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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氏家訓(1)

안씨가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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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文學의 根源과 경박한 文人
, 生於《서경》者也;, 生於《역경》者也;, 生於《시경》者也;, 生於《예기》者也;, 生於《춘추春秋》者也。
朝廷憲章, , 敷顯仁義, 發明功德, 建國, 施用多途。
至於, , 入其, 亦樂事也, , 則可習之。
凡此諸人, 皆其
秀者, 不能悉紀, 大較如此。
至於帝王, 亦或未免。
自昔天子而有才華者, 唯무제태조太祖‧文무제‧明무제효무제孝武帝, , 非懿德之君也。
맹가孟軻之儔, 有盛名而免過患者, 時復聞之, 但其損敗居多耳。
每嘗思之, 原其所積, 文章之體, , 發引性靈, 使人矜伐, 故忽於持操, 果於進取。
今世文士, 此患彌切, 一事愜當, 一句, , 自吟自賞, 不覺更有傍人。
加以砂礫所傷, 慘於矛戟,
深宜防慮, 以保


1. 文學의 根源과 경박한 文人
문장은 그 근원이 오경五經에서 나왔다.
등의 문장은 《서경書經》에서 나왔고, 등의 문장은 《역경易經》에서 나왔으며, 등의 문장은 《시경詩經》에서 나왔고, 등의 문장은 《예기禮記》에서 나왔으며, 등의 문장은 《춘추春秋》에서 나왔다.
〈문장은〉 조정의 헌장憲章과 군대의 명령서, 인의仁義를 펼쳐 드러내고 공덕을 찾아내어 밝히는 일, 백성을 다스리고 나라를 세우는 일 등 베풀어 쓸 데가 많다.
성령性靈을 도야하고 조용히 풍간諷諫하며 그 오묘한 재미에 빠져드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니, 행하고 남은 힘이 있으면 익혀볼 만하다.
하지만 예로부터 문인들은 경박함에 빠진 이들이 많다.
굴원屈原은 재주를 드러내어 자신을 높이고 임금의 잘못을 폭로하였으며, 송옥宋玉은 용모가 고와서 광대 취급을 받았고, 동방삭東方朔골계滑稽가 점잖지 못했고,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재물을 훔치고 지조가 없었으며, 왕포王褒는 〈동약僮約〉에 잘못이 드러났고, 양웅揚雄은 도리에 어긋나게 나라를 찬미하였고, 이릉李陵은 오랑캐에게 항복하여 치욕을 당했고, 유흠劉歆왕망王莽의 세상에서 갈팡질팡했고, 부의傅毅는 권문에 영합하였고, 반고班固는 부친이 쓴 역사를 훔쳤고, 조일趙壹은 지나치게 뻣뻣했고, 풍연馮衍은 글이 부화浮華하다고 배척당했고, 마융馬融은 아첨하다가 비난을 받았고, 채옹蔡邕은 악당들에게 동조하다가 죽임을 당했고, 오질吳質은 고향 사람들과 어근버근하였고, 조식曹植은 행패를 부리며 법을 어겼고, 두독杜篤은 끊임없이 청탁을 했고, 노수路粹는 속이 몹시 좁았고, 진림陳琳은 본래 거칠고 무식하기로 이름이 났으며, 번흠繁欽은 천성적으로 절제할 줄 몰랐고, 유정劉楨은 고집불통이라 징역을 살았고, 왕찬王粲은 경솔하고 성급하여 미움을 받았고, 공융孔融예형禰衡은 허풍과 오만으로 명을 재촉했고, 양수楊修정이丁廙는 남을 부추기다가 죽임을 당했고, 완적阮籍은 무례하여 풍속을 문란케 하였고, 혜강嵇康은 남들을 업신여기다가 흉하게 죽었고, 부현傅玄은 화내고 싸우다가 벼슬을 그만두었고, 손초孫楚는 뻐기고 오만하여 윗사람을 능멸하였고, 육기陸機는 순리를 범하고서 위험한 길을 갔고, 반악潘岳은 거저 먹으려다 위험을 초래했고, 안연지顔延之는 호기를 부리다가 쫓겨났고, 사영운謝靈運은 허황한 행동으로 기강을 어지럽혔고, 왕융王融은 흉한 죽음을 스스로 초래하였고, 사조謝脁는 남을 업신여기다가 〈죽임을〉 당했다.
이 사람들은 모두 그중 두드러진 이들로서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으며, 그 대략이 이와 같다.
제왕帝王들 중에도 간혹 〈이러한 결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예로부터 천자天子로서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가진 이로는 나라의 무제武帝, 나라의 태조太祖문제文帝명제明帝, 그리고 나라의 효무제孝武帝뿐이었는데, 이들 모두 세상의 평판에 아랑곳하지 않았으니 훌륭한 덕을 지닌 임금은 아니었다.
자유子游, 자하子夏, 순황荀況, 맹가孟軻, 매승枚乘, 가의賈誼, 소무蘇武, 장형張衡, 좌사左思 등처럼 간혹 이름을 날리고도 재앙을 면한 이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결함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일찍이 이에 대해 늘 생각하면서 그렇게 되어온 근원을 따져보았더니, 문장文章이라는 것 자체가 감흥을 높이 들어 내세우고 성령性靈을 끄집어내어서 뻐기고 자랑하게 만드는 것이므로, 지조 지키기에 소홀하고 앞서 나가는 일에 과감하다.
오늘날 문사文士들에게 이러한 문제는 더욱 심각하고 절실한데, 한 가지 표현이 딱 맞아떨어지고 한 구절이 청신하고 교묘하면, 정신은 구천을 날아오르고 뜻은 천년 세월을 내달으며, 〈의기양양해져서〉 스스로 읊고 찬탄을 하면서 옆에 누가 있는지도 모른다.
모래나 조약돌에 맞은 상처가 창에 찔린 것보다 더 아프고, 풍자諷刺로 인한 재앙이 풍진風塵보다도 더 빨리 닥친다.
