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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氏家訓(1)

안씨가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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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등잔 밑이 어둡다
世人多蔽, ,
校其長短, 覈其精麤, 或彼不能如此矣。
所以人謂공자孔子, 昔, 不可不留心也。


2. 등잔 밑이 어둡다
세상 사람들은 다들 사리事理에 어두워서, 귀로 듣는 것을 중시하고 눈으로 보는 것은 천시하며, 멀리 있는 것을 중히 여기고 가까이 있는 것을 가벼이 여긴다.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면서 가까이 지내다 보면 뛰어난 사람이 있어도, 늘 가볍게 여겨 함부로 대하고 예로써 공경하지 않는다.
타 지역 다른 고을 〈사람〉 같으면 약간의 풍문風聞만 있어도 목을 늘이고 발돋움하고서 애타게 기다리는 것이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보다도 더하다.
장단점을 비교해보고 잘하고 못하는 것을 꼼꼼히 따져보면, 때로는 먼 데 있는 사람이 가까이 있는 사람만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라 사람들이 공자孔子를 일컬어 ‘동쪽 집에 사는 ’라 낮추어 불렀고, 옛날 나라의 궁지기宮之奇는 어려서 군주와 함께 자랐다고 군주가 그를 얕보고서 그의 간언諫言을 받아들이지 않아 망국亡國에 이르렀으니, 유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주
역주1 貴耳賤目 : 《文選》에 수록된 張衡의 〈東京賦〉에서 “客의 말씀 같은 것들은 근본은 배우지 않고 껍데기만 배우는 것이요, 귀로 듣는 것만 존중하고 눈으로 보는 것은 천시하는 것입니다.”라 하였고, 李善의 注에서 桓譚의 《新論》을 인용하여 “세상에서는 다들 옛것을 높이고 지금 것은 낮추며, 듣는 것은 귀하게 여기고 보는 것은 천시한다.”라 했다.” 《抱朴子》 〈廣譬〉에서는 “멀리 있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가까이 있는 것을 천하게 여기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마음 쓰는 방식이이요, 귀로 듣는 것은 믿고 눈으로 보는 것은 못 믿어서 내버리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걱정거리이다.”라고 했다.[王利器]
역주2 重遙輕近 : 닭은 五德을 갖고 있지만 가까이 있어서 삶아 먹힌다. 黃鵠은 五德이 없지만 멀리 있어서 존중을 받는다. 이것이 魯 哀公이 田饒를 놓치게 된 까닭이다.[郝懿行]
역주3 少長周旋 :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나며[少長] 가까이 지내다[周旋]. 뒤에 나오는 ‘少長於君’의 少長도 같은 뜻으로 쓰였다.[역자]
역주4 每相狎侮 不加禮敬 : 《禮記》 〈曲禮 上〉에서 “어진 사람은 친근하게 굴면서도 공경한다.”라 하였고, 또 “예는 절도를 넘지 않고, 상대방을 경시하거나 업신여기지 않으며, 친압함을 좋아하지 않는다.”라 하였다. 鄭玄의 注에서 “그렇게 하면 공경함을 손상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盧文弨]
역주5 他鄕異縣 : 《文選》에 수록된 〈飮馬長城窟行〉에서 “각기 타향과 객지에서[他鄕各異縣], 이리저리 떠돌며 만나지 못하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6 風聲 : 《尙書》 〈畢命〉의 “風聲을 세운다.”에 대해, 《孔傳》에서 “그 훌륭한 風을 세우고, 그 훌륭한 聲을 선양한다.”라고 풀이하였다. 《三國志》 〈蜀書 許靖傳〉의 注에 인용된 《魏略》에서는 “때때로 바람 소리[風聲]에서 소식을 들었습니다.”라 하였다.[王利器]
