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從先君
以至不穀之身, 亦有不爲爵勸, 不爲祿勉, 以憂社稷者乎?”
有斷脰決腹, 壹瞑而萬世不視, 不知所益, 以憂社稷者;
故彼廉其爵, 貧其身, 以憂社稷者, 令尹子文是也.
葉公子高, 食田六百
, 故彼崇其爵, 豐其祿, 以憂社稷者, 葉公子高是也.
撫其御之手, 顧而大息曰:‘嗟乎子乎, 楚國亡之
至矣!
吾將深入吳軍, 若扑一人, 若捽一人, 以與大心者也,
故斷脰決腹, 壹瞑而萬世不視, 不知所益, 以憂社稷者, 莫敖大心是也.
昔吳與楚戰於柏擧, 三戰入郢. 寡君身出, 大夫悉屬, 百姓離散.
此猶一卒也, 不若奔諸侯.’ 於是贏糧潛行, 上崢山, 踰深谿, 蹠穿膝暴, 七日而薄
之朝.
秦王聞而走之, 冠帶不相及, 左奉其首, 右濡其口, 勃蘇乃蘇.
秦王身問之:‘子孰誰也?’ 棼冒勃蘇對曰:‘臣非異,
秦王顧
:‘寡人聞之, 萬乘之君, 得罪一士, 社稷其危, 今此之謂也.’
下塞以東, 與吳人戰於
而大敗之, 亦聞於
. 故勞其身, 愁其思, 以憂社稷者, 棼冒勃蘇是也.
吳與楚戰於柏擧, 三戰入郢, 君王身出, 大夫悉屬, 百姓離散.
於
之上, 舍鬪奔郢曰:‘若有孤, 楚國社稷其庶幾乎?’ 遂入大宮,
以浮於江, 逃於雲夢之中.
故不爲爵勸, 不爲祿勉, 以憂社稷者, 蒙穀是也.”
초楚 위왕威王이 막오莫敖 자화子華에게 물었다.
“나의 선군先君이신 문왕文王으로부터 과인寡人에 이르기까지 벼슬로 권려勸勵하지 않고, 또 봉록으로 권려한 것도 아닌데 사직社稷을 염려하고 근심한 자가 있는가?”
“군왕君王께서 무엇을 물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작위爵位에 청렴하고 자기 자신은 가난하면서도 사직을 염려하는 자도 있고,
그 작위가 높고 봉록을 풍성하게 누리면서 나라를 걱정하는 자도 있으며,
목이 잘리고 배가 갈라져 죽어도 만세토록 드러나지 않아 그 이익된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사직을 염려하는 자가 있으며,
몸을 수고롭게 하고 뜻을 근심하면서 사직을 염려하는 자도 있으며,
작위로 권면하는 것도 아니요 봉록으로 권면하는 것도 아닌데도 사직을 위해 근심하는 자가 있습니다.”
“옛날 영윤令尹 자문子文은 검게 물들인 허름한 옷을 입은 채 조회朝會를 하였고, 평소에는 사슴 가죽 갖옷만 입었습니다.
날이 새기 전 새벽에 조정에 나오고 날이 어두운 뒤에야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었습니다.
아침에는 저녁거리가 없음을 걱정하지 않았고, 하루치 양식을 쌓아두고 먹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직위에 청렴하고 자신이 가난하면서 사직을 염려한 자는 바로 영윤 자문이 그러한 자입니다.
옛날 섭공葉公 자고子高는 초야草野 출신으로 미천하였지만 수도首都에 들어오면서 재물을 풀어 백성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백공白公의 화禍를 평정하고 초나라 국사를 안정시켰습니다.
선군先君의 공업을 회복하여 방성方城 밖까지 덮이도록 하였으며, 사방 국경이 침범당하는 일이 없고, 초나라의 명망이 제후들 사이에 꺾임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천하에 그 누구도 감히 남쪽 초나라를 향해 군사를 향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때 섭공 자고는 식읍食邑이 6백 진畛이나 되었기 때문에 작위가 높고 봉록이 풍성하면서 나라를 걱정한 자는 바로 섭공 자고입니다.
옛날 오吳나라와 초楚나라가 백거柏擧에서 싸워 두 나라 전차 사이에서 병사들이 교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막오莫敖 대심大心이 전차 마부의 손을 어루만지며 돌아다보고는 크게 한숨 짓기를 ‘아, 초나라 멸망의 날이 이르렀구나!
내가 오나라 적진 깊숙이 들어갈 테니 너희는 적군 하나라도 거꾸러뜨리고 하나라도 잡아 나 대심大心을 도우라.
그래야만 혹 사직이 보전될 것인가?’하면서 달려나갔습니다.