각별히 조심해서 큰 복을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역주
역주1 原出五經 : 《文心雕龍》 〈宗經〉에서 “論, 說, 辭, 序의 문장은 《易經》이 그 첫머리의 큰 줄기가 되었고, 詔, 策, 章, 奏는 《書經》이 그 근원을 열었으며, 賦, 頌, 詞, 讚은 《詩經》이 그 근본을 세웠고, 銘, 誄, 箴, 祝은 《禮記》가 그 실마리를 이끌었고, 記, 傳, 盟, 檄은 《春秋》가 그 뿌리가 되었다.”라 하였다. 이 역시 문장의 근원이 五經에 있다는 당시의 견해이다.[王利器]
역주2 詔命策檄 : 《文心雕龍》 〈詔策〉에서 “命이란 시킨다는 뜻이다. 秦나라가 천하를 병탄하고서 命을 制로 바꾸었다. 漢代 초에 의식의 규칙을 정하면서 命에 네 단계가 있게 되었는데, 첫 번째가 策書, 두 번째가 制書, 세 번째가 詔書, 네 번째가 戒敕이었다. 敕은 州郡을 경계하고, 詔는 百官을 훈계하며, 制는 사면령을 시행하고, 策은 王侯를 封한다. 策은 대쪽이란 뜻이고 制는 마른다는 뜻이며, 詔는 알린다는 뜻이고 敕은 바로잡는다는 뜻이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3 序述論議 : 《文心雕龍》 〈論說〉에서 “그러므로 議는 말이 타당하고, 說은 말이 즐거우며, 傳은 스승의 말씀을 돌려 서술하고, 注는 풀이를 위주로 하며, 贊은 뜻을 밝히고, 評은 공평하게 다스리며, 序는 일의 순서를 잡고, 引은 말을 이어 끌어나가는데, 이 여덟 가지는 이름은 달라도 모두 論을 근본으로 한다. 論이란 여러 가지 말들을 두루 꿰어서 하나의 이치를 정묘하게 연구해내는 것이다.”라 하였다. 또 〈頌讚〉에서는 “司馬遷의 《史記》와 班固의 《漢書》에 이르러서는, 讚을 빌어 褒貶을 하고 간략한 글로 전체를 요약해 기록했으며, 頌의 형식으로 글을 논하였고, 또 〈本紀〉와 〈列傳〉 뒤에 평을 하면서 여기에도 讚이라는 명칭을 썼다. 그런데 摯虞의 《文章流別論》에서는 잘못해서 述이라고 했으니, 크게 잘못된 것이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4 歌詠賦頌 : 《尙書》 〈舜典〉에서 “詩는 뜻을 말한 것이고, 歌는 말을 길게 늘인 것이다.”라 하였다. 《文心雕龍》 〈明詩〉에서는 “사람은 태어나면서 뜻을 갖게 되고, 이것을 노래가 담는다.”라 했다. 《說文解字》 欠部에서 “歌는 노래한다는 뜻이다.”라 했다. 徐鍇의 《繫傳》에서 “歌란 그 소리를 길게 끌어서 읊는 것이다.”라 했다. 《玉篇》 言部에서는 “詠은 길게 말하는 것이요, 歌이다.”라 했다.
《文心雕龍》 〈詮賦〉에서 “賦란 펼친다는 뜻으로, 무늬를 펼쳐 글을 지어서 사물을 구체화하고 뜻을 써내는 것이다.”라고 했다. 또 〈頌讚〉에서 “頌은 형용한다는 뜻으로 성덕을 찬미하여 드러난 모습을 서술한 것이다.”라 했다.[王利器]
역주5 祭祀哀誄(뢰) : 《文選》의 분류에 祭文이 있다. 祀는 郊廟祭祀의 樂歌이다. 《文心雕龍》 〈哀弔〉에서 “공표된 諡法에 의하면 일찍 죽는 것을 哀라고 한다. 哀란 아쉽고 그립다는 뜻으로, 슬픔이란 사실 아쉬운 마음이므로 哀라고 한다.”라 했다. 또 〈誄碑〉에서는 “誄란 포개어 쌓는다는 뜻으로, 그 덕행을 포개어 쌓아 드러내어 불후하게 하는 것이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6 : 뢰
역주7 書奏箴銘 : 《文心雕龍》 〈書記〉에서 “書란 펼친다는 뜻으로, 그 말을 펼쳐 깔아서 그것을 簡牘에 늘어놓는 것인데, 《周易》 夬卦에서 象을 취하여 분명하게 결단함을 중시한다.”라 하였다. 또 〈奏啓〉에서 “奏란 올린다는 뜻으로, 말은 아래에서 펼쳐지고 마음은 위로 올라간다.”라 하였다. 또 〈銘箴〉에서 “銘은 이름이란 뜻으로, 그릇을 살펴 반드시 바르게 이름을 붙이고, 용도를 따짐에 있어 훌륭한 덕을 중시한다.”라 하였다. 또 “箴은 針이란 뜻으로, 질병을 치료하고 우환을 예방하기 위한 것으로, 예를 들면 鍼石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王利器]
역주8 軍旅誓誥 : 《禮記》 〈曲禮 下〉에서 “약속을 誓라 한다.”라 하였다. 《尙書》 〈甘誓〉의 《正義》에서 “馬融이 말하기를 ‘軍旅를 誓라 하고, 會同을 誥라 한다.’라 하였으니, 誥와 誓는 모두 號令의 글로 뜻이 약간 다를 뿐이다.”라 했다.[王利器]
역주9 牧民 : 백성을 다스리다. 治民과 같다. 《管子》에 〈牧民〉篇이 있다.[王利器]
역주10 陶冶性靈 : 《漢書》 〈董仲舒傳〉에서 “도야하여 그것을 이룬다.”라 한 것에 대하여 顔師古는 “陶로써 기와 만드는 것에 비유하였고, 冶로써 쇠를 불려 만드는 것에 비유하였으니, 하늘이 사람을 만든 것도 이와 비슷한 데가 있다는 말이다.”라 하였다.
《文心雕龍》 〈原道〉에서 “性靈이 모인 것, 이를 일컬어 三才라 한다.”라 했고, 《詩品》 上에서는 “〈詠懷〉 詩는 性靈을 빚어서 깊은 思念을 끄집어낸 것이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11 從容諷諫 : 《白虎通》 〈諫諍〉에서 “諷諫은 지혜이다.”라 했고, 孔子도 “諫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나는 諷諫을 좇는다.”라고 했다.[盧文弨]
역주12 滋味 : 滋味란 즐겨 배우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滋는 草木 중의 맛있는 것으로, 《禮記》 〈檀弓 上〉에 曾子의 말씀으로 나오는데, 기록한 자는 생강과 계피를 가리켜 말한 것으로 보았다.[盧文弨]
《詩品》의 〈序〉에서 “五言詩는 글 중 핵심에 위치한 것으로, 모든 작품들 중 滋味가 있는 것이다.”라 하였다. 杜甫의 시 〈九月一日過孟十二倉曹十四主簿兄弟〉에서는 “淸談에서 재미를 본다.[淸談見滋味]”라 하였다.[王利器]
역주13 行有餘力 : 《論語》 〈學而〉에서 “행하고 남은 힘이 있으면[行有餘力] 그것으로 글을 배운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14 自古文人 多陷輕薄 : 魏‧晉 이래로 문인들의 좋지 못한 행실에 대한 지적은 아주 많았다. 《文選》에 수록된 魏 文帝의 〈與吳質書〉에서는 “고금의 문인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자잘한 행실에 구애받지 않아서, 명예와 절개로 스스로 설 수 있었던 이가 드물었다.”라 하였다.
