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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氏家訓(1)

안씨가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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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學問 없는 貴族의 몰락
2. 學問 없는 貴族의 몰락
나라의 전성시기에 유한有閑 귀족자제貴族子弟 가운데는 학문이라고는 갖추지 못한 이들이 많아서, 속담에 “수레에 오르다 떨어지지만 않으면 곧 저작랑著作郞이요, 〈편지글에〉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치레만 할 줄 알면 곧 비서랑秘書郞이다.”라고 할 지경이었다.
無不, , 駕, , 坐, 憑, 列於左右, 從容出入, 望若神仙。
향내를 옷에 쐬고 수염을 말끔히 민 다음 분 바르고 연지를 찍지 않은 이가 없으니, 차양이 긴 편안한 수레를 타고 굽 높은 나막신을 신은 채 바둑판무늬를 짜 넣은 비단방석에 앉아 온갖 색실을 섞어 짠 허리받이에 기대고는 볼 만한 기물을 좌우에 늘어놓고 여유롭게 드나드는 모양은, 바라보자면 신선神仙인가 싶었다.
求第, 則顧人, 則
명경과明經科에 급제를 하고자 사람을 사서 답안을 쓰고, 고관高官들의 연회에 참가하면 남의 손을 빌어 시를 지었다.
當爾之時, 亦也。
〈이들이〉 당시에는 그래도 호쾌한 선비였다.
之後, 遷革, , 非復之親;秉權, 不見昔時之黨。
후경侯景의〉 난리가 벌어진 이후에 조정에 변혁이 일어나자 전형관銓衡官이나 추천관推薦官들이 전에 이를 맡았던 친척도 아니고, 요직에서 권력을 쥔 사람들 가운데서도 옛날 같은 당파의 무리들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求諸身而無所得, 施之世而無所用。
제 한 몸에서 구하려 한들 얻을 것이 없고, 세상에 베풀고자 한들 쓸 만한 것이 없었다.
겉으로 거친 옷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속에도 옥이 없고, 겉가죽을 잃어버리자 속 내용도 다 드러나버려서, 외발로 서 있는 모양이 가지 마른 나무 등걸 같고, 주저앉은 모양이 물 마른 강바닥인 듯하니, 실의하여 전란 중에 떠돌다 산골짜기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當爾之時, 誠也。
〈이들은〉 당시에 참으로 어리석은 자였다.
有學藝者, 而安。
학문學問기예技藝를 갖추고서야 어느 곳에서든 안주할 수가 있는 법이다.
已來, 諸見俘虜。雖百世小人, 知讀《論語》、《孝經》者, 尙爲人師;雖千載, 不曉者, 莫不耕田養馬。
난리통 이래 많은 사람들이 포로가 되었는데 비록 대대손손 신분이 미천하였더라도 《논어論語》와 《효경孝經》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면 오히려 남의 스승이 되었으나, 장구한 세월 벼슬한 집안이었더라도 책을 읽을 줄 모르면 농사나 짓고 말이나 치게 되었다.
以此觀之, 安可不自勉耶?
