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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氏家訓(2)

안씨가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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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兵事와는 거리가 먼 집안의 내력
1. 병사兵事와는 거리가 먼 집안의 내력
顔氏之先, 本乎鄒、魯, 或分入齊, 世以爲業, 遍在書記。
안씨顔氏 선조들은 본디 추로鄒魯 지역에서 살다가 일부는 나뉘어 지역으로 들어가서, 대대로 유가儒家의 올바른 도리를 가업으로 삼고 살아왔음이 각종 기록에 두루 나와 있다.
仲尼門徒, , 。秦、漢、魏、晉, 下逮齊、梁, 未有用兵以取達者。春秋世, 之徒, 皆一鬭夫耳。
공자孔子문인門人으로 승당升堂한 이가 72인인데 안씨顔氏가 그중에 여덟이며, , , , 에서 , 에 이르기까지 용병用兵으로 현달한 이는 없었다. 춘추시대에 안고顔高, 안명顔鳴, 안식顔息, 안우顔羽 등은 모두 일개 무사武士였을 뿐이다.
齊有, 趙有, 漢末有, 宋有, 並處將軍之任, 竟以顚覆。
나라 때 안탁취顔涿聚, 나라 때 안취顔冣, 한말漢末안량顔良, 송대宋代안연지顔延之가 모두 장군將軍의 직책에 있었으나 결국은 패망하고 말았다.
, 自稱好武, 更無事跡。
한대漢代이었던 안사顔駟는 스스로 무예를 좋아한다고 하였지만 더 이상의 사적은 남아 있지 않다.
以黨楚王受誅, 以據武威見殺, 得姓已來, 無者, 唯此二人, 皆罹禍敗。
안충顔忠초왕楚王과 한패가 되었다가 처형되었고, 안준顔俊무위武威에서 거병擧兵하였다가 죽임을 당했는데, 득성得姓한 이래로 깨끗한 지조를 못 가진 사람은 오직 이 두 사람뿐이었으며, 모두가 을 당해 패망했다.
亂離, , 雖無, 或聚徒衆, 違棄素業, 徼倖戰功。
근래 난리 중에 사대부들이 무예도 없으면서, 간혹 군중을 모아 본래 하던 일을 그만두고 요행으로 전공戰功을 얻기도 하였다.
吾旣, 前代, 故於此, 子孫誌之。
나는 몸이 약한 데다가 선대先代를 생각하여 이에 대해서는 마음을 접었으니, 자손들은 유념하도록 하라.
공자孔子는 힘이 성문의 빗장을 들어 올릴 정도였으나 역사力士로 알려지지 않았으니, 이것이 성인聖人이라는 증거이다.
吾見今世士大夫, 纔有, 便倚賴之, 不能被甲執兵, 以衛,
내가 요즘 사대부들을 보면 무예가 조금만 있어도 그것을 믿고 의지하지만, 갑옷 입고 무기를 들고 나가 사직社稷을 지킬 만한 능력은 안 된다.
, , 大則陷危亡, 小則貽恥辱, 遂無免者。
단지 신분을 감추고서 무인武人 차림으로 나다니면서 멋대로 주먹이나 쓰고 완력을 휘두르다가, 크게는 생사生死의 위험에 빠지고 작게는 치욕을 당하는 경우에도 끝내 이를 모면해내는 이가 없다.