《三國志》 〈魏書 王粲傳〉의 注에서는 韋誕의 말을 인용하여 “仲宣은 뚱뚱하고 고집이 센 약점이 있고, 休伯은 도무지 스스로를 단속하는 법이 없으며, 元瑜는 몸이 약한 병폐가 있고, 孔璋은 참으로 거칠고 소홀하며, 文蔚은 성격이 상당히 사납습니다. 이처럼 그들이 하는 짓이, 단지 호롱불로 자기 죽이나 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답하게 살지도 못하는 것은, 아마도 그 연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君子는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갖출 것을 요구하지는 않으므로, 붉은 옻칠에 비유하자면 비록 근본이 되는 뼈대는 없다 하더라도 그 광택은 또한 장관일 것입니다.”라 하였다.
《文心雕龍》 〈程器〉에서는 “문인들의 흠결을 대략 살펴보자면, 司馬相如는 아내를 훔치고 황금을 받았으며, 揚雄은 술을 좋아하여 가계에 적자가 났고, 馮衍은 청렴과 지조를 좇지 못하였고, 杜篤은 끊임없이 청탁을 했고, 班固는 竇憲에게 아첨하여 세도를 부렸으니, 이러한 것들이 모두 문인들의 결점이다.”라 하였다.
《魏書》 〈文苑 溫子昇傳〉에서는 “楊遵彦은 〈文德論〉을 지어, 고금의 문인들이 다들 재주를 믿고 올바른 행실을 저버리고, 경박하게 굴고 음험하게 남을 미워한다고 보았다. 오직 邢子才, 王元美, 溫子昇만이 내면과 외면이 잘 어울려 훌륭한 덕의 바탕을 지니고 있었다.”라 하였다. 顔之推의 논점은 諸家와 대체로 같지만, 상호 참고할 만하다.[王利器]
역주15 屈原露才揚己 顯暴君過 : 《史記》 〈屈原傳〉에서 “屈原은 이름이 平이고 楚 왕실과 同姓이었다. 懷王의 左徒로서 왕이 그를 깊이 신임했다. 上官大夫가 그와 同列이었는데, 총애를 다투어 마음으로 그의 능력을 시기해 왕에게 참소를 하자, 왕이 노하여 屈平을 멀리하였다. 屈平은 왕이 남의 말을 들음에 있어 총명하지 못하고, 참소와 아첨이 밝음을 가리며 간사하고 굽은 것이 공정함을 해치는 것이 미워서, 근심하고 걱정하며 깊이 생각한 끝에 〈離騷〉를 지었다.”라 하였다. 내 생각에 三閭大夫 屈原은 순수한 신하였으므로 顔之推의 견해는 옳지 않다.[趙曦明]
역주16 宋玉體貌容冶 : 宋玉의 〈登徒子好色賦〉에서 “대부인 登徒子가 楚王을 모시면서 宋玉의 단점을 지적하여 말하기를 ‘宋玉은 용모가 곱상하고 은미한 말을 잘하며 천성이 호색하니, 왕께서는 그를 후궁에 출입시키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登徒子의 말을 가지고 宋玉에게 물어봄에 宋玉이 이러이러하다고 대답을 하자, 楚王은 훌륭하다고 칭찬하였고 宋玉은 끝내 물러나지 않았다.”라 하였다.[趙曦明]
《史記》 〈屈原傳〉에서 “屈原이 죽은 후 楚나라에는 宋玉, 唐勒, 景差 등이 있었는데, 모두가 글을 좋아하여 문장으로 칭송을 받았으나, 모두 屈原의 얌전한 글만 계승하였지 끝내 直諫하는 이는 없었다.”라 하였다.[盧文弨]
宋玉의 〈諷賦〉 序에서 “宋玉은 몸이 아름다웠다.[身體容冶]”라고 한 것이 이 글의 근거가 되었다.[王利器]
역주17 東方曼倩(천) 滑稽不雅 : 東方朔은 字가 曼倩이고 平原 厭次 사람이다. 自薦으로 武帝에게 발탁되어 待詔公車에 임명되었다가, 재치 있는 滑稽로 총애를 받아 常侍郞이 되었고 한때는 太中大夫에 오르기도 했다. 《史記》 〈滑稽列傳〉과 《漢書》에 그의 傳이 있다.[역자]
《漢書》 〈嚴助傳〉에서는 “東方朔과 枚皐의 滑稽는 지론에 근거한 것은 아니었으며, 주상께서도 상당 부분 광대로서 그들을 길렀다.”라고 하였다.[盧文弨]
《漢書》의 東方朔 本傳의 贊에서 “숨는 것에 의지해 세상을 즐기고, 시대를 속이며 영합하지 않았으니, 그는 골계의 으뜸이로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18 : 천
역주19 司馬長卿 竊貲無操 : 司馬相如는 字가 長卿으로 蜀郡 成都 사람이다. 西漢의 대표적인 辭賦 작가다. 辭賦 작가로서 유명해지기 전에 가난하였던 司馬相如는 臨邛의 부자 卓王孫의 딸 文君이 과부가 된 것을 알고서, 그 지역의 현령 王吉과 작당하여 그녀를 유혹하여 卓王孫으로부터 재산을 나누어 받아 부자가 되었다. 《史記》와 《漢書》에 실린 그의 傳에 상세한 이야기가 나온다.[역자]
《漢書》 〈揚雄傳〉에서 “司馬相如는 卓氏에게서 재물을 훔쳤다.”라 하였다.[李詳]
역주20 王褒過章僮約 : 王褒에게 〈僮約〉 1篇이 있는데, 여기서 과부 楊惠의 집에 갔다고 했다. ‘〈僮約〉에 잘못이 드러났다.’라고 한 것은 아래의 ‘揚雄이 도리에 어긋나게 新나라를 찬미했다.[揚雄德敗美新]’라고 한 구절과 對句를 이룬다. ‘約’자는 ‘幼’자와 흡사하여, 여러 판본에서 ‘過章童幼’로 잘못 써놓았다.[沈揆] 《漢書》에서 “王褒는 字가 子淵이고 蜀 사람이며, 宣帝 때에 諫議大夫가 되었다.”라 하였다.[錢馥]
〈僮約〉은 《古文苑》 17에 나오는데, 노동하는 백성들을 모욕한 글이다. 《南齊書》 〈文學傳論〉에서 “王褒의 〈僮約〉은 …滑稽의 일종이다.”라 하였다. 《太公家敎》에서 “강한 바람이 불고 폭우가 내려도, 寡婦 집 문에는 들어가지 않는다.”라 하였다. 王褒가 스스로 과부 楊惠의 집에 갔다고 하였으므로, 顔之推가 그것을 일러 ‘과실이 드러났다.[過章]’라고 하였던 것이다.[王利器]
역주21 揚雄德敗美新 : 《文選》에 수록된 揚雄의 〈劇秦美新〉에 대한 李善의 注에서 “王莽이 漢나라를 찬탈하였을 때, 揚雄은 나아가서는 창을 밀치고 궁정계단에 올라 직언으로 항의하지 못하였고, 물러나서도 《太玄經》을 기초하며 마음을 비우고 본성을 온전하게 지켜내지 못하였다. 도리어 재주를 드러내며 총애를 즐겼고 진실을 속이고 녹을 구했으니, 하는 일 없이 녹을 먹었다는 풍자를 무엇으로 덮으랴? 抱朴子는 그를 孔子에 견주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라 하였다.[趙曦明]
