나라가 안정된다면 난리를 일으키고자 하는 자를 누가 지지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난서欒書는 나의 선군先君을 옹립하였고, 난영欒盈은 죄를 지은 일이 없다.
양필이 말하기를, “나라를 바로잡으려는 자는 권력을 근시안적近視眼的으로 운영해서도 안 되며 권력의 시행에 있어서 사사로운 은혜로 죄를 은폐해서도 안 됩니다.
권력을 근시안적으로 운영하면 백성을 훈도訓導할 수 없고 권력을 시행하면서 사사로운 은혜로 은폐하면 정사가 시행되지 않습니다.
정사가 시행되지 않으면 무엇으로 백성을 훈도할 것이며 백성을 훈도하지 못한다면 또한 임금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곧 그러한 근시안적인 운영과 은폐는 다시 해악을 만들어 내고 또 임금의 몸만 수고롭게 만들 것이니, 임금님께서는 고려해 보도록 하십시오.
만약 난영欒盈을 사랑하신다면 공개리에 여러 난씨의 잔당들을 내쫓고, 국가의 법 조항을 들어서 그가 지은 죄를 낱낱이 거론하여 묻고서 내쫓으십시오.
그러고 나서 단단히 훈계를 내려 나라를 단속시켜 대비토록 하십시오.
저들이 만약 가진 뜻을 펴 보고자 하여 임금님께 보복하려 든다면 이보다 큰 죄악이 무엇이겠습니까?
멸족하는 것으로도 그 벌이 오히려 적을 것입니다.
저들이 만약 감히 그런 생각을 갖지 못하고서 멀리 도망간다면 바로 그가 도망친 나라에 두터운 예물을 보내 힘써 보살펴 주게 하는 것으로 그에게 입은 덕을 갚아 주는 것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평공平公이 허락하고, 모든 난씨의 잔당들을 내쫓고서 기오祁午와 양필陽畢을 시켜 곡옥曲沃으로 가서 난영欒盈을 내쫓게 하니, 난영이 초楚나라로 달아났다.
“문공文公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선군先君 시대에 공훈을 세우고서도 자손이 제대로 길러지지 못한 자들은 앞으로 작위를 내려 임명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찾아내는 자에게도 상을 내릴 것이다.” 하였다.
그 후 3년이 지난 뒤 난영이 대낮에 들어와서 수도 강絳에서 난리를 일으켰다.
이에 범선자范宣子가 평공平公을 모시고 양공襄公의 사당으로 들어갔다.
난영이 성공하지 못하고 곡옥으로 달아나자 마침내 난영을 찔러 죽이고 난씨를 멸망시켰다.
이로 인해 평공平公의 재위 기간 내내 내란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