이것으로 보건대 어찌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若能常保數百卷書, 千載終不爲小人也。
만약 항상 수백 권의 책을 간직할 수만 있다면 천년토록 미천한 사람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역주
역주1 貴遊子弟 : 《周禮》 〈地官 師氏〉의 “무릇 나라의 ‘有閑 貴族子弟[貴遊子弟]’들이 이곳에서 배웠다.”는 구에서 鄭玄은 “貴遊子弟란 王公子弟들이다. ‘遊’라 한 것은 맡은 바 관직이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盧文弨]
역주2 至於諺云…體中何如則秘書 : 《隋書》 〈經籍志〉 ‘史部總論’에 “魏‧晉시대 이래 史官의 제도는 더욱 쇠퇴하여, 春秋 時期의 史官 南史氏나 董狐의 직책은 유한 귀족자제의 차지가 되었고 史家 劉向과 劉歆의 직책도 재능을 보아 수여된 예가 드물었으니, 이 때문에 梁나라 때의 속담에 ‘수레에 오르다 떨어지지만 않으면 곧 著作郞이요,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치레만 할 줄 알면 곧 秘書郞이다.’라고 일러왔다.”고 하였다. 《太平御覽》 233에서도 《後魏書》를 인용하여 “秘書郞은 齊나라와 梁나라의 말기에는 유한 귀족자제가 이를 맡아 진정한 실력은 없었다.”고 하였다.[王利器]
역주3 熏衣剃面 : 향기가 스미도록 향내를 옷에 쐬고 수염을 말끔히 밀다.[역자]
역주4 傅粉施朱 : 《史記》 〈佞幸傳〉에 “漢나라 孝惠帝 때는 郞과 侍中들이 모두 鵕䴊冠과 조가비 혁대로 치장하고 ‘연지와 분으로 화장하였으므로[傅脂粉]’, 高祖 때의 男妓 閎孺나 惠帝 당시의 男妓 籍孺의 겉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고 하였다. 《後漢書》 〈李固傳〉에 “李固는 홀로 胡粉을 바르고서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멋을 내었다.”고 하였고, 《三國志》 〈魏書 曹爽傳〉에는 《魏略》을 인용하여 “何晏은 성품이 자신의 동정을 엿보기를 좋아하여, 백분을 손에서 떼놓지 않았고 걸어갈 때는 그림자를 돌아보았다.”고 하였으며, 《北齊書》 〈文宣帝紀〉에는 “〈황제는〉 간혹 신체를 드러내고 분과 먹을 바르고 그렸다.”고 하였으니, 男子가 분을 바르는 습속은 漢나라 때부터 魏나라를 거쳐 南北朝 시기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그러하였다.[王利器]
역주5 長簷車 : ‘簷’은 ‘끌채[轅]’를 가리킨다. 끌채가 길면 수레를 탄 사람이 편안하기 때문이다.[盧文弨]
盧文弨의 설명은 옳지 못하다. ‘簷’이란 수레 덮개의 ‘앞 차양[前簷]’를 일컬은 것이다. 지붕에서 대청 앞 기둥 위로 처마를 낸 것과 같기 때문이다. 蘇軾의 〈椰子冠〉 詩에는 “다시금 짧은 차양[簷]에 키 높은 모자를 좀 썼다 한들, 東坡가 무슨 일로 유행을 어기지 못하겠소?”라고 하였으니, 이때 ‘簷’자의 뜻이 이와 같은 쓰임인바, 지금의 모자 차양[帽沿]에 해당하는 말이다.[王利器]
역주6 跟高齒屐 : 跟은 ‘신다’의 뜻이다.[역자]
晉나라 때 이래로 사대부들은 나막신을 즐겨 신어서 비가 내리지 않아도 이것을 신었다. 밑으로 굽이 나 있고 謝安이 이를 좋아했는데 문지방을 건너다 보면 저도 모르게 굽이 부러지기도 했다고 하니 집안에서도 신었던 것 같다.[盧文弨]