李善의 注에 인용된 李充의 〈翰林傳論〉에 “揚雄은 秦나라의 횡포함을 비판하고 新나라의 훌륭함을 찬미하였는데, 이는 그 잘잘못을 헤아리고 優劣을 견준다는 뜻이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22 李陵降辱夷虜 : 《史記》 〈李將軍傳〉에서 “李廣의 아들 當戶에게 유복자가 있었는데 이름은 陵이었고 建章監이 되었다. 天漢 2년 보병 5천 명을 이끌고 居延을 나서서 북쪽으로 갔는데, 單于가 병졸 8만으로 李陵의 군사들을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李陵의 군사들은 화살이 다 떨어지고 죽은 병사가 반을 넘었지만, 병사들을 물리면서도 계속 싸웠다. 居延으로부터 100여 리 되는 곳에 채 도달하기 전에 匈奴가 좁은 길목을 막고서 퇴로를 끊었는데, 식량은 모자라고 구원병은 오지 않으니 적들이 세차게 공격하여 李陵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李陵은 ‘폐하께 보고 드릴 면목이 없구나.’라고 말하고서 결국 흉노에게 항복하였다. 單于는 딸을 아내로 주었다. 漢나라 측에서 그 소식을 듣고서는 李陵의 모친과 妻子를 다 죽였다. 이 이후로 李氏의 이름은 땅에 떨어졌고, 隴西의 선비로서 그의 門下에 있던 이들도 다들 수치로 여겼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23 劉歆(흠)反覆莽世 : 《漢書》 〈楚元王傳〉에서 “劉向의 막내아들 歆은 字가 子駿이다. 哀帝가 붕어하자 王莽이 정권을 잡았는데, 젊었을 때 劉歆과 함께 黃門郞으로 일한 적이 있어 太后에게 말하여 劉歆을 右曹太沖大夫에 유임시키고 紅休侯에 봉하였다. 建平 元年에 이름을 秀로 바꾸고 字를 穎叔으로 하였다. 王莽이 帝位를 찬탈하자 國師가 되었다.”라 하였다. 〈王莽傳〉에서는 “甄豊, 劉歆, 王舜이 王莽의 심복이 되어 앞장서서 帝位에 오르도록 이끌었는데, 공덕을 칭송하여 높였고 ‘安漢’이니 ‘宰衡’이니 하는 호칭이…모두가 그들이 공모한 것이었다. 劉歆은 王莽이 자기 셋째 아들을 죽인 것에 대하여 원망을 품고 있었으므로, 결국 王涉, 董忠 등과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지만, 孫伋과 陳邯이 밀고를 하자 劉歆과 王涉은 모두 자살을 하고 말았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24 : 흠
역주25 傅毅黨附權門 : 《後漢書》 〈文苑傳〉에서 “傅毅는 字가 武仲이고 扶風 茂陵 사람이다. 점잖기로 조정에서 유명하였는데, 竇憲이 대장군이 되자 傅毅를 司馬로 삼고 班固를 中護軍으로 삼으니, 竇憲 官府의 文章이 당시에 으뜸이 되었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26 班固盜竊父史 : 《後漢書》 〈班彪傳〉에서 “아들 班固는 字가 孟堅이다. 班彪가 이어 쓰고 있던 전대의 역사가 아직 상세하지 못해 그 일을 완수하고자 하였다. 누군가가 글을 올려 班固가 몰래 國史를 고쳐 쓴다고 밀고를 하자 班固를 잡아들여 옥에 가두었다. 郡에서 그가 쓰던 책을 올리자 顯宗 明帝가 이를 아주 기특하게 보시고는, 그를 蘭臺令史에 제수하여 앞서 짓던 책을 끝까지 완성하도록 하였다. 永平 중에 詔書를 받았는데, 고심하고 깊이 생각한 끝에 20여 년 후 建初 중에 비로소 완성되었다.”라 하였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역사를 훔친 것이 아니다.[趙曦明]
《漢書》 〈韋賢傳〉의 注에서는 “《漢書》 중의 贊은 모두 班固가 지은 것이지만, 그중 班彪가 먼저 論述한 것이 있을 경우, 後人들에게 밝혔다. 어떤 이는 班固가 부친의 이름을 훔쳤다고 하는데, 이를 살펴보면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王利器]
역주27 趙元叔抗竦(송)過度 : 《後漢書》 〈文苑傳〉에서 “趙壹은 字가 元叔이고 漢陽 西縣 사람이다. 재주를 믿고 오만하여 鄕黨으로부터 지적을 받았다. 여러 차례 죄를 지어 걸렸지만 구해주는 이가 있어 처벌을 면하였다. 〈窮鳥賦〉를 지었고 또 〈刺世疾邪賦〉를 지어 그의 원망과 분노를 펼쳐내었다. 郡의 計吏에 천거되었는데, 司徒 袁逢을 만나서는 절은 하지 않고 長揖만 하고 말았다. 河南尹 羊陟을 만나려 하였지만 그가 은거하여 만날 수가 없자 통곡을 하였다.”라 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지나치게 뻣뻣했던 것이다.[趙曦明]
抗竦은 남에게 뻣뻣하게 우뚝 선다는 말이다. 《廣雅》 〈釋詁〉에서는 “竦은 오른다는 뜻이다.”라 하였고, 《文選》 〈西京賦〉의 注에서는 “竦은 선다는 뜻이다.”라 했다.[王利器]
역주28 : 송
역주29 馮敬通浮華擯壓 : 《後漢書》 〈馮衍傳〉에서 “馮衍은 字가 敬通이고 京兆 杜陵 사람이다. 更始 2년 鮑永이 대장군의 사업을 행하며 북방을 안정시켰는데, 馮衍을 漢將軍으로 세워 狼孟을 우두머리로 거느리고 太原에 주둔하였다. 光武帝가 즉위하자 鮑永과 馮衍은 更始帝가 이미 죽었음을 알아차리고서 이에 병사들을 거두고 河內에서 투항하였다. 光武帝는 鮑永과 馮衍이 늦게 왔음을 원망하였는데, 鮑永은 세운 공적에 따라 임용되었지만 馮衍만은 배척당하였다. 얼마 후 曲陽令이 되어 큰 도적을 베어 食邑에 封해지게 되었으나, 참소가 있어 포상이 행해지지 못했다. 建武 말에 상소를 올려서 〈계책들을〉 직접 진술하였지만 그래도 이전의 과오 때문에 임용되지 못하였다. 明帝가 즉위하자 馮衍의 글이 그 실질을 넘어선다고 흉을 보는 사람들이 많아, 결국 집에 갇혀 살다시피 하다가 죽었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30 馬季長佞媚獲誚 : 《後漢書》 〈馬融傳〉에서 “馬融은 字가 季長이고 扶風 茂陵 사람이다. 재주가 높고 박식하여 당시에 通儒가 되었다. 鄧氏에게 혼이 나고서는 감히 세도가들을 거스르지 못하였으며, 마침내는 梁冀를 위해 李固에게 上奏하는 글을 기초하였고, 또 〈大將軍西第頌〉을 지었는데, 이로 인해 정직한 사람들의 수치가 되었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31 蔡伯喈(개)同惡受誅 : 《後漢書》 〈蔡邕傳〉에서 “蔡邕은 字가 伯喈이고 陳留 圉 사람이다. 董卓이 司徒로 있을 때 高第에 발탁되어 3일 동안 三臺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董卓이 주살될 때 蔡邕은 司徒 王允과 함께 앉아 있었는데, 별 뜻 없이 그에게 말을 하다가 탄식을 하며 낯빛에 동요가 있었다. 王允은 갑자기 그를 꾸짖고서 붙들어 廷尉에게 넘겨 죄를 다스리게 하니, 옥중에서 죽었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32 : 개