그러므로 목이 잘리고 가슴이 갈라져 죽어 만세토록 드러나지 않아 그 이익을 모르는데도 사직을 염려한 자는 막오 대심입니다.
옛날 오나라와 초나라가 백거에서 싸울 때, 세 번의 싸움에 그들이 수도 영郢에 입성하자 임금은 도망가고 대부들도 왕을 따라가고 백성들은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때 분모발소棼冒勃蘇가 ‘내가 단단한 갑옷을 입고 예리한 칼을 잡고 강적 사이에 뛰어들어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병졸이 할 수 있는 일일 뿐, 다른 제후들에게 가서 구원을 얻어오느니만 못하다’ 하고는 말린 식량을 짊어지고 몰래 빠져나가 험한 산을 넘고 깊은 계곡을 건너 신발이 해어지고 무릎이 드러나도록 고생한 끝에 7일 만에 진秦나라 조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학처럼 꼿꼿하게 똑바로 서서 몸을 돌리지도 않은 채 주야로 울었으나 이레가 되도록 고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 한 모금, 국물 한 숟가락 먹지 않아 기절할 직전에 이르러 혼미해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진왕秦王이 그제야 소식을 듣고 관대冠帶도 갖추지 못한 채 달려나가 왼손으로는 그의 머리를 받치고 오른손으로 물을 먹여 주자 그제야 발소가 깨어났습니다.
진왕이 몸소 묻기를 ‘그대는 누구인가?’하니, 분모발소는 대답하기를 ‘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초나라가 새로이 사신으로 임명하여 보낸 분모발소입니다.
지금 오吳나라와 초楚나라가 백거에서 싸우는데 세 번 싸움에 서울 영郢에 진입하고 말았습니다.
임금이 피해 떠나자 대부들도 모두 따라갔고 백성들은 서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를 사신으로 보내 곧 망하게 됨을 고하여 구원을 요청하게 한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진왕秦王이 그를 일어나게 하고는 ‘내가 듣건대 만승萬乘의 임금도 한 선비에게 죄를 지어 그 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를 두고 한 말이로다’하고는
드디어 혁거革車 1천 승과 병졸 1만 명을 내어 자포子蒲와 자호子虎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였습니다.
이들이 동쪽으로 요새를 내려와 오나라와 탁수濁水에서 싸워 오군吳軍을 크게 깨뜨리자, 이 소식이 수포遂浦까지 들려 〈오나라는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몸을 수고로이 하고 그 마음을 애태워 사직을 구원한 자는 분모발소입니다.
또 오吳나라와 초楚나라가 백거柏擧에서 싸울 때 세 번 싸움만에 영郢이 함락되고 임금은 피해 가고 군신들도 따라가서 백성들이 흩어졌습니다.
몽곡蒙穀이 궁당宮唐에서 얽혀 싸우다가 싸움을 포기하고 영郢으로 도망쳐 오면서 ‘태자太子라도 세워야 초楚나라의 사직社稷이 이어가지 않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궁궐로 들어가 전적典籍을 모아 짊어지고 떠나서 장강長江에 배를 띄워 운몽택雲夢澤으로 도망갔습니다.
뒤에 소왕昭王이 영郢으로 귀환하였는데, 오관五官이 법전法典을 잃어버려 법을 집행할 수 없어, 백성이 혼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에 몽곡이 법전을 바치자 오관이 법을 집행해서 백성들이 크게 다스려졌습니다.
나라를 존망의 위기에서 구함이 이와 같자 그를 집규執圭 벼슬과 토지 6백 진畛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몽곡은 크게 화를 내면서 ‘나는 한 개인의 신하가 아니라 사직社稷의 신하이다.
참으로 그 사직의 혈식血食이 이어진다면 내 어찌 임금이 없는 것을 염려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마산磨山 산중으로 숨고 말아 지금은 후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작위로 권하거나 봉록으로 권하지 않아도 사직을 염려한 자는 바로 몽곡입니다.”
“이는 모두 옛 사람들의 이야기이지, 지금 사람들이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소?”
“옛날 선군이신 영왕靈王께서는 허리가 가는 여자를 좋아하였지요.
그러자 초나라 모든 선비들이 절식節食하여 무엇에 기대어야 설 수 있었고, 수레의 횡목[軾]을 잡아야만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먹고 싶은 마음이 생겨도 끝내 참고 입에 넣지 않았으며, 죽을까 두려웠지만 그래도 이런 행동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듣건대 임금이 활쏘기를 좋아하면 그 신하들이 모두 활 쏠 때 쓰는 깍지와 팔찌를 좋아하며 활쏘기를 익히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군왕君王께서 참으로 어진 이를 좋아하신다면 앞에 든 다섯 명의 신하 같은 자들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