본서 제11 〈涉務〉篇에 “梁나라 때 사대부들은 모두가 품 넓은 옷에 폭 넓은 띠를 매었는데, 冠은 크고 신발은 굽이 높았다.[高履]”라고 하였다. ‘굽 높은 신발[高履]’이란 바로 ‘굽 높은 나막신[高屐]’이다.[王利器]
역주7 棊子方褥 : 바둑판무늬를 짜 넣은 비단[綺]으로 만든 방형의 방석이다. 《釋名》 〈釋采帛〉에 “綺란 바둑판무늬[棊文]가 있는 것으로, 사방무늬가 바둑판과 같다.”라고 하였다.[王利器]
역주8 斑絲 : 온갖 색실을 섞어 짠 직물이다.[역자]
역주9 隱囊 : 《楊升庵文集》 67에 “晉나라 이후로 士大夫들이 淸談을 숭상하고 한가하게 은둔하기를 즐기면서 처음 麈尾(큰사슴꼬리털 총채. 일명 拂塵)를 만들기 시작하였으나, 隱囊을 만든 것은 언제부터인지 지금 알 수 없고 그 이름도 후학들은 아는 이가 적다. 《顔氏家訓》에서 이를 일컬었으니, 王右丞의 詩 〈酬張諲〉에는 ‘성 동문 밖의 협객일랑 배우지 마오, 隱囊 괴고 烏紗帽 차림으로 바둑이나 두고 앉구려.’라고 하였다.”고 하였다.[王利器]
허리받이. 부드러운 속을 채운 주머니로 왼쪽 곁에 받쳐놓고 그 위로 몸을 기대는데, 팔을 굽혀 덮으면 그 속에 감추어지므로 일컫는 말이다.[역자]
역주10 器玩 : 감상용 기물이다.[역자]
역주11 明經 : 《日知錄》 16에 “唐나라 제도로는 六科가 있어 각각 秀才, 明經, 進士, 明法, 書, 算이 있었으니, 그 당시에 詩賦로 뽑힌 이를 進士라 하였으며, 經義로 뽑힌 이를 明經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또 “唐나라 때 벼슬길에 나아가는 수로서는 明經이 가장 많았는데 시험을 치르는 방식은 응시자에게 注‧疏까지 모두 쓰게 하였으니, 이를 帖括이라고 하였다.”고도 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漢나라 때의 옛 의례로서는 “刺史가 천거하는 평민으로 茂材가 있는데 그 이름을 丞相에게 보내면 丞相이 시험을 치르게 하고 선발하였는데, 取明經의 一科와 明律令의 一科와 能治劇의 一科에서 각각 한 사람씩이었다.”고 하였으니, 明經으로 선비를 뽑은 것은 漢나라 때부터 이미 그러했던 줄을 알겠다. 《文選》 〈永明九年策秀才文〉의 李周翰의 주석에 “高第明經이란 덕행이 몹시 뛰어나고 經國之道에 밝음이 제일간다는 뜻이다.”라고 하였으므로, 六朝시대의 明經은 唐나라 때와는 구별되는 바가 있다.[王利器]
역주12 答策 : 《漢書》 〈蕭望之傳〉의 주석에 “對策이란 정치적 사안이나 경전의 의미를 드러내 묻고서 각자에게 이에 대한 계책을 답하게 하여 그의 문장을 살펴보며 高下의 등급을 확정짓는 것이다.”라고 하며, 《文選集注殘本卷》 〈七十一策秀才文〉에 “策에는 두 가지가 있다. 對策이란 조칙에 응대하는 것으로, 황제가 불러다 묻는 것을 對策이라 하며, 州‧縣에서 천거할 때의 방식은 射策이라 한다. 對策은 前漢 때에 시작되었으나, 文帝 15년에는 天下의 어진 인재나 뛰어난 선비를 천거하게 하는 조칙을 내리며 그들에게 射策을 올리게 하였다고 한다. 陸善經은 ‘漢 武帝 때에 처음 그러한 과목을 두었다.’고 주석하고 있다.”고 하였다.[王利器]
科擧 시험에서 정책을 제시하는 답안을 내는 것이다.[역자]