역주33 吳質詆忤鄕里 : 《魏志》 〈王粲傳〉에 “吳質은 濟陰 사람이다.”라고 附記되어 있고, 裴松之의 注에서 “吳質은 字가 季重으로, 처음에는 빈한한 집안이었으나 젊어서 貴戚들 사이에서 놀고 고향 사람들과는 함께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미 관직에 나간 후에도 고향에서는 오히려 그에게 선비[士]라는 호칭을 주지 않았다.”라 하였다.[趙曦明]
〈王粲傳〉의 注에 인용된 吳質의 別傳에서 “吳質은 앞서 위세를 믿고서 방자하게 굴어 諡號를 醜侯라 하였는데, 吳質의 아들 應이 상서를 올려 잘못되었음을 논하자 正元 연간에 이르러서 諡號를 威侯로 고쳤다.”라 하였다. 여기서 ‘고향사람들과 어근버근하다.’라고 함은, 그가 위세를 믿고 함부로 굴어 고향사람들의 불만을 샀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선비[士]의 이름을 세우지 못했던 것이다.[王利器]
역주34 曹植悖慢犯法 : 《魏志》 〈陳思王植傳〉에서 “글을 잘 지어 太祖가 특히 총애하였는데, 거의 太子가 될 뻔한 것이 몇 차례나 되었다. 文帝가 즉위하자 曹植은 제후들과 더불어 封地로 나갔다. 黃初 2년 監國謁者 灌均이 〈황제의〉 비위를 맞추려고, 曹植이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며 사자를 겁박했다고 상주했다. 관리가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였지만 文帝는 太后를 봐서 安鄕侯로 작위만 낮추고 말았다.”라고 하였다. 나머지는 앞에서 이미 나왔다.[趙曦明]
역주35 杜篤乞假無厭 : 《後漢書》 〈文苑傳〉에서 “杜篤은 字가 季雅이고 京兆 杜陵 사람이다. 박학하였지만 사소한 예절 따위는 지키지 않아 고향 사람들에게 예우받지 못했다. 美陽에 있으면서 현령과 교유하였는데, 〈杜篤이〉 자주 청탁을 하자 함께 어울려주지를 않으니 현령을 원망하였다. 현령도 괘씸하게 여겨 杜篤을 잡아들여서 서울로 보냈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36 路粹隘狹已甚 : 《魏志》 〈王粲傳〉에서 “潁川의 邯鄲淳과 繁欽, 陳留의 路粹, 沛國의 丁儀와 丁廙, 弘農의 楊修, 河內의 荀緯 등도 문장이 아름다웠지만 7인의 반열에 들지는 못하였다.”라 하였고, 裴松之 注에서 《典略》을 인용하여 “路粹는 字가 文蔚로서 陳琳, 阮瑀 등과 함께 記室를 맡았는데, 지시에 따라 孔融의 죄를 조목조목 따졌다. 孔融이 죽은 후 사람들은 路粹가 작성한 것을 보고서, 그의 재능을 대단하게 여기고 그의 글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19년에 이르러 大軍을 따라 閑中에 갔다가 천민의 나귀 요구 금지법을 위반한 일에 연루되어 처벌을 받아 죽었다.”라 하였다. 魚豢이 말하기를 “文蔚은 성격이 상당히 화를 잘 내고 사나웠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37 陳琳實號麤疏 繁(파)欽性無檢格 : 《魏志》 〈劉楨傳〉의 裴松之 注에서 “繁의 음은 파(婆)이다. 《典略》에서 ‘繁欽은 字가 休伯으로, 문학적 재능과 재치 있는 말솜씨로 젊어서 汝, 潁 지역에서 이름이 났으며, 그가 太子에게 보낸 편지는 요점을 쓰면서 뜻을 전환한 것이 모두 교묘하고 아름다웠다. 丞相의 主簿가 되었다가 죽었다.’라고 했다. 韋仲將은 ‘陳琳은 사실 본래 거칠고 무식했으며[實自麤疏], 休伯은 일정한 규범이라곤 전혀 없었다.[都無檢格]’라고 했다.”라 하였다.[趙曦明]
檢格은 法式과 같다. 《北史》 〈儒林傳〉에서 “徐遵明은 燕, 趙 지역을 유람하고 張吾貴를 師事하였는데, 몇 달 모시고 받들더니 몰래 친구에게 말하기를 ‘張氏는 이름은 높지만 의리는 일정한 法式이 없으니, 스승을 바꿉시다.’라고 했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38 : 파
역주39 劉楨屈强輸作 : 《魏志》 〈王粲傳〉에서 “東平의 劉楨은 字가 公幹으로, 太祖가 발탁하여 丞相掾으로 삼았는데, 불경죄로 처벌을 받아 관리에 의해 형이 집행되었다.”라 하였고, 裴松之의 注에서 《典略》을 인용하여 “太子가 일찍이 여러 文學하는 선비들을 청해놓고 잔치를 벌이다가, 주흥이 무르익을 때 부인 甄氏를 불러내어 인사하게 하자, 좌중의 여러 사람들은 다 엎드렸지만 劉楨만은 빤히 쳐다보았다. 太祖는 그 이야기를 듣고 劉楨을 잡아들여서, 사형은 면하게 하고 징역형에 처하였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40 王粲率躁見嫌 : 《魏志》 〈王粲傳〉에서 “王粲은 字가 仲宣이고 山陽 高平 사람이다. 西京이 혼란에 빠지자 荊州로 가서 劉表에게 의탁하였다. 劉表는 그의 외모가 못생기고 몸이 약하며 예법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하여 별로 중시하지 않았다. 太祖가 발탁하여 丞相掾으로 삼았고, 魏나라가 세워지자 侍中에 임명하였다.”라 하였고, 裴松之의 注에서 韋仲將의 말을 인용하여 “仲宣은 살이 찌고 우둔한 단점이 있었다.”라 하였다.[趙曦明]
《三國志》 〈魏書 杜襲傳〉에서는 “王粲은 성격이 조급하였다.”라 하였고, 《文心雕龍》 〈程器〉에서 “仲宣은 경솔하고 조급했다.”라고 하였다. 이는 모두 六朝人들이 王粲을 경솔하고 조급했다고 본 증거이다.[王利器]
