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漢時賢俊, 皆以一經弘聖人之道, 上明天時, 下
人事, 用此致
구경卿재상相者多矣。
已來不
, 空守章句, 但誦師言, 施之世務, 殆無一可。
양梁朝皇孫以下,
之年, 必先入學, 觀其志尙,
已後,
, 略無
者。
冠冕爲此者, 則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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等, 兼通文史, 不徒講說也。
낙양洛陽亦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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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업하鄴下又見
:此四儒者, 雖好經術, 亦以
형자재才博擅名。
如此諸賢, 故爲上品, 以外率多田野閒人, 音辭鄙陋, 風操蚩拙, 相與
, 無所堪能, 問一言輒酬數百,
其
, 或無
。
업하鄴下諺云:“
박사博士買驢,
三紙, 未有驢字。”
夫聖人之書, 所以設敎, 但
효경經文, 粗通注義, 常使言行有得, 亦足爲人, 何必
卽須兩紙
?
학문學問의 번성하고 쇠퇴함은 세태世態의 추이推移에 따른다.
한漢나라 때는 재능이나 덕행이 빼어난 이들이 모두 〈저마다〉 한 가지 경전經典으로 성인聖人의 도리를 〈세상에〉 넓혀가느라, 위로는 천시天時를 밝히고 아래로는 인사人事를 두루 갖추었으니, 이것으로 구경九卿과 재상宰相의 지위에 오른 이들이 많았다.
말세의 풍속이 이미 도래하고서는 다시는 이와 같지 못하여, 〈구두句讀의 형식에 치중된〉 장구학章句學만을 헛되이 지키고 그저 스승의 말을 암송이나 할 뿐이니, 세상의 일에 이를 시행하려도 거의 한 가지도 쓰일 것이 없다.
그러므로 사대부의 자제들도 모두가 널리 섭렵하기를 귀하게 여기고 한 가지 경전에만 통달한 유생儒生이 되려 들지는 않는 것이다.
양梁나라 왕조王朝 때에는 황손皇孫 이하 귀족자제는 아직 어릴 때에 반드시 먼저 학교에 들어가게 하고 그 지향하고 숭상하는 바를 살폈으나, 출사出仕한 후 문관으로 임용되기만 하면 학업을 마저 마치는 이가 없었다.
관원들 가운데서 이를 행하였던 이들로는 곧 하윤何胤, 유환劉瓛, 명산빈明山賓, 주사周捨, 주이朱异, 주홍정周弘正, 하침賀琛, 하혁賀革, 소자정蕭子政, 유도劉縚 등이 있었으니, 문장文章과 사서史書에 아울러 능통하되 그저 강설講說만을 일삼던 이들은 아니었다.
낙양洛陽에서는 최호崔浩, 장위張偉, 유방劉芳의 명성이 역시 자자하였고, 업하鄴下에서도 형자재邢子才가 눈에 띠었으니, 이 네 명의 유학자는 비록 경학經學을 좋아하였으나 재능과 박식함으로서도 이름을 떨쳤다.
이와 같은 여러 현인賢人들은 그래서 최상의 수준이나, 그들 이외에는 대부분이 들판의 한가한 사람으로 말씨가 비루하고 행실도 저속하여 함께 더불면 한갓 고집스럽기만 할 뿐 능히 감당할 만한 일은 없으니, 한 가지를 물어보면 번번이 수백 마디를 대답하나 그 취지를 힐문하면 더러 요지가 없곤 하였다.
업하鄴下의 속담에 이르기를 “박사博士가 당나귀를 사면 계약서가 석 장인데도 당나귀 ‘여驢’자는 없다.”고 하였다.
만약 너희들이 이런 이를 스승으로 삼는다면 사람으로 하여금 기가 막히게 할 것이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배우면 봉록俸祿은 그 안에 있다.”고 하셨다.
지금 무익한 일에다 힘을 쏟아붓고 있다면, 〈이는〉 아마도 제대로 된 공부가 아닐 것이다.
무릇 성인의 책이란 그것으로 가르침을 베풀려는 것이니, 그저 경문經文을 통달하고 숙련하며 주석된 의미를 대략 꿰뚫어 언제든 언행言行에 도움이 되게 한다면 이 또한 사람 구실하기에 충분한 것인데, 〈《효경孝經》의 제1장이 시작되는 첫 구절〉 ‘중니거仲尼居’에 어찌 굳이 두 쪽에나 걸칠 만큼 주석을 달아 풀이해놓아야 했을까?
〈중니仲尼가 거처하신 곳이〉 한거閒居하던 곳이었든, 강습講習하던 곳이었든 이 또한 어디에 있는가?
그렇게 해서 이길 수 있다 한들 어찌 〈언행이나 살아가는 데에〉 보탬이 있겠는가?
마땅히 요체要諦를 널리 살펴야만 공업功業을 이룩할 터이니, 반드시 양자를 아울러 갖춘다면 내가 그것에 대해 흠잡을 일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