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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氏家訓(2)

안씨가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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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漢書》의 ‘肎’
《漢書》:“。” 江南本皆作“宵”字。
沛國, 博覽經籍, 偏精班《漢》,
顯子臻, , 讀班史, 呼爲田肎。
梁元帝嘗問之, 答曰:“此無義可求, 但臣家舊本, 以改‘宵’爲‘肎’。” 元帝無以之。
吾至江北,


16. 《한서漢書》의 ‘
한서漢書》에 “전긍田肎이 황제께 하례賀禮를 드렸다.[전긍하상田肎賀上]”는 구절이 있는데, 강남江南의 판본에서는 〈‘’자가〉 모두 ‘’자로 되어 있다.
패국沛國유현劉顯경전經典을 두루 살폈던 이로 특히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에 정통精通하여 나라 때에는 ‘한성漢聖’이라 일컬어졌다.
유현劉顯의 아들 가업家業을 잇기에 손색이 없었는데, 반고班固의 《한서漢書》를 읽을 때 ‘전긍田肎’으로 불렀다.
양 원제梁 元帝가 일찍이 그 이유를 묻자, “이는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고 다만 의 집안에 있는 구본舊本에 ‘’자가 자황雌黃칠로 지워지고 ‘’자로 고쳐져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므로, 원제元帝가 그에게 캐물을 말이 없었다.
내가 강북江北으로 건너와 〈이곳의〉 판본을 보았더니 ‘’자로 되어 있었다.


역주
역주1 田肎(긍)賀上 : 항간의 板本에는 ‘肎’을 ‘肯’으로 쓰고 있으나, 이는 俗字이다.[趙曦明]
《漢書》 〈高帝紀〉 6년조에 보이는 구절이다.[周法高]
역주2 劉顯 : 《梁書》 〈劉顯傳〉에 의하면 “劉顯은 자가 嗣芳으로, 沛國 相縣 출신이며 해박하고 통달한 사람이다. 劉顯은 아들이 셋인데, 莠‧荏‧臻이며, 그 가운데 臻이 일찍이 이름이 났다.”고 하였다.[趙曦明]
역주3 梁代謂之漢聖 : 《北史》 〈文苑列傳 劉臻傳〉에 의하면 “兩 《漢書》(班固의 《漢書》와 范曄의 《後漢書》)에 해박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를 ‘漢聖’이라 불렀다.”고 하여, 漢聖은 劉顯의 아들 劉臻을 일컬은 것이니 아마 착오가 있는 듯하다.[王利器]
역주4 不墜家業 : 가업을 잇기에 손색이 없다. 《隋書》 〈文學列傳 劉臻傳〉에 의하면 “劉臻은 字가 宣摯로, 梁 元帝 때에 中書舍人으로 옮겨졌다가 江陵이 함락되자 北周로 들어갔다. 재상 宇文護가 中外府記室로 기용하니 군사문서나 격문은 그의 손에서 이루어진 것이 많았다.”고 하였다.[趙曦明]
《隋書》 〈楊汪傳〉에 의하면 “〈楊汪이〉 劉臻으로부터 《漢書》를 전수받았다.”고 하였다.[王利器]
역주5 雌黃 : 砒素와 硫黃이 섞인 광물로 약재 혹은 황색 顔料인데 글을 수정할 때 이것을 사용하였다.[역자]
역주6 : 詰問하다. 본편 4 주 3) 참조.[역자]
역주7 見本爲肎 : 郭忠恕의 《佩觿》에 의하면 “《漢書》의 田肯은 肯자가 본래 肎으로 되어 있었던 까닭에 宵로 잘못 쓰였던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史記》 〈高帝紀〉에 보이는 “田肯이 賀禮 드렸다.”는 구절의 《索隱》에 의하면 “《漢紀》와 《漢書》에서 宵로 되어 있자, 劉顯은 ‘전해오는 책에는 肯으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하였다.[周法高]

안씨가훈(2)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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