소문이나 평판을 말한다.[역자]
역주7 延頸企踵 : 《漢書》 〈蕭望之傳〉에서 “천하의 선비들이 목을 늘이고 발돋움을 하고서 기다린다.[延頸企踵]”라고 하였다.[王利器]
역주8 飢渴 : 《三國志》 〈蜀書 諸葛亮傳〉에서 “諸葛亮이 말하기를 ‘장군께서는 영웅들을 통할하시면서, 賢者 그리워하기를 마치 목마른 듯이 하십니다.’라 했다.”라 하였다. 《文選》에 수록된 曹子建의 〈責躬詩〉에서 “황제 뵙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마치 목마른 듯, 배고픈 듯하옵니다.[如渴如飢]”라 하였고, 李善의 注에서 “張奐의 〈與許季師書〉에 ‘뵙지 못한 지가 아득히 오래고 또 오래되었으니, 배고프고 목마른 그리움[飢渴之念]을 어떻게 잊을 수 있으리오?’라 하였고, 《毛詩》에서는 ‘근심하는 마음 열렬하여, 배고프고 목마른 듯.[載飢載渴]’이라 했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9 東家丘 : 《魏志》 〈邴原傳〉의 裴松之의 注에 인용된 〈原別傳〉에서 “邴原이 遊學을 떠나 安邱의 孫崧을 찾아갔더니 孫崧이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그대 고을의 鄭君은 참으로 배우는 이들의 스승으로서 모범이 되는 분이시오. 그대가 그를 버렸으니 이는 이른바 鄭君을 東家의 丘로 여긴 것이오.’라 하였다. 그러자 邴原은 ‘그대는 제가 鄭君을 東家의 丘로 여긴다고 말씀하시면서, 저를 西家의 바보로 여기시는 것입니까?’라고 했다.”라 하였다.[趙曦明]
蘇軾 〈代書答梁先詩〉의 施注에 인용된 《孔子家語》에서 “魯나라 사람들이 孔子가 聖人인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저 동쪽 집에 사는 丘는 내가 알지.’라고 말했다.”라 하였다. 《集註分類東坡先生詩》 卷7 趙次公의 注에서 인용한 《論衡》의 글도 이와 같은데, 이들이 《顔氏家訓》의 근거가 된 글이다. 《後漢紀》 23에서는 “宋子俊이 말하기를 ‘魯나라 사람들은 仲尼를 일컬어 東家丘라 했다는데, 우람하게 몸집이 커서 백성들이 이름을 붙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라고 했다.”라 하였다. 《文選》에 수록된 陳孔璋의 〈爲曹洪與魏文帝書〉에서는 “괴이하게도 나를 家丘라고 얕보고서, 나의 문장은 남의 힘을 빌렸다고 하시니.”라 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孔子家語》에 근거한 것이다.[王利器]
동편 이웃집에 사는 丘라는 뜻으로, 孔子를 낮추어 부른 호칭이다.[역자]
역주10 宮之奇…以至亡國 : 《春秋左氏傳》 僖公 2년에 “晉나라 荀息이 屈에서 난 말 네 마리와 垂棘에서 난 玉을 虞나라에 주고서, 虢나라를 치기 위한 길을 빌려줄 것을 청하였다.…虞나라 군주는 이를 허락하였을 뿐 아니라 먼저 虞나라 측에서 虢을 치겠다고 청하였다. 宮之奇가 간언을 하였지만 듣지 않고 마침내 군사를 일으켰다.”라 하였고, 또 僖公 5년에는 “晉나라 제후가 다시 虞나라에 길을 빌어 虢나라를 치게 되었다. 宮之奇가 諫言을 올려…云云 하였지만 〈虞나라 군주는〉 듣지 않고, 晉나라 사자에게 허락했다. 宮之奇는 그 가족을 데리고 나라를 떠나며 말하기를 ‘虞나라는 臘祭를 지내지 못할 것이니, 이번 정벌이 끝나면 晉나라는 〈虞나라를 치려고〉 또다시 군사를 일으킬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겨울인 섣달 丙子日 초하루에 晉나라가 虢나라를 멸망시키자 虢나라 군주 醜는 天子가 있는 서울로 달아났다. 晉나라 군사들은 돌아오면서 虞에 머물렀고, 결국은 虞나라를 습격하여 멸망시켰다.”라 하였다.[王利器]
宮之奇는 春秋時代 虞나라의 大夫로서 脣亡齒寒 고사의 주인공이다.[역자]

안씨가훈(1)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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