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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氏家訓(1)

안씨가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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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추顔之推 연보年譜


안지추顔之推연보年譜는 1944년에 간행된 《진리잡지眞理雜志1卷 4期에 수록되었다가 1962년에 증보增補된 후, 《독사존고讀史存稿》(三聯書店, 1963)에 수록된 무월繆鉞의 《안지추연보顔之推年譜》를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원래 무월繆鉞은 여러 사서史書전기傳記와 《안씨가훈顔氏家訓》 및 〈관아생부觀我生賦〉 등을 참고하여 연보年譜를 구성하였다.

1. 남조南朝 시기時期(531~556)

朝代帝王年號年間年 度事 跡
武帝中大通 3年5311세. 江陵(湖北省 江陵縣)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두 형은 之儀와 之善이다.
大同 3年5377세. 〈魯靈光殿賦〉를 암송할 수 있었다.
大同 5年5399세. 아버지 協이 42세로 죽자 江陵 東郭에 旅葬을 지냈으며, 이후 형 之儀에게 양육되었다. 7월에 湘東王 蕭繹이 荊州刺史에서 護軍將軍이 되었으며, 石頭戍軍事를 겸임하였다.
大同 6年54010세. 12월 湘東王 蕭繹이 江州刺史로 出任하였다.
大同 8年54212세. 湘東王 蕭繹을 따라간 江州(지금의 江西省 九江市)에서 老莊을 강연하는 蕭繹의 문하생이 되었으나 그의 취향은 아니었으므로 여전히 《周禮》와 《春秋左氏傳》을 익히며 群書를 널리 읽었다.
太淸 元年54717세. 正月에 江州刺史 湘東王 蕭繹이 鎮西將軍 겸 荊州刺史로 옮겼으며, 2월에 東魏의 侯景이 河南 13州를 거느리고 와서 투항하였다.
太淸 2年54818세. 10월에 侯景이 壽陽에서부터 반란을 일으켜 長江을 건너며 都邑을 압박하였다.
太淸 3年54919세. 3월에 侯景은 臺城을 함락시켰고, 4월에 湘東王 蕭繹은 大都督中外諸軍事로 司徒와 承制를 칭하였다. 5월에 武帝가 죽자 太子 蕭綱을 簡文帝로 擁立하였다.
簡文帝大寶 元年55020세. 9월에 湘東王 蕭繹은 世子 蕭方諸를 中撫軍 겸 郢州刺史로 삼았으며, 顔之推는 中撫軍外兵參軍으로서 기록을 管掌하였다.
大寶 2年55121세. 윤4월에 侯景이 그의 장수 宋子仙, 任約襲을 郢州로 파견하고 刺史 蕭方諸를 생포하자 顔之推도 포로가 되었으므로 피살될 지경이었으나 侯景의 行臺郎中 王則이 그를 살려 죄수로서 建康으로 보내졌다.
天正 元年8월에 侯景이 簡文帝를 폐위시키고 豫章王 蕭棟을 옹립하였다. 10월에 侯景은 簡文帝를 弑害한 다음 蕭棟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皇帝를 칭하고 國號를 漢이라 하였다.
元帝承聖 元年55222세. 湘東王 蕭繹이 파견한 장수 王僧辯 等이 侯景의 반란을 평정하고 그의 首級을 江陵으로 보내오자, 11月에 湘東王 蕭繹이 江陵에서 元帝로 即位하였으며, 顔之推도 建康에서 江陵으로 돌아와 散騎侍郎을 맡고 勅命으로 서적을 교감하였다.
承聖 三年55424세. 9월에 西魏가 군대를 보내 梁을 공략하였다. 10월에 西魏가 襄陽에 이르자 雍州刺史 蕭
天統 2年56636세. 後主가 文藝를 애호하였던 까닭에 顔之推는 도읍 鄴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武平 3年57242세. 祖珽이 左僕射가 되자 顔之推의 의견을 받아들여 文林館을 설치하도록 奏請하였으며 《修文殿御覽》을 撰修하도록 建議하였다. 顔之推는 司徒錄事參軍을 除授받고 李德林과 함께 文林館의 업무를 주관하였으며 《修文殿御覽》을 主編하였다. 머잖아 通直散騎常侍로 옮겨 中書舍人을 겸임하였으며, 다시 黃門侍郎으로 옮겼다.
武平 4年57343세. 4, 5월에 祖珽이 左僕射에서 해임되어 徐州刺史로 나갔으며, 10월에 侍中 崔季舒, 張雕虎, 散騎常侍 劉逖, 封孝琰, 그리고 黃門侍郎 裴澤, 郭遵 等 6명이 後主의 晉陽 行幸을 만류했다가 모두 처형되었으나 顔之推는 이에 同調하지 않아 화를 모면하였다.
武平 6年57545세. 윤8월에 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하자 關市, 舟車, 山澤, 鹽田, 店肆의 세금을 그 상황에 따라 차별을 두어 가볍게 물렸다.
隆化 元年57646세. 後主가 晉陽으로 가고, 겨울에 北周의 武帝가 北齊를 침략하여 晉州(지금의 山西省 臨汾市)를 점령하자, 11월에 後主는 晉州로 가서 城을 포위하였다. 12월에 北周의 武帝가 晉州를 구하고자 出征하여 北齊의 군대가 크게 패하자, 後主는 군대를 버리고 晉陽으로 돌아와 安德王 高延宗을 남겨 晉陽을 수비하게 한 후 輕騎兵만 이끌고 鄴으로 돌아갔다. 北周의 군대가 머잖아 晉陽에 들어오자 後主는 太子에게 禪位하고자 하였다.
幼主承光 元年57747세. 正月에 太子 高恒이 卽位하며 後主를 太上皇으로 모셨다. 顔之推가 薛道衡 等과 함께 太上皇에게 諫言하길 黃河의 서쪽으로 군사를 모아 다시 계책을 도모하되 실패하면 陳에 투항하도록 하였다. 太上皇이 이를 좇아 鄴에서 먼저 濟州(지금의 山東省 巨野縣)로 나아갔으나 北周의 군대가 점차 압박해오면서 幼主도 鄴에서 東으로 피신하자, 太上皇은 幼主를 데리고 靑州(泰山 동쪽 지역)로 피신하였다가 靑州에 닥친 北周의 장수 尉遲綱에게 사로잡혀 太后, 幼主와 함께 長安으로 押送되었다. 顔之推가 幼主를 따라 長安으로 압송되는 도중에 盧思道, 陽休之 등과 함께 〈鳴蟬篇〉을 지었다.
北周武帝建德 6年
建德 7年57848세. 6월에 北周의 武帝가 죽자 太子 宇文贇이 즉위하니 곧 宣帝이다.
宣帝宣政 元年
宣政 2年57949세. 2월에 宣帝가 禪位하고 자신을 天元皇帝라 일컫자 太子 宇文闡이 즉위하였으니 곧 靜帝이다.
靜帝大象 元年
大象 2年58050세. 御史上士의 직위를 除授하였다.


