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가挽歌의 가사에 대해 어떤 이는 옛날 장송곡葬送曲인 〈우빈虞殯〉의 노래였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전횡田橫의 빈객賓客들에게서 나왔다고 하는데, 어느 경우나 다 산 사람이 죽은 이를 애도하고 슬픈 마음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육기陸機는 죽은 이가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내용을 많이 썼는데, 시 형식에 이러한 예는 없을 뿐만 아니라 만가를 만드는 본래의 취지와도 어긋난다.
역주
역주1虞殯 :
《春秋左氏傳》 哀公 11년에서 “公孫夏는 그의 부하들에게 〈虞殯〉을 노래하도록 명하였다.”라 하였고, 注에서 “〈虞殯〉은 葬送의 노래이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2出自田橫之客 :
崔豹의 《古今注》에서 “〈薤露〉와 〈蒿里〉는 모두 喪歌이다. 田橫이 자살을 하자 門人들이 이를 슬퍼하며 그를 위해 슬픈 노래를 지었는데, 내용은 사람 목숨이 염교 위의 이슬같이 쉬이 말라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또 사람이 죽으면 혼백이 蒿里로 돌아간다는 내용도 있어, 2章으로 되어 있다. 李延年에 이르러 두 曲으로 나누어 〈薤露〉는 王公‧貴人의 葬送에, 〈蒿里〉는 士大夫‧庶人의 장송에 사용하였으며, 운구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노래하게 한다고 하여 세상에서 挽歌라고 불렀다.”라 하였다.[趙曦明] 田橫은 秦‧漢 교체기의 인물로서 齊王 田儋의 從弟이며 田榮의 동생이었다. 한때 자립하여 齊王이 된 적도 있었다. 劉邦이 천하를 통일하자 부하 500명과 함께 海島로 숨었는데, 劉邦이 그가 계속 반항할까 두려워 사람을 보내어 官爵을 약속하며 그를 불러들였으나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를 따르던 부하들도 모두 자살을 하였다고 한다. 《史記》 〈田儋列傳〉 참조.[역자]
역주4多爲死人自歎之言 :
陸機의 〈挽歌詩〉가 3首 있지만 모두가 죽은 사람이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내용은 아니고, 오직 1首만이 “넓은 하늘 어찌나 아득하고 휑한지? 기나긴 밤 언제쯤 밝아오려나? 산 사람은 가더라도 돌아올 날 있겠지만, 나 죽으면 영영 돌아올 때 없으리.”라 한 것처럼, 자탄하는 내용의 가사이다.[趙曦明] 《文選》 卷28에 만가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繆襲의 〈挽歌〉에서는 “천지조화가 비록 神明하여도, 어찌 다시 나를 살릴 수 있으랴?”라 하였고, 陶潛의 〈挽歌辭〉에서는 “아이는 아비를 찾으며 울고, 친구는 나를 어루만지면서 통곡하네.”라 하고, “주안상이 내 앞에 가득 차려지고, 친구는 내 옆에서 통곡을 하네.”라 하고, “된서리 내린 9월 어느 날, 나를 묻으러 먼 교외로 나가네.”라 하였는데, 모두가 죽은 사람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내용이므로, 陸機의 경우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王利器]
역주5詩格 :
《唐書》 〈藝文志〉의 丁部에 《詩格》이나 《詩式》類의 작자로 元兢 이하 모두 7인이 기록되어 있다. 《顔氏家訓》에 따르면 《詩格》과 《詩式》이 비록 唐人들에 의해 처음으로 엮어져서 책으로 나왔지만, 그 구상은 이미 六朝 때에 나왔던 셈이다.[王利器]
역주6乖製作本意 :
陶淵明이 자작한 〈挽歌〉에는 그의 曠達한 성품이 잘 드러나 있긴 하지만, 그 때문에 만가로서는 變格이 되었다.[郝懿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