역주
역주1 儒雅 : 유가적인 소양을 지녀 점잖음(儒素大雅)을 말하는데, 《漢書》 〈公孫弘傳〉에서 “儒雅라면 公孫弘과 董仲舒이다.”라고 했다.[王利器]
유교의 올바른 道理를 말한다.[역자]
역주2 升堂者七十有二 : 《論語》 〈先進〉에서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由는 升堂은 했지만 아직 入室은 하지 못했다.”라 하였고, 朱熹의 《集註》에서 “升堂과 入室은 道에 들어선 순서를 비유한 것이다.”라 하였다. 《史記》 〈仲尼弟子列傳〉에서는 “공자께서 ‘수업을 받고 〈六藝를〉 몸에 익혀 정통한 자가 77人인데, 모두가 남다른 재능을 지닌 선비들이다.’라 말씀하셨다.”라고 했다. 《索隱》에서는 “《孔子家語》에도 77人으로 되어 있고, 오직 文翁의 《孔廟圖》에만 72人으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梁玉繩의 《史記志疑》에서는 “생각건대, 제자의 수에 있어 70人이라고 한 것이 있는데, 《孟子》에서 ‘70子’라 했고 《呂氏春秋》 〈遇合〉에서 ‘達徒 70人’이라 했으며, 《淮南子》의 〈泰族訓〉篇과 〈要略訓〉篇에서 모두 70이라 했다. 《漢書》 〈藝文志〉와 〈楚元王傳〉에서 말한 ‘70子가 죽자 大義가 어그러졌다.’라고 한 것도 이것이다. 72人이라 한 것이 있는데, 《孔子世家》, 文翁의 《禮殿圖》, 《後漢書》 〈蔡邕傳〉의 鴻都 畵像, 《水經注》 8의 魯峻 冢壁象, 《魏書》 〈李平傳〉의 學堂圖 등에서 모두 72人이라 하였고, 《顔氏家訓》 〈誡兵〉篇에서 말한 ‘공자의 문인으로 升堂한 이가 72인’도 여기에 속한다. 77人이라고 한 것도 있는데, 이 傳과 《漢書》 〈地理志〉가 그것이다. 《孔子家語》 〈七十二弟子解〉도 사실은 77人인데, 지금의 판본에는 顔何가 빠져 있어서 일흔여섯 사람뿐이다. 그 숫자는 일정하지 않아서 함부로 단정하기 어렵다.”라 하였다.[王利器]
升堂이란 본격적인 학문의 세계에 들어섰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최고 단계라 할 수 있는 ‘入室’의 바로 아래 단계이다.[역자]
역주3 顔氏居八人焉 : 《史記》 〈仲尼弟子列傳〉에서 “顔回는 字가 子淵으로 魯나라 사람이다. 顔無繇는 字가 路이고, 顔回의 아버지이다. 顔幸은 字가 子柳이고, 顔高는 字가 子驕이며, 顔祖는 字가 襄이고, 顔之僕은 字가 叔이고, 顔噲(쾌)는 字가 子聲이고, 顔何는 字가 冉으로, 모두 魯나라 사람이었다.”라 하였다. 생각건대, 지금의 《孔子家語》에 76명밖에 없는 것은 아마 顔何 한 사람이 빠졌기 때문인 듯하며, 《索隱》에서는 《史記》의 ‘顔何’ 아래에 《孔子家語》를 인용하여 “字가 稱이다.”라 했다. 지금의 《史記》에는 字를 冉이라 하였는데, 아마도 傳寫하는 과정 중 글자의 반이 빠졌을 것이다. 《索隱》에서 《孔子家語》와 《史記》가 같다고 밝혔으므로, 脫誤된 것임이 더욱 분명해진다. 오늘날 《孔子家語》에는 顔高가 顔角으로 되어 있고, 顔祖는 顔相으로 되어 있다.[趙曦明]
《急就篇》 1의 “顔文章”에 대한 顔師古의 注에 “顔氏는 본래 顓頊(전욱)의 후예이다. 顓頊이 老童을 낳고, 老童은 吳回를 낳았는데, 高辛氏의 火正이 되어 그를 祝融이라 불렀다. 祝融은 陸終을 낳았고, 陸終은 여섯 아들을 낳았는데, 그 다섯 번째를 安이라 하니, 이 사람이 曹姓이 되었다. 周 武王이 그의 후손을 邾(주)에 봉하여 魯나라에 부속시켰는데, 魯나라의 邾縣이 있는 자리이다. 그 후 邾의 武公이 이름은 夷父이고 字가 顔이어서, 《春秋公羊傳》에서 그를 일컬어 顔公이라 하면서 그 이후로 顔氏라 칭하였으며, 齊魯 지역에서 盛族이 되었다. 孔子의 제자로서 통달한 자가 72명이었는데, 그중 顔氏가 8명이었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4 顔高 : 《春秋左氏傳》 定公 8년에 “公이 齊나라를 침공하여 陽州의 문을 치려고 할 때, 병사들이 줄지어 앉아서는 ‘顔高의 활이 6鈞이나 된다.’고 하면서 다들 가져다가 돌려가며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陽州 사람이 나오자 顔高는 다른 사람에게서 약한 활을 빼앗았다. 〈陽州 사람〉 籍丘子鉏가 그를 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쓰러뜨리자, 그는 쓰러지면서 籍丘子鉏에게 활을 쏘아 그의 뺨을 명중시켜 쓰러뜨렸다. 顔息은 陽州 사람을 쏘아 눈썹을 명중시키고서 퇴군하며 말하기를 ‘나는 용기가 없어서 그의 눈을 겨누었다.’라고 했다.” 하였다.[趙曦明]
