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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氏家訓(1)

안씨가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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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文字學의 중요성
夫文字者, 根本。
저전지學徒, 多不曉字:讀오경五經者, 是而非;習賦誦者, 信而忽;明《사기史記》者, 專而廢;學《한서漢書》者, 悅而略
不知書音是其枝葉, 소학小學乃其
至見音義則貴之, 得、《광아廣雅》而
一手之中, 向背如此, 況異代各人乎!


20. 文字學의 중요성
무릇 문자文字라 하는 것은 갖가지 고대 전적의 근본이다.
세상의 배우는 무리들은 대부분 문자에 밝지 못하여, 오경五經을 읽는 사람들은 서막徐邈을 옳다 여길 뿐 허신許愼을 그르다 하며, 를 익히고 암송하는 사람들은 저전지褚詮之는 신임하되 여침呂忱은 홀대하며, 《사기史記》를 밝히는 사람들은 서광徐廣추탄생鄒誕生〈의 독음풀이〉에만 전념할 뿐 소전小篆사주史籒[大篆]는 뒷전으로 돌려버리며, 《한서漢書》를 배우는 사람들은 응소應劭소림蘇林〈의 훈석訓釋〉만 반가워할 뿐 《삼창三蒼》과 이아二雅는 건너뛰어 버린다.
글자의 독음讀音이란 문자학文字學지엽枝葉에 불과한 것이며, 소학小學이야말로 문자학文字學근간根幹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복건服虔이나 장읍張揖음의音義〈풀이〉를 보게 되면 이를 귀하게 여기지만, 〈복건服虔이 쓴〉 《통속문通俗文》이나 〈장읍張揖이 쓴〉 《광아廣雅》는 얻어도 이를 돌아보지도 않는다.
한 사람의 손에서 쓰인 것에서도 지향하거나 배척함이 이와 같거늘, 하물며 시대를 달리하는 다른 사람들에게서랴!


