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中山은 춘추시대春秋時代 선우국鮮虞國으로 불렸으며 중원中原의 민족과는 다른 종족인 백적白狄이 세운 나라이다. 그러나 자성子姓(은殷과 동성同姓)이라고도 하며 혹 희성姬姓(주周와 동성)이라고도 한다. 일찍이 《좌전左傳》에 이미 진晉나라가 여러 차례 이 선우鮮虞를 정벌한 기록이 보이며 중산中山이란 명칭은 《좌전左傳》 정공定公 4년에 처음 나타난다.
전국시대 중산은 지금의 호타하滹沱河 유역의 영수靈壽, 평산平山, 진현晉縣 일대를 영역으로 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중산에 대한 사료는 매우 적어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도 따로 중산에 대한 세가世家나 열전列傳이 없다. 그러나 1974년 하북河北 평산平山에서 중산왕묘中山王墓가 발굴되어 명문銘文의 정鼎, 호壺, 월鉞, 역도域圖 등이 출토되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전국 초기(B.C.414) 중산무공中山武公이 고顧(지금의 하북성河北省 진현晉縣)에 도읍을 정하였으며 한때 종주국 주周나라로부터 책명冊命에 의해 후侯로 승인 받기도 하였다. 그 뒤 중산환공中山桓公 때 영수靈壽(하북성河北省 정현定縣)로 옮겼으며 B.C.323년에는 드디어 한韓나라, 연燕나라와 함께 왕王을 칭하기도 하였다. 영토가 위魏나라, 조趙나라와 맞닿아 많은 전쟁을 겪어야 했으며 그 때문에 한때 위魏나라에게 망하였다가 다시 중건하였고 B.C.313년에는 제齊 선왕宣王이 연燕나라 자지子之의 난을 틈타 연나라를 공격했을 때 출병하여 영토를 확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B.C.307년부터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의 연이은 침공으로 급격히 국세가 쇠락하여 결국 B.C.301년 중산군中山君은 조趙나라 위협을 이겨내지 못하고 제齊나라로 망명하여 보호를 받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 뒤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 4년, 제齊나라가 남쪽으로 초楚나라와 싸우는 틈을 이용하여 이 중산을 완전히 멸망시켜 명맥이 끊어지고 말았다.(B.C.295)
이 중산국에 대해 포표鮑彪 주에는 “중산中山은 옛 선우국鮮虞國으로 희성姬姓이다. 두우杜佑는 ‘상산常山의 영수靈壽 지역이 중산국中山國이며 고성故城이 있다. 성 안에 산이 있어 중산中山이라 하였다.’라 하였으며 위열왕威烈王 20년에 중산무공中山武公이 처음 세웠다.”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