역주5 顔鳴 : 《春秋左氏傳》 昭公 26년에 “齊나라 군사들이 成을 포위하자, 魯나라 군사들은 齊나라 군사들과 炊鼻에서 싸웠다. 林雍은 顔鳴이 탄 전차의 오른쪽 戰士 노릇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내렸다. 苑何忌가 그의 귀를 잘라버렸다. 顔鳴은 그를 두고 떠났는데, 苑何忌의 마부가 ‘뒤를 돌아보십시오.’라 하였다. 苑何忌는 林雍을 쳐서 그의 발목을 잘랐다. 그러자 한 발로 뛰어서 다른 전차에 올라타고 돌아왔다. 顔鳴은 세 번 齊나라 군중에 들어가 ‘林雍은 타라.’고 외쳤다.” 하였다.[趙曦明]
역주6 顔息 : 위의 주 4)의 ‘顔高’ 참조.[역자]
역주7 顔羽 : 《春秋左氏傳》 哀公 11년에 “齊나라의 國書와 高無㔻(비)가 군사를 이끌고 우리 魯나라를 치려고 淸에 이르자, 孟孺子 洩(설)이 右師를 거느리고 顔羽가 그의 전차를 몰았으며 邴洩이 오른편 전사가 되었다. 교외에서 싸우는데 右師가 달아났다. 孟孺子가 사람들에게 ‘나는 顔羽보다는 못하나 邴洩보다는 낫다. 공자 羽는 예민한 사람이다. 나는 싸우고 싶지 않아도 묵묵히 있을 수 있었지만, 邴洩은 빨리 말을 몰아 달아나자고 했다.’라고 말했다.” 하였다.[趙曦明]
역주8 顔涿聚 : 《韓非子》 〈十過〉에서 “옛날에 田成子가 바다에서 놀면서 즐기고 있는데, 顔涿聚가 말하기를 ‘폐하께선 바다에서 놀며 즐기고 계시지만 남들 중에 나라를 도모하는 이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폐하께서 비록 즐기고 계시지만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라 하였다. 田成子가 창을 끌어다가 그를 쳐 죽이려고 하자, 顔涿聚는 ‘옛날에 桀은 關龍逢을 죽였고 紂는 왕자 比干을 죽였으니, 이제 폐하께서 비록 저를 죽여 셋으로 만들어도 괜찮습니다. 저의 말씀은 나라를 위한 것이지 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라 하였다. 임금은 이에 창을 놓고서 마차를 몰아서 돌아갔는데, 나라 사람 중에 田成子를 받아들이지 않을 음모를 꾸미는 자가 있었다.”라 하였다. 《說苑》 〈正諫〉에는 齊 景公에게 諫한 것으로 되어 있고 顔涿聚는 顔燭趨로 되어 있지만, 《春秋左氏傳》에는 顔涿聚로 나와 있고, 《史記》와 《古今人表》에는 모두 顔濁鄒로 되어 있다.[盧文弨]
역주9 顔冣(취) : 宋本의 原注에 “冣는 간혹 聚로 쓰기도 한다.”라 하였다. 《史記》 〈趙世家〉에서 “幽繆王 遷이 즉위한 지 7년, 秦나라 사람들이 趙나라를 공격하자 趙나라 대장 李牧과 장군 司馬尙이 병사를 이끌고 그들을 쳤다. 뒤에 李牧이 죽임을 당하고 司馬尙이 면직되자 趙忽과 齊나라 장수 顔聚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趙忽의 군사들이 패배하고, 顔聚는 달아났다.”라 하였다. 〈馮唐傳〉에서는 “遷이 郭開의 무고를 받아들여 결국 李牧을 죽이고 顔聚로 하여금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하였다.”라 하였고, 《索隱》에서 《漢書》에는 ‘最’로 되어 있다.”라 하였다.[盧文弨]
《戰國策》 〈趙策 下〉에서는 “秦나라가 王翦을 시켜 趙나라를 공격하자 趙나라는 李牧과 司馬尙을 시켜 그들을 막게 하였다.……趙王은 그들을 의심하여 趙蔥과 顔最로 하여금 지휘를 대신하게 하고서, 李牧은 죽이고 司馬尙은 면직시켰다. 3개월 후 王翦이 습격을 해서 趙나라를 대파하고 趙蔥을 죽였으며, 趙王 遷과 그 장수 顔最를 사로잡아 결국 趙나라를 멸망시켰다.”라 하였다. 바른 글자는 最이다.[王利器]