역주41 孔融禰(녜)衡 誕傲致殞 : 《後漢書》 〈孔融傳〉에서 “孔融은 曹操의 야심과 간사한 속임수가 점차 드러나는 것을 보고서 점점 견딜 수가 없어져서, 내뱉는 말이 몹시 비딱하고 거스르는 일이 많았다.”라 하였다. 〈文苑傳〉에서는 “禰衡은 字가 正平이고 平原 般 사람이다. 젊어서 말재주가 있었고 기질은 강하고 오만하였으며, 時俗을 거스르며 만물에 대해 도도함을 즐겨 오직 孔融하고만 가까웠는데, …禰衡은 평소에 曹操를 경시하였으므로 曹操가 용납할 수가 없어서 결국 劉表에게 보내었다. 뒤에 또 劉表에게 오만하게 굴자 劉表는 창피하고 용납할 수가 없어 그를 江河太守 黃祖에게 보내었다. 黃祖가 성격이 급했기 때문에 禰衡을 그에게 보내었던 것이다. 黃祖가 빈객들을 많이 모아놓고 있었는데 禰衡의 말이 불손하였다. 黃祖가 크게 노하여 매질을 하려고 하자 禰衡이 黃祖에게 크게 욕을 하니, 마침내 그를 죽이라고 명하였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42 : 녜
역주43 楊修丁廙(이) 扇動取斃 : 《魏志》 〈陳思王植傳〉에서 “曹植은 재주가 남다른데다 丁儀, 丁廙, 楊修 등이 그 측근이 되어 거의 太子가 될 뻔했던 일이 몇 차례나 되었다. 文帝가 계략으로 그것을 막아내어 마침내 후계자로 정해졌다. 太祖는 시종 변란을 염려하였는데 楊修가 재주와 책략이 있다고 보아 결국 죄를 물어 楊修를 주살하였다. 文帝가 즉위하자 丁儀와 丁廙, 그리고 그 집안 식구들 중 남자들을 주살했다.”라 하였다. 裴松之의 注에서 “丁儀는 字가 正禮이고 沛郡 사람이다. 丁廙는 字가 敬禮이고 丁儀의 동생이다.”라 하였다.[趙曦明]
〈陳思王植傳〉의 注에 인용된 《文士傳》에서 “丁廙가 일찍이 太祖에게 조용히 말하기를 ‘臨淄侯 曹植은 天性이 어질고 효성스러운 것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요, 聰明과 지혜는 거의 완전에 가까우며 문장은 필적할 사람이 없어, 오늘날 천하의 어질고 재주 있는 군자들이 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그와 교유하고 그를 위해 죽기를 바라고 있으니, 실로 하늘이 위대한 魏나라에게 복을 모아주신 것으로서, 무궁한 복을 영원히 받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太祖의 마음을 움직여보려고 하였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44 : 이
역주45 阮籍無禮敗俗 : 《晉書》 〈阮籍傳〉에서 “阮籍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마침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상대가 그만두자고 하였지만 阮籍은 그대로 머무르며 그와의 승부를 끝냈다. 그러고 나서 술 두 말을 마시고 한 차례 소리를 지르더니 피를 몇 되나 토했다. 裴楷가 조문하러 갔더니 阮籍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술에 취해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라 하였다. 《世說新語》의 劉孝標 注에서는 《晉陽秋》를 인용하여 “何曾은 太祖가 있는 자리에서 阮籍에게 일러 말하기를 ‘그대는 멋대로 방탕하여 예를 해치고 풍속을 문란하게 하는데, 만약에 고치지 않는다면 王法에 어찌 용납되겠소?’라 하고, 太祖에게는 ‘마땅히 먼 곳으로 보내어 王道를 깨끗이 해야 합니다.’라 하였다. 太祖가 말하기를 ‘이 賢人은 병약해서 그런 것이니 그대가 나를 봐서 용서해주구려.’라고 했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46 嵇康凌物凶終 : 본서 제8 〈勉學〉篇 12 주 26) 참조.[趙曦明]
역주47 傅玄忿鬭免官 : 《晉書》 〈傅玄傳〉에서 “傅玄은 字가 休奕이고 北地 泥陽 사람이다. 晉 武帝가 선양을 받고서 널리 직언을 받아들였는데, 傅玄과 散騎常侍 皇甫陶가 간언 다루는 일을 함께 맡았다가, 얼마 안 있어 侍中으로 전보되었다. 애초에 傅玄이 皇甫陶를 추천하였는데, 皇甫陶가 들어온 후 傅玄과 일 때문에 마찰이 생기면서 둘이서 시끄럽게 말다툼을 하였다. 관리가 이 일을 상주하자 두 사람은 결국 이 일로 관직을 그만두게 되었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48 孫楚矜誇凌上 : 《晉書》 〈孫楚傳〉에 “孫楚는 字가 子荊이고 太原 中都 사람이다. 재주와 節操가 빼어나고 호쾌함이 남달랐지만, 오만한 데가 있어 고향 마을에서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나이 마흔에 비로소 鎭東軍事에 참여하였다가 뒤에 佐著作郞에 전보되었는데, 驃騎將軍 石苞의 일에도 참여하였다. 孫楚는 자신의 才氣에 자부심을 갖고서 石苞를 업신여기고 얕잡아보았는데, 그의 군영에 이르자 바로 長揖을 하고서 ‘天子께서 나에게 卿의 軍事에 참여하도록 명하셨소.’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결국 서로 싫어하여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49 陸機犯順履險 : 《晉書》 〈陸機傳〉에서 “趙王 司馬倫이 정치에 간여하면서 陸機를 끌어들여 相國參軍으로 삼았다. 司馬倫은 장차 帝位를 찬탈하고자 그를 中書郞으로 삼았다. 司馬倫이 처형되고 나서 帝王 冏은 九錫文과 禪讓하는 詔書를 작성할 때 분명 陸機가 참여했을 것으로 의심하여, 陸機 등 9인을 잡아들여 廷尉에게 넘겼다. 成都王 穎과 吳王 晏이 그를 위해 함께 구명운동을 하여, 사형에서 감형되어 변방으로 귀양 갔다가 다시 사면을 받고 중지되었다. 太安 초에 司馬穎은 河間王 顒과 더불어 병사를 일으켜 長沙王 乂를 토벌하면서, 陸機를 後將軍河北大都督 서리로 임명하여 鹿苑에서 싸웠는데, 陸機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환관 孟玖가 그에게 모반의 뜻이 있다고 무고를 하자 司馬穎이 크게 노하여 牽秀로 하여금 몰래 陸機를 잡아들이게 하였다. 그는 결국 軍中에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50 潘岳乾沒取危 : 《晉書》 〈潘岳傳〉에서 “潘岳은 字가 安仁이고 滎陽 中牟 사람으로 성격이 경솔하였고 세상의 이익을 좇았다. 그의 어머니가 자주 그를 꾸짖기를 ‘너는 마땅히 만족할 줄 알아야 하건만, 끊임없이 남의 재물이나 거저 빼앗고[乾沒] 있구나!’라고 하였으나, 潘岳은 끝내 고치지 못하였다. 애초에 그의 부친이 琅邪內史로 있을 때 孫秀가 小史가 되어 潘岳의 잔심부름을 도왔는데, 潘岳은 그의 사람됨을 싫어하여 몇 차례 때리고 욕을 하였다. 趙王 倫이 정권을 보좌하게 되자 孫秀가 中書令이 되어서, 결국 潘岳과 石崇 등이 淮南王 允과 齊王 冏을 업고서 난을 일으킬 음모를 꾸민다고 모함을 하여 죽이고 삼족을 멸하니, 長幼를 가리지 않고 일시에 해를 당하였다.”라 하였다.[趙曦明]