역주13 三九公讌 : 孫志祖는 《讀書脞錄》 7에서 徐鯤을 인용하며 “三九란 公卿을 일컬은 말이다. 《後漢書》 〈郞顗傳〉에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모든 정사에 삼가 온 마음을 다 쏟으셨사오나, 三九의 지위에는 아직 그러한 인물이 보이지 않사옵니다.’ 하는 구절에 ‘三九란 三公과 九卿이다.’라고 주석하고 있다. 또한 《文選》에서 張銑은 王仲宣의 〈公讌詩〉에 대하여 ‘이는 曹操의 연회를 모시던 때의 시이다. 당시에 曹操는 아직 天子의 지위에 오르지 못하였으므로 公讌이라 한 것이다.’라고 주석하였다. 이에 근거하자면 ‘公讌’은 公卿의 신분에 속하는 宴會였음을 알 수가 있다.”라고 하였다.[王利器]
三公九卿의 宴會이다. ‘公讌’은 公卿 신분의 고관이나 官府에서 여는 宴會를 가리킨다.[역자]
역주14 假手賦詩 : 《隋書》 〈劉炫傳〉에 “劉炫은 자신의 상태에 대해 말하기를 ‘公私간에 작성한 문장이나 서간에는 일찍이 남의 손을 빈 것이 없었다.”고 하며, 《史通》 〈載文〉篇에, 魏晉시대 이래 거짓으로 썼거나 덧붙여 쓴 잘못이 다섯 가지가 있는데 그 세 번째가 ‘남의 손을 빌어 쓰기[假手]’라고 하였다. 葉紹泰는 “육조시대의 문장은 오직 梁나라 때에만 성황을 이루었다 할 만한데, 유한 귀족자제들이 조정 선비들의 수치거리였던 것은 이 名人集 속에도 남이 대신해서 지은 작품이 많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王利器]
남의 손을 빌어 시를 짓다.[역자]
역주15 快士 : 본서 제19 〈雜藝〉篇에도 “재능과 학식이 시원스런 선비[才學快士]”라는 말이 있으며, 본편의 뒷글에도 “사람들이 이웃마을의 친척 가운데 ‘빼어나고 시원스런[佳快]’ 선비가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으며, 《北史》 〈劉延明傳〉에는 ‘시원스런[快] 사위(快女婿)’라는 말이 있어 그 뜻은 모두가 같은바 ‘시원스럽다[快]’에는 곧 ‘빼어나다[佳]’의 뜻이 들어 있다.[王利器]
본편 5 주 1) 참조.[역자]
역주16 離亂 : 變亂이나 戰亂이다. 여기서는 ‘侯景의 亂’을 가리킨다. 南北朝 時期 梁 武帝 太淸 2년(548) 8월, 東魏의 降將 侯景이 京城의 守將 蕭正德과 결탁하고 謀反을 일으켰다. 太淸 3년 3월, 侯景은 台城을 함락시키고 梁 武帝를 연금하였다가 武帝가 죽자 蕭綱과 蕭棟을 차례로 황제로 즉위시켰으나, 天正 2년(552), 마침내 梁나라 장수 陳霸先과 王僧辯에게 다시 소탕된 사건이다. 侯景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서 제7 〈慕賢〉篇 5 주 1) 참조.[역자]
역주17 朝市 : ‘朝廷’을 일컫는 말이다. 顔之推의 〈觀我生賦〉에서 “마침내 조정도 변하고 저자도 바뀌었다.[訖變朝而易市]”고 한 것은 여기서 “朝廷이 뒤바뀌었다.[朝市遷革]” 고 한 말과 그 뜻이 같다. 《周禮》 〈考工記〉에서는 “匠人이 국가의 도읍을 설계할 적에 조정은 〈왕궁으로부터〉 남쪽에 마주하게 하고 저자는 등뒤 〈북쪽으〉로 두었다.[面朝後市]”고 하였으니, 대개 시장의 맞은편이 곧 조정이고 조정의 뒤가 곧 시장이므로, 예로부터 말하는 자가 ‘朝市’로 ‘朝廷’을 가리킨 예가 많다.[王利器]
역주18 銓衡 : 시험. 選拔. 혹은 ‘銓衡官’이나 ‘전형관의 수장’을 가리킨다.[역자]
역주19 選擧 : 천거하다. 혹은 推薦官을 가리킨다.[역자]
역주20 曩者 : 전에[向時]. ‘曩’과 뜻이 같다.[王利器]
역주21 當路 : 《孟子》 〈公孫丑 上〉에서는 “스승께서 齊나라에서 정무를 집행하신다면[當路]管仲과 晏子의 공적을 다시 일으키실 수가 있으시겠습니까?” 하였는데, 趙岐는 이에 대하여 ‘정무를 집행하다.[當仕路]’로 주석, 풀이하였다.[王利器]