3. 시기時期(581~590)

朝代帝王年號年間年度事 跡
文帝開皇 元年58151세. 2월에 楊堅이 靜帝를 폐위시키고 登極하였으니 곧 隋 文帝이다. 顔之推의 아들 思魯가 아들 籀, 곧 顔師古를 낳았다.
開皇 2年58252세. 長安의 민간에서 秦나라 때의 鐵稱權을 발굴하자 顔之推가 勅令으로 이를 수차례 베껴 쓰며 읽었다. 2월에 文帝가 아들 揚勇을 太子로 삼았다. 揚勇이 顔之推를 學士로 초빙한 것은 대개 이해 이후의 일일 것이다. 顔之推 等이 陸法言 등과 音韻을 토론한 것도 대개 이해를 前後한 일일 것이며, 顔之推가 開皇 初에 勅命을 받들고 魏澹, 辛德源 등과 함께 다시 《魏書》를 편찬한 것도 대개 이 무렵에 시작된 일일 것이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가 없다.
開皇 3年58353세. 顔之推가 勅命을 받들고 陳의 使臣 阮卓을 접대하였다.
開皇 4年58454세. 張賓이 新曆을 上奏하자 文帝가 詔勅을 내려 이를 頒布하면서 이후 10여 년간 曆法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開皇 9年58959세. 隋가 南朝의 陳을 滅하여 중국을 통일하였다.
開皇 10年59060세. 顔之推의 卒年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開皇 10년 前後로 추정되니 나이는 대략 60여 세쯤일 것이다. 《顔氏家訓》도 이 무렵에 집필이 完了된 것으로 보인다.


역주
역주1 : 찰

안씨가훈(1)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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