《通雅》 5에서 “乾沒은 그냥 沒收한다는 말과 같다. 《隋書》 〈王劭贊〉에서 ‘거저 먹는 걸로 이익을 꾀한다.[乾沒營利]’라 하였고, 宋子京이 지은 〈劉待制墓銘〉에서는 ‘아전이 연줄을 이용해 거저 먹는다.[乾沒]’라 하였다. 乾은 거저 그것을 얻는다는 말과 같고, 沒은 자기가 가진 것을 잃는다는 말과 같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51 顔延年負氣摧黜 : 《南史》 〈顔延之傳〉에서 “顔延之는 字가 延年이고 琅邪 臨沂 사람이다. 독서에 있어서는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문장은 당시 최고였으나, 함부로 허튼소리를 잘해 남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劉湛 등이 그를 원망하여 劉義康에게 말을 해서 永嘉太守로 내보내었다. 顔延之가 불만을 품고서 〈五君詠〉을 지으니, 劉湛이 그 가사의 취지가 불손하다고 하여 멀리 있는 郡으로 쫓아내려고 하자, 文帝가 詔書를 내려서 ‘마을에서 잘못을 반성하도록 하되, 가령 다시 깨달아 고치지 못한다면 東土로 쫓아보내야 할 것이며, 용서하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직접 일에 따라 기록하도록 하라.’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집에서만 지내면서 인간사에 간여하지 않은 것이 7년이었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52 謝靈運空疎亂紀 : 謝靈運은 南朝의 대표적인 명문가 출신의 문인으로 山水詩의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는 평을 받는다. 세습하여 康樂公에 봉해졌으므로 세상에서 그를 謝康樂이라 불렀다. 東晉을 이어 宋나라가 건국하면서 작위가 강등되고 정치 일선으로부터 밀려나게 되자 늘 울분을 품고 직무를 게을리 하면서 山川을 돌아다니며 방탕한 행동을 보였다. 질서문란과 지나친 일탈을 문책하기 위해 司徒가 사람을 시켜 잡아들이려 하자 군사를 일으켜 반기를 들고 달아났고, 결국 관군에게 토벌되어 사로잡혀 廣州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반란을 꾀하다가 결국 그곳에서 棄市에 처해졌다. 《南史》에 그의 傳이 있다.[역자]
“謝靈運은 허황하여 실속이 없었고, 顔延之는 속이 좁고 야박했다.”라고 한 두 구절은 《宋書》 〈廬陵王義眞傳〉에 나온다.[錢大昕]
역주53 王元長凶賊自貽 : 《南史》 〈王弘傳〉에서 “증손인 王融은 字가 元長으로, 문장이 민첩하고 빨라 竟陵王 蕭子良이 특별히 가까이하고 좋아하였다. 武帝가 병이 위독해져 잠시 혼절한 사이에 王融은 군복에 붉은 저고리를 입고 中書省 입구에서 東宮의 경호원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서, 詔書를 고쳐 蕭子良을 옹립하고자 하였다. 주상이 다시 깨어나 조정의 일을 西昌侯 鸞에게 맡기고서 곧바로 붕어하였다. 王融이 이에 蕭子良의 병사들로써 여러 문의 출입을 금하도록 처분하였다. 西昌侯가 소식을 듣고서 급히 말을 몰아 雲龍門에 이르렀지만 들여보내주지 않자, 밀치고 들어가 太孫을 받들어 大殿에 오르게 하고 蕭子良을 부축하여 나왔다. 鬱林은 王融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즉위하고 10여 일 후에 잡아들여 廷尉에게 넘겨 옥에 가두고 賜死하였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54 謝玄暉侮慢見及 : 《南史》 〈謝裕傳〉에서 “謝裕의 동생이 謝述이고, 謝述의 손자가 謝脁인데, 그는 字가 玄暉로 배우기를 좋아하고 명망이 있었으며 문장이 淸麗하였다. 王敬則의 반란 음모를 알려 尙書吏部郞에 전보되었다. 東昏侯가 덕망을 잃자 江祏은 江夏王 寶玄을 옹립하려 했다가, 끝에 또 의심이 생겨 마음을 바꾸어 始安王 遙光을 옹립하고자 했다. 遙光도 친지 劉渢을 보내어 謝脁에게 그 뜻을 전하였는데, 謝脁는 자신이 明帝에게 은혜를 받았다고 여기고서 응답을 하지 않았다. 며칠 후 遙光이 謝脁에게 衛尉의 일을 겸하여 맡도록 하자, 謝脁는 말려들까 두려워 바로 江祏 등의 모의를 左興盛에게 알리고 劉暄에게도 이야기하였다. 劉暄은 놀라는 척하고서는 말을 달려 始安王과 江祏에게 가서 알렸다. 始安王은 謝脁를 東陽郡으로 보내려 하였지만 江祏이 한사코 동의하지 않았다. 앞서 謝脁는 江祏의 사람됨을 얕보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음해를 하여 謝脁를 잡아들여 옥에 가두니, 옥에서 죽었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55 翹(교)秀 : 翹는 높은 모양이고, 翹秀는 빼어난 것들 중에서도 더욱 특별한 것을 말한다.[盧文弨]
역주56 : 교
역주57 皆負世議 : 漢나라는 秦나라의 폐단을 딛고 건국하였으나, 禮에 관한 문헌들이 없는 게 많았다. 武帝가 즉위하여 百家들을 축출하고 六經을 표방하며, 학교를 일으키고 郊祀를 보수하고 正朔을 고치고 법률과 역사를 정하고 문장을 제창하니, 그 찬란함이 볼 만하였다. 그런데 공훈을 탐내어 병력을 남용하고 무예를 더럽히다가 巫蠱의 禍를 초래하였다. 魏나라의 세 임금은 모두 훌륭한 문장력을 갖추었지만 끝내 漢나라의 역적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다. 文帝는 형제간에 박정하였고, 明帝는 토목공사에 사치스러웠다.[趙曦明]