정무를 집행하다[執政]. 혹은 그러한 사람, 곧 爲政者를 가리킨다.[역자]
역주22 被褐而喪珠 : ‘被’는 ‘입다[披]’와 같은 뜻이다. 《老子》 제70장 〈知難〉에서 이른 바 “聖人은 겉에는 거친 옷을 입고 있으나, 속에는 옥을 지녔다.[聖人被褐懷玉]”는 말과 대비해서 쓴 것이니, 뛰어난 사람이 겉은 초라해도 속에는 재능을 품고 있는 것과는 달리, 덕 없는 사람이 몰락한데다 속에 지닌 재능도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역자]
역주23 失皮而露質 : 겉과 속이 다르던 사람이 덮어썼던 겉가죽을 잃어버리자 속 내용이 다 드러나다. 《法言》 〈吾子〉篇에 “속은 양인데 겉만 호랑이여서[羊質而虎皮] 풀을 보면 기뻐하고 승냥이를 보면 벌벌 떠니 그 겉이 호랑이임을 잊어버린 것이다.”라고 하였다.[盧文弨]
역주24 兀若枯木 : ‘兀’의 본래 뜻은 ‘우뚝 솟다.’, 혹은 ‘우뚝 서다.’이다. 范成大의 〈過松江〉에서 “지난해 필마 타고 봄 한기에 우뚝 섰지.[兀]”라고 한 예가 이것이다. 다만 ‘우뚝 솟는다.’는 뜻에서 널리 ‘한쪽 발을 잘린 외다리’를 가리키기도 한다. 《莊子》 〈德充符〉에서 “魯나라에 叔山이란 이름의 외다리[兀] 사내가 발가락이 없어서, 뒤꿈치 걸음으로 孔子를 만났다.”는 예가 이것이다. 여기서는 무리를 잃고 고립된 사대부의 모양을 비유한 것이므로 ‘외발로 서다.[兀]’라고 풀이한 것이다.[盧文弨]
역주25 泊若窮流 : 陸機는 〈文賦〉에서 “마른나무처럼 아무 느낌이 없고 ‘말라버린 계곡[涸流]’처럼 텅 비어 있다.”고 하였으므로 ‘泊’은 아마도 ‘洦’이 되어야 할 것이다. 본편의 24에서도 《說文解字》를 인용하며 “洦은 물이 얕은 모양이다.” 하였으므로, 여기에서는 당연히 이 글자를 써야 할 것이다.[盧文弨]
역주26 鹿獨 : 실의하다. 생활이 어려워 떠돌다. 혹은 ‘獨鹿’이라고도 한다.[역자]
역주27 戎馬 : 軍馬, 혹은 전란을 가리킨다.[역자]
역주28 轉死溝壑之際 : 轉死는 ‘시체가 굴러다니다.[轉屍]’의 뜻이다. 《孟子》 〈梁惠王 下〉에 따르면 “군왕의 백성들 중 늙고 약한 이들이 〈죽어〉 ‘산골짜기에 굴러다닌다.[轉乎溝壑]’”고 하였으며, 胡三省은 《資治通鑑》 31의 주석에서 應劭를 인용하며 “죽어서 매장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시신이 산골짜기 가운데 굴러다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王利器]
역주29 駑材 : 둔재, 미련한 인간을 가리킨다.[역자]
역주30 觸地 : ‘가는 곳마다, 어느 곳이라도’의 뜻이다.[역자]
역주31 荒亂 : 해는 가물고 세상은 어지러운 난리통이다. 뒤숭숭하다. 흉흉하다.[역자]
역주32 冠冕 : 《文選》 〈奏彈王源〉에서 李善이 《袁子正書》를 인용해놓은 주석에 “예로부터 命士(처음 벼슬한 낮은 벼슬아치) 이상은 모두 冠이나 冕이 있었으므로 이들을 冠族이라 일컬었다.”고 하였다.[王利器]
고대 帝王이나 官員이 쓰던 모자이다. 혹은 벼슬아치를 가리킨다. 許愼의 《說文解字》에 “冕이란 大夫 이상의 신분이 쓰던 冠이다.”라고 하였다.[역자]
역주33 書記 : 書籍이나 書札 등이다.[역자]

안씨가훈(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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