역주
역주1 墳籍 : 《文選》에 실린 應休璉의 〈與從弟君苗君胄書〉에 보이는 “고대 전적[墳籍]에 몰두해서 정통하고서야 입신양명도 그제서 가능한 일이다.”라는 구절의 呂延濟의 주석에 의하면 “墳籍이란 三墳五典[典墳]을 가리킨다.”고 하였다.[王利器]
古代典籍, 典墳[三墳五典], 혹은 갖가지 書籍이다.[역자]
역주2 徐邈 : 《晉書》 〈儒林傳〉에 “徐邈은 東莞郡 姑幕縣 사람으로 永嘉의 난에 京口(揚州의 丹陽郡 丹徒縣에 속한 지역으로, 南朝가 建鄴으로 천도한 이후의 이름)로 옮겼다. 徐邈은 태도와 성품이 단아하고 박학다식하여 孝武帝가 儒學之士를 초빙할 때 謝安이 그를 천거하여 발탁되었다. 44세에 처음 中書舍人이 되었으며 中書省에서 황제를 모셨다. 章節과 句讀를 외우는 대신 文理를 해설하고 핵심을 밝혀 《五經音訓》을 편찬하였으므로 學者들이 그를 원조로 삼았다.”고 하였다.[趙曦明]
역주3 許愼 : 東漢의 경학가 겸 문자학가로 部首에 의거하여 漢字를 수록한 최초의 字典 《說文解字》를 지었다. 이 책은 漢代의 和帝 永元 10년(100)에 시작하여 安帝 建光 元年(121)에 이르러 완성되었으며, 자형에 근거하여 540개의 부수를 세우고, 〈敍言〉 1편과 함께 모두 15편에 도합 9,353자를 분류하면서 모든 표제자는 小篆체를 채용하여 표기해놓았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玉篇》류의 한자사전은 모두 이 책의 체재를 따른 것이며 六書에 입각하여 그가 분석한 造字 원리는 지금도 여전히 한자를 분석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역자]
역주4 褚詮 : 《漢書》 〈揚雄傳〉에 실린 諸賦의 주석에는 때로 諸詮之의 설명이 인용되어 있고 宋祁 역시 때로 諸詮之를 인용하고 있으며 《經典釋文》에서도 諸詮之를 인용하고 있으나, 諸와 褚는 字가 다르므로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아직 알지 못하겠다.[趙曦明]
《隋書》 〈經籍志〉에 “《百賦音》 10권은 (劉)宋의 御史 褚詮之의 편찬이다.”라고 하였다.[王利器]
역주5 呂忱 : 《隋書》 〈經籍志〉에 “《字林》 7卷은 晉代의 弦縣令 呂忱의 편찬이다.”라고 하였다.[趙曦明]
唐代 封演의 《聞見記》에 “晉代에 呂忱이 편찬한 《字林》 7卷 역시 540부수를 세웠으나 모두 12,824자를 수록하고 있다.”고 하였다. 《字林》도 《說文解字》를 모방하여 지은 것이되 《說文解字》보다 3천여 자가 많아진 것이다.[역자]
역주6 : 《隋書》 〈經籍志〉에 “宋의 中散大夫 徐廣은 《史記音義》 12卷을 편찬하였다.”고 하였다.[趙曦明]
周法高本에는 ‘徐’가 ‘皮’로 되어 있다. 周法高는 이에 대해 吳承仕의 견해를 인용하여 ‘皮, 鄒’의 ‘皮’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고 하였으며, 본서 제17 〈書證〉篇에서도 “裴駰, 徐廣, 鄒誕生이 모두 ‘悉’자로 ‘述’을 音讀하고 있다.”고 하여 ‘徐, 鄒’를 나란히 들고 ‘皮’는 ‘裴’, 혹은 ‘徐’자의 오자일 것으로 여기고 있다. 본문에서는 王利器本이 呂祖謙(宋)의 《少儀外傳》 上에 근거하여 고친 바를 따른 것이다.[역자]
역주7 : 鄒誕生을 가리킨다. 《隋書》 〈經籍志〉에 “《史記音》 3卷은 梁의 輕車錄事參軍 鄒誕生의 편찬이다.”라고 하였다.[역자]
역주8 篆籒(주) : 許愼은 《說文解字》 〈敍言〉에서 대개 말하기를 “黃帝가 처음 글자를 쓰기 시작할 때는 대개 사물에 근거하여 그 형상을 본떴다. 周 宣王의 〈太史 籒가 지은〉 《大篆》 50篇에 이르자, 古文과는 더러 달라져 있었다. 그 뒤 〈전국시대에는〉 七國 사이에서 말하는 소리도 다르고 쓰는 글자모양도 달라져 있으므로 秦이 天下를 병탄하자 丞相 李斯가 이것을 통일시키도록 건의하였다. 李斯는 《蒼頡篇》을 짓고, 中車府令 趙高는 《爰歷篇》을 지었으며, 太史令 胡毋敬은 《博學篇》을 지은바, 이들은 모두 太史 籒의 大篆에서 취하되 더러는 자못 살펴가며 고쳤으니 이른바 小篆이라는 것이다. 이 무렵 업무가 번잡해지면서 비로소 隷書가 생겨 획이 간략해지더니 古文은 이로부터 단절되었다.”고 하였다.[趙曦明]
小篆과 史籒(大篆)를 가리킨다.[역자]
역주9 : 주
역주10 : 《隋書》 〈經籍志〉에 “《漢書集解音義》 24卷은 應劭의 편찬이다.”라고 하였다.[趙曦明]
應劭(約153~196)를 가리킨다. 字가 仲遠, 혹은 仲瑗으로, 汝南郡 南頓縣 사람이다. 東漢의 學者로 泰山郡太守를 맡았으며, 나중에 袁紹에게 귀의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漢官儀》와 《風俗通義》 등이 현존하며, 《風俗通義》에는 泰山 관련 史料가 풍부하다.[역자]
역주11 : 《漢書》 〈敍例〉에 “蘇林은 字가 孝友로 陳留郡 外黃縣 사람이다. 魏나라 때 給事中의 지위에 있었으며, 黃初 연간에 博士로 옮겨졌다가 安成亭侯로 봉해졌다.”고 하였다.[趙曦明]
蘇林(220년 前後 생존)을 가리킨다. 漢末, 魏初 간의 학자이다. 고금의 字義를 꿰뚫고 있어서 諸書의 傳文 가운데 의심스러운 것이 있으면 그가 모두 訓釋하였다.[역자]
역주12 : 《隋書》 〈經籍志〉에 “《三蒼》 3卷은 郭璞이 주석하였다.”고 하였다. 秦의 승상 李斯는 《蒼頡篇》을 짓고, 漢의 揚雄은 《訓纂篇》을 지었으며, 後漢의 郞中 賈魴은 《滂喜篇》을 지었으므로, 이들을 《三蒼》이라 한 것이다.[趙曦明]
역주13 : 《廣雅》 3卷은 魏나라 때 博士 張揖이 편찬한 것이며, 《小爾雅》 1卷은 孔鮒가 편찬한 것에 李軌가 略解를 가한 것이다.[趙曦明]
趙曦明에 따르면, 二雅는 《廣雅》와 《小爾雅》를 가리킨다.[역자]
역주14 宗系 : 主體, 根本, 혹은 宗族의 世系이다.[역자]
역주15 服虔 : 《後漢書》 〈儒林傳〉에 “服虔은 字가 子愼으로 河南 滎陽 사람이다. 文論을 잘 지어 《春秋左氏傳解》를 지었다.”고 하였다.[趙曦明]
역주16 張揖 : 앞의 ‘雅’의 주석 참조.[역자]
역주17 通俗 : 《通俗文》을 가리킨다. 《隋書》 〈經籍志〉에 “《通俗文》 1卷은 服虔이 편찬하였다.”고 하였다.[趙曦明]
역주18 不屑 : 달갑게 여기지 않다. 돌아볼 가치도 없다. 극단적으로 경시하다.[역자]

안씨가훈(1)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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