역주10 顔良 : 《三國志》 〈袁紹傳〉에서 “顔良을 將軍으로 삼아 白馬에서 劉延을 공격하였다. 太祖가 劉延을 구원하여 顔良과 싸워서 대파하고 顔良을 참수했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11 顔延之 : 《宋書》 〈顔延之傳〉에 의하면, 顔延之가 일찍이 步兵校尉를 맡은 적은 있으나 將軍이 된 적은 없다. 그의 아들 顔竣의 傳에서 “竣은 字가 士遜이다. 世祖가 즉위하자 侍中으로 삼았다가 左衛將軍으로 전보하였다. 親喪 후에 다시 나와 右將軍이 되었다. 그가 말한 것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많다고 원망하고 분개하자 면직시켰다. 顔竣은 사죄의 뜻을 올리고 목숨을 빌었으나, 주상은 더욱 화가 나서 竟陵王 誕이 반역을 했을 때 그를 옥에 가두어 賜死했다.”라고 하였다.[趙曦明]
顔延之는 군사를 지휘하다가 망한 적이 없었고, 그의 아들도 비록 최후가 좋지는 못했지만 군사를 지휘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으니, 또한 그 아버지와 무슨 상관이 있으랴? 뒤에 《宋書》 〈劉敬宣傳〉에서 “王恭이 京口에서 병사를 일으켜서 劉牢를 선봉으로 삼자, 劉牢는 竹里에 이르러 王恭과 대장 顔延을 참수했다.”라고 한 것을 보고서, 이 글에서 ‘顔延’ 다음의 ‘之’자가 衍字로 들어간 것임을 깨달았다. 劉牢의 일은 본래 晉末에 있었던 것인데 《宋書》에 나와 있으므로, 顔之推가 그것을 宋代에 연관시킨 것일 뿐이다. 어쩌면 후대에 책을 교정한 사람이 顔延之가 宋代 사람이라고 하여, ‘晉’자를 함부로 ‘宋’자로 고쳤을지도 모른다.[錢大昕]
역주12 顔駟 : 《漢武故事》에서 “顔駟는 어디 사람인지 모르며, 文帝 때에 郎이 되었다. 武帝의 수레가 郎署를 지나가다가, 顔駟의 눈썹이 크고 머리가 허연 모습을 보고서 묻기를 ‘노인장은 언제 郎이 되었소? 어찌 이렇게 늙었소?’라 하자, 대답하기를 ‘臣은 文帝 때에 郎이 되었는데, 文帝께선 文을 좋아하셨고 臣은 武를 좋아하였으며, 景帝는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셨는데 臣은 모습이 추합니다. 폐하께서 즉위해서는 젊은 걸 좋아하시는데 臣은 이미 늙었으니, 그래서 세 세대에 걸쳐 불우한 것입니다.’라 하였다. 주상은 그 말에 감동을 하여 그를 발탁해서 會稽都尉에 임명하였다.”라 하였다.[趙曦明]
《後漢書》 〈張衡傳〉의 注와 《太平御覽》 383과 774에서 모두 《漢武故事》를 인용하여 “顔駟는 江都 사람이다.”라고 했고, 《元和姓纂》에서도 “顔駟는 江都 사람이다.”라고 했지만, 〈顔魯公集世系譜序〉에서는 “漢代에 異, 肆, 安樂이 있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駟’가 바로 ‘肆’이지 않은가 싶다.[王利器]
역주13 顔忠 : 《後漢書》 〈楚王英傳〉에 “永平 13년 男子燕은 楚王 英이 漁陽王과 顔忠 등과 더불어 圖書를 조작하여 역모를 꾸몄다고 널리 퍼뜨렸다. 일이 입건되고 조사되어 英을 폐하여 丹陽 涇縣으로 보내자, 자살하였다. 연루되어 죽고 귀양을 간 사람이 천 명에 달했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14 顔俊 : 《魏志》 〈張旣傳〉에서 “이때 武威의 顔俊과 張掖의 和鸞, 酒泉의 黃華, 西平의 麴演 등이 모두 郡의 병사들을 움직여 반란을 일으키고는 스스로 將軍이라 부르며 번갈아 서로를 공격했다. 顔俊은 그 어머니와 자식을 太祖에게 인질로 보내어서 도움을 청했다. 