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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氏家訓(1)

안씨가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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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用事 誤謬의 사례들
自古宏才博學, 用事誤者有矣。
百家雜說, 或有不同, 書儻湮滅, 後人不見, 故未敢輕議之。
今指知決
者, 略擧一兩端以爲誡。
시경》云:雉鳴。” 又曰:“雉鳴求其牡。”
모전毛傳》亦曰:“鷕, 雌雉聲。” 又云:, 尙求其雌。”
정현鄭玄注《월령月令》亦
曰:“雉鷕鷕以朝雊。” 是則
시경》云:“。”
孔, 甚也;懷, 思也, 言甚可思也。
육기陸機《與長沙顧母書》, 死, 乃言:“痛心拔腦, 有如孔懷。”
心旣痛矣, 卽爲甚思, 何故方言有如也?
觀其此意,
시경》云: 而呼二親爲孔邇, 於義通乎?
云:“, 但一𩪋偏大爾。”
詩云: 是不分魚蟹也。
후한서後漢書》:“
鎖。” 鋃鐺, 大鎖也,
世間多誤作金銀字。
爲俗所誤。


18. 用事 誤謬의 사례들
예로부터 대단한 재주를 가진 박학한 사람들 중에도 용사用事에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있다.
백가百家의 여러 주장들이 간혹 서로 다를 수도 있고, 책이 인멸되어 후인들이 볼 수 없는 경우도 있으므로, 감히 함부로 논할 수는 없다.
이제 분명히 오류임을 알 수 있는 것 몇 가지만 들어서 경계로 삼고자 한다.
시경詩經》에서 “꿩꿩, 까투리가 운다.[有鷕雉鳴]”라 하였고, 또 “까투리가 울며 수컷을 찾는다.[雉鳴求其牡]”라고 하였다.
모전毛傳》에서도 “는 까투리 소리이다.[鷕 雌雉聲]”라고 하였고, 또 “장끼가 아침에 우는 것은 그 암컷을 찾아서이다.[雉之朝雊 尙求其雌]”라고 하였다.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대한 정현鄭玄에서도 “는 장끼가 우는 것이다.[雊 雄雉鳴]”라고 하였다.
그런데 반악潘岳에서 “꿩이 요요鷕鷕하면서 아침에 우네.[雉鷕鷕以朝雊]”라 하였으니, 이는 그 암수를 뒤섞어 혼동한 것이다.
시경詩經》에서 “형제가 몹시 그립다.[孔懷兄弟]”라 하였다.
은 몹시라는 뜻이고, 는 그리워하다라는 뜻이므로, 몹시 그립다는 말이다.
육기陸機는 〈여장사고모서與長沙顧母書〉에서 육촌 아우인 사황士璜의 죽음을 기술하면서 “마음 쓰라리고 뇌를 뽑는 슬픔이, 마치 공회孔懷 같은 데가 있다.[痛心拔腦 有如孔懷]”라 하였다.
마음이 쓰라리다면 몹시 그리워한다는 것인데, 무슨 까닭으로 여기에 ‘…같은 데가 있다[有如]’라는 표현을 썼을까?
그 의미를 살펴보면 친형제를 일컬어 ‘공회孔懷’라고 한 것이 분명하다.
시경詩經》에서 “부모님이 아주 가까이에 계시다.[父母孔邇]”라고 했다 하여, 양친을 ‘공이孔邇’라고 부른다면 뜻이 통하겠는가?
이물지異物志》에서 “옹검擁劍은 모습이 게와 비슷한데, 다만 집게발 하나가 유난히 크다.”라고 하였다.
하손何遜의 시에서 “뛰는 물고기가 마치 옹검擁劍 같다.[躍魚如擁劍]”라 하였으니, 이는 물고기와 게를 구분하지 못한 것이다.
한서漢書》에서 “어사부御史府 안 늘어선 잣나무에 들새[野鳥] 수천 마리가 있는데, 늘 그 나무 위에서 서식하면서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오니 조석조朝夕鳥라고 부른다.”라 하였다.
그런데 문인들은 왕왕 〈‘조석조朝夕鳥’의 ‘’자를〉 ‘오연烏鳶’의 ‘’자로 잘못 인용하곤 한다.
포박자抱朴子》에서 항만도項曼都가 신선술을 터득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자칭 “신선이 유하주流霞酒 한 잔을 내게 주기에 마셨더니 갑자기 배고픔과 목마름이 사라졌다.”라 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간문제簡文帝의 시에서 “유하주를 따른 포박자抱朴子의 사발[霞流抱朴碗]”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곽상郭象혜시惠施의 변설을 장주莊周의 말로 여긴 것과 같다.
후한서後漢書》에서 “사도司徒 최열崔烈을 가두고 낭당鋃鐺을 채웠다.”라 하였는데, 낭당鋃鐺은 큰 족쇄이다.
그런데 세간에서는 〈을〉 금은金銀의 ‘’자로 잘못 쓰는 경우가 많다.
무열태자武烈太子 역시 책을 수천 권 읽은 선비였지만, 일찍이 시를 지어 “으로 삼공三公의 발에 족쇄를 채웠고, 칼로 복야僕射의 머리를 쳤다.[銀鎖三公脚 刀撞僕射頭]”라고 하였다.
세간에서 곧잘 범하는 오류이다.


역주
역주1 紕繆(비류) : 《禮記》 〈大傳〉의 “다섯 가지 중에 한 가지가 어긋난다.[五者 一物紕繆]”에 대한 注에서 “紕는 錯과 같다.”라고 했다. 《釋文》에서 “紕는 독음이 ‘비’이고, 繆는 판본에 따라 간혹 ‘謬’로 쓰기도 한다.”라 하였다.[盧文弨]
‘오류, 착오’의 뜻이다.[역자]
역주2 紕繆 : 비류
역주3 有鷕(요)雉鳴 : 《詩經》 〈邶風 匏有苦葉〉에 나오는 詩句이다.[王利器]
역주4 : 요
역주5 雉之朝雊(구) 尙求其雌 : 《詩經》 〈小雅 小弁〉에 나오는 詩句이다.[王利器]
雉는 꿩의 암수에 다 쓸 수 있는 말이다. 암수 구분을 명확히 할 경우 까투리(암꿩)는 雌雉라 하고, 장끼(수꿩)는 雄雉라고 한다. 하지만 鷕는 까투리가 우는 경우에만, 雊는 장끼가 우는 경우에만 쓸 수 있다. 鳴은 암수 구분이 없다.[역자]
역주6 : 구
역주7 月令亦云 雊雄雉鳴 : 〈月令〉은 《禮記》의 篇名이다. 이 구절은 《禮記》 〈月令〉의 ‘季冬之月’ 부분에 나온다.[王利器]
오늘날 전하는 〈月令〉에 대한 鄭注에는 ‘雄’자 없이 ‘雊는 꿩이 우는 것이다.[雊 雉鳴也]’라고 되어 있다. 《說文解字》에는 ‘雊는 장끼가 우는 것이다.[雊 雄雉鳴]’로 되어 있다.[郝懿行]
역주8 潘岳賦 : 潘岳