宋 世祖 孝武帝 駿은 평소 글쓰기를 좋아하였지만 즉위한 후에는 酒色에 빠져 그의 叔父 義宣의 딸을 殷貴妃로 삼았으므로, 세간의 평판을 아랑곳하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 趙曦明은 晉 武帝로 풀이하였는데, 잘못된 것이다.[李慈銘]
역주58 自子游子夏…但其損敗居多耳 : 王得臣이 《麈史》 中에서 “《顔氏家訓》이 훌륭하다고 하기에 충분하지만, 文章을 논하면서 子游, 子夏, 孟軻, 荀卿, 枚乘, 張衡, 左思 등을 미쳤다 하고, 또 揚雄을 비난하는 것을 나는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라 한 것은, 바로 이 대목을 지적한 것이다. 이 지적 중에 孟軻를 荀卿 앞에 둔 것은, 孟軻를 존중하여 원문의 순서를 고친 것이다.[王利器]
역주59 子游子夏 : 《論語》 〈先進〉에서 “文學은 子游와 子夏이다.”라고 하였다. 子游는 姓이 言이고 이름은 偃이며, 子夏는 姓이 卜이고 이름은 商으로, 모두 孔子의 弟子이다. 《史記》 〈仲尼弟子列傳〉에 상세하게 나온다.[王利器]
역주60 荀況 : 《漢書》 〈藝文志〉에 “《孫卿子》 33篇이 있다. 이름은 況이고 趙나라 사람으로 齊나라 稷下에서 祭酒가 되었다.”라 하였고, 顔師古의 注에서 “본래는 荀卿이라 불렀는데, 宣帝의 諱를 피하여 孫이라 하였다.”라 하였다. 지금 남아 있는 책은 32篇이다.[趙曦明]
荀卿은 《史記》에 列傳이 있다. 《漢書》 〈藝文志〉에서 33篇이라 한 것은, 아마도 目錄 1卷을 셈하였을 것이다.[王利器]
역주61 枚乘 : 《漢書》 〈枚乘傳〉에 “枚乘은 字가 叔이고 淮陰 사람이다. 吳王 濞의 郎中이 되었는데, 吳王이 반역을 모의함에 간언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떠나서 梁 땅으로 갔다. 梁의 賓客들은 모두들 辭賦를 잘 지었는데, 枚乘이 그중 최고였다. 孝王이 죽자 淮陰으로 돌아갔다. 武帝는 太子 시절부터 枚乘의 명성을 듣고 있었으나 즉위할 무렵에는 年老해서, 安車로 불렀으나 오는 도중에 죽었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62 賈誼 : 《漢書》 〈賈誼傳〉에 “賈誼는 雒陽 사람이다. 詩書를 외우고 글을 잘 지어 郡에서 칭송이 있었다. 文帝가 불러 博士로 삼았으며 고속 승진하여 그해에 太中大夫에까지 올랐고, 나중에는 長沙王과 梁懷王의 太傅가 되었는데, 죽을 때 나이가 서른셋이었다.”라 하였다. 《漢書》 〈藝文志 儒家〉에는 “《賈誼》 58편, 또 賦 7편이 있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63 蘇武 : 《漢書》 〈蘇建傳〉에서 “建의 둘째 아들 蘇武는 字가 子卿이다. 栘中監의 직위로 匈奴에 파견되었는데, 單于가 그를 굴복시키려 하였으나 蘇武가 따르지 않자, 19년 동안 억류시켰다가 비로소 돌려보냈다.”라 하였다. 《文選》에 蘇武의 五言詩 4편이 수록되어 있다.[趙曦明]
역주64 張衡 : 《後漢書》 〈張衡傳〉에서 “張衡은 字가 平子이고 南陽 西鄂 사람이다. 〈二京賦〉를 지었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65 左思 : 《晉書》 〈文苑傳〉에서 “左思는 字가 太沖이고 齊國 臨淄 사람이다. 〈齊都賦〉를 지었는데 1년 만에 완성되었다. 다시 〈三都賦〉를 지으려고 구상하기를 10년, 문과 뜰, 울타리와 뒷간에 모조리 紙筆을 갖다놓고서 1句를 얻으면 바로 기록을 해놓았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66 標擧興會 : 《淮南子》 〈要略〉에서 “시작되고 마치는 곳을 높이 드러내었다.[標擧]”라 하였고, 許愼의 注에서 “標는 끝이다.”라 하였다. 《世說新語》 〈賞譽〉에서 “王恭은 처음에 王建武와 사이가 아주 좋았는데, 뒤에 袁悅에게 이간질을 당해 결국 의심하고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늘 감흥이 일어날 때마다[每至興會] 그리워하곤 했다.”라 하였다. 《文選》 〈謝靈運傳論〉에서 “謝靈運은 감흥이 높이 드러났다.[興會標擧]”라고 하였고, 李善의 注에서 “興會는 情과 興의 만남이다. 《周禮》의 鄭玄 注에서 ‘興이란 物에 일을 기탁하는 것이다.’라고 했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67 淸巧 : 淸新하고 교묘함[淸新奇巧]을 말하는데, 六朝詩의 한 특징이다. 뒤에서도 “何遜의 시는 실로 淸巧하다.”라 하였고, 또 “何遜은 참으로 淸巧함이 풍부하다.”라 하였으며, 《詩品》 下에서는 “鮑照의 歌詩는 왕왕 우뚝하게 홀로 빼어나고 淸巧하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68 神厲九霄 志凌千載 : 《文選》에 수록된 嵇康의 〈贈秀才入軍〉 詩의 “중원 땅을 힘차게 내달아 오른다.[凌厲中原]”에 대한 李善의 注에서 《廣雅》를 인용하여 “凌은 내닫는다는 뜻이고, 厲는 오른다는 뜻이다.”라고 했다. 《廣雅》 〈釋詁〉에 나온다.[王利器]
역주69 諷刺之禍 速乎風塵 : 《少儀外傳》 下에서는 ‘塵’을 ‘霆’으로 인용해놓았는데 뜻이 더 나으며, 《淮南子》 〈兵略訓〉에서는 “우뢰 천둥[雷霆]처럼 갑작스럽고, 비바람처럼 빠르다.”라 하였다.[王利器]
筆禍를 말한 것이다.[역자]
역주70 元吉 : 《周易》 坤卦에서 “누런 치마를 입으면 크게 길하다.[元吉]”라 하였다. 《文選》 〈東京賦〉에서는 “영명한 임금에게 큰 복[元吉]을 내린다.”라 하였고, 薛綜의 注에서 “元은 크다는 뜻이고, 吉은 복이다.”라 하였다.[王利器]

안씨가훈(1)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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