太祖가 張旣에게 묻자 張旣가 대답하기를 ‘顔俊 등은 겉으로는 國威를 빌리는 척하면서 안으로는 오만하고 사리에 어긋날 일들을 일으키고 있는데, 勢가 충분하다는 계산이 선 다음에는 바로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이제 한창 蜀을 평정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둘 다 두어서 서로 싸우게 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며, 이는 마치 卞莊子가 범을 찌른 일처럼 앉아서 그들의 패망을 거두어들이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太祖가 ‘좋다.’고 하였다. 1년쯤 지나자 和鸞이 결국 顔俊을 죽였고, 武威의 王秘가 또 和鸞을 죽였다.”라 하였다.[徐鯤]
역주15 淸操 : 결백한 志操를 말한다.[역자]
역주16 頃世 : 近世, 近來이다.[역자]
역주17 衣冠之士 : 《漢書》 〈杜欽傳〉의 注에서 “衣冠은 士大夫를 말한다.”라고 했다. 《文選》에 수록된 〈奏彈王源〉에 대한 集注에서 《北堂書鈔》를 인용하여 “衣冠은 비녀 꽂고 갓끈을 맨 사람[簪纓人]을 말한다.”라 하였다. 歐陽脩의 〈撰王道卿制〉에서는 “唐代 將相의 후예로서 勳名으로 그 집안을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을 일컬어 衣冠盛事라 부른다.”라 하였다. 《資治通鑑》 32의 胡三省 注에서는 “衣冠은 당시 士大夫와 貴游子弟들이다.”라고 했다.[王利器]
역주18 身手 : 용기와 힘이 있고 무예를 익혔음을 말한다. 그래서 杜甫의 詩에서 “북방의 健兒들은 身手가 좋다.[朔方健兒好身手]”라 했다.[趙曦明]
생각건대, ‘身手’란 표현이 이전에 나온 적은 없다. 杜少陵의 詩에서 “朔方健兒好身手”라고 한 것은 아마도 이 글에 근거하였을 것이다.[郝懿行]
역주19 羸(이)薄 : 몸이 허약하다.[역자]
역주20 仰惟 : 惟는 생각한다는 뜻이다.[盧文弨]
〈조상들의 행적을〉 우러러 생각해보다.[역자]
역주21 寘(치)心 : 寘는 息과 같다.[盧文弨]
마음을 접다, 즉 그럴 생각을 버린다는 말이다.[역자]
역주22 孔子力翹(교)門關 不以力聞 : 《列子》 〈說符〉에 “孔子의 힘은 國門의 빗장을 능히 들어 올릴 정도였으나[能招國門之關], 힘으로 알려지기를 원치 않았다.”라 하였다. 생각건대, ‘招’는 ‘翹’와 같이 든다[擧]는 뜻이다.[趙曦明]
이는 어쩌면 孔子의 부친 叔梁紇(흘)의 일일 수도 있는데, 《春秋左氏傳》 襄公 10년에 “偪陽 사람들이 문을 열어 諸侯의 군사들이 문 안으로 들어가자 매달린 문이 떨어졌는데, 郰(추) 사람 紇이 그것을 당겨 올려 들어온 이들을 나가게 했다.”라고 한 것이 뒤에 孔子에게 옮겨진 것이다.[盧文弨]
《呂氏春秋》 〈愼大〉, 《淮南子》의 〈主術訓〉과 〈道應訓〉, 《論衡》 〈效力〉 등에서 모두 孔子의 일로 보았는데, 아마도 이렇게 전해져왔던 모양이다.[王利器]
역주23 此聖證也 : 王肅의 《聖證論》이 이 이야기의 근거이다.[盧文弨]
역주24 氣幹 : 《列子》 〈楊朱〉에서 “나이가 예순이 되면 氣幹이 시들어간다.”라고 했다.[王利器]
기력이 강하다는 말이다.[盧文弨]
기운과 재간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武藝를 뜻한다.[역자]
역주25 社稷 : 《禮記》 〈檀弓 下〉에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능히 창과 방패를 들고 社稷을 지킬 수 있었으니 비록 미성년자의 죽음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해도 괜찮지 않으랴?’라고 하셨다.” 하였다.[王利器]
역주26 微行險服 : 微行을 하면 나쁜 짓을 하기 쉽다. 險服이란, 예를 들면 간결한 갓끈에 뒤가 짧은 옷차림 같은 것이다.[盧文弨]
武人의 옷차림으로 신분을 감추고 다니다.[역자]
역주27 逞(영)弄拳? : 마음껏 주먹과 완력을 휘두르다.[역자]

안씨가훈(2)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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