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家雜說, 或有不同, 書儻湮滅, 後人不見, 故未敢輕議之。
《
모전毛傳》亦曰:“鷕, 雌雉聲。” 又云:
, 尙求其雌。”
육기陸機《與長沙顧母書》,
死, 乃言:“痛心拔腦, 有如孔懷。”
예로부터 대단한 재주를 가진 박학한 사람들 중에도 용사用事에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있다.
백가百家의 여러 주장들이 간혹 서로 다를 수도 있고, 책이 인멸되어 후인들이 볼 수 없는 경우도 있으므로, 감히 함부로 논할 수는 없다.
이제 분명히 오류임을 알 수 있는 것 몇 가지만 들어서 경계로 삼고자 한다.
《시경詩經》에서 “꿩꿩, 까투리가 운다.[有鷕雉鳴]”라 하였고, 또 “까투리가 울며 수컷을 찾는다.[雉鳴求其牡]”라고 하였다.
《모전毛傳》에서도 “요鷕는 까투리 소리이다.[鷕 雌雉聲]”라고 하였고, 또 “장끼가 아침에 우는 것은 그 암컷을 찾아서이다.[雉之朝雊 尙求其雌]”라고 하였다.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대한 정현鄭玄의 주注에서도 “구雊는 장끼가 우는 것이다.[雊 雄雉鳴]”라고 하였다.
그런데 반악潘岳의 부賦에서 “꿩이 요요鷕鷕하면서 아침에 우네.[雉鷕鷕以朝雊]”라 하였으니, 이는 그 암수를 뒤섞어 혼동한 것이다.
《시경詩經》에서 “형제가 몹시 그립다.[孔懷兄弟]”라 하였다.
공孔은 몹시라는 뜻이고, 회懷는 그리워하다라는 뜻이므로, 몹시 그립다는 말이다.
육기陸機는 〈여장사고모서與長沙顧母書〉에서 육촌 아우인 사황士璜의 죽음을 기술하면서 “마음 쓰라리고 뇌를 뽑는 슬픔이, 마치 공회孔懷 같은 데가 있다.[痛心拔腦 有如孔懷]”라 하였다.
마음이 쓰라리다면 몹시 그리워한다는 것인데, 무슨 까닭으로 여기에 ‘…같은 데가 있다[有如]’라는 표현을 썼을까?
그 의미를 살펴보면 친형제를 일컬어 ‘공회孔懷’라고 한 것이 분명하다.
《시경詩經》에서 “부모님이 아주 가까이에 계시다.[父母孔邇]”라고 했다 하여, 양친을 ‘공이孔邇’라고 부른다면 뜻이 통하겠는가?
《이물지異物志》에서 “옹검擁劍은 모습이 게와 비슷한데, 다만 집게발 하나가 유난히 크다.”라고 하였다.
하손何遜의 시에서 “뛰는 물고기가 마치 옹검擁劍 같다.[躍魚如擁劍]”라 하였으니, 이는 물고기와 게를 구분하지 못한 것이다.
《한서漢書》에서 “어사부御史府 안 늘어선 잣나무에 들새[野鳥] 수천 마리가 있는데, 늘 그 나무 위에서 서식하면서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오니 조석조朝夕鳥라고 부른다.”라 하였다.
그런데 문인들은 왕왕 〈‘조석조朝夕鳥’의 ‘조鳥’자를〉 ‘오연烏鳶’의 ‘오烏’자로 잘못 인용하곤 한다.
《포박자抱朴子》에서 항만도項曼都가 신선술을 터득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자칭 “신선이 유하주流霞酒 한 잔을 내게 주기에 마셨더니 갑자기 배고픔과 목마름이 사라졌다.”라 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간문제簡文帝의 시에서 “유하주를 따른 포박자抱朴子의 사발[霞流抱朴碗]”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곽상郭象이 혜시惠施의 변설을 장주莊周의 말로 여긴 것과 같다.
《후한서後漢書》에서 “사도司徒 최열崔烈을 가두고 낭당鋃鐺을 채웠다.”라 하였는데, 낭당鋃鐺은 큰 족쇄이다.
그런데 세간에서는 〈낭鋃을〉 금은金銀의 ‘은銀’자로 잘못 쓰는 경우가 많다.
무열태자武烈太子 역시 책을 수천 권 읽은 선비였지만, 일찍이 시를 지어 “은銀으로 삼공三公의 발에 족쇄를 채웠고, 칼로 복야僕射의 머리를 쳤다.[銀鎖三公脚 刀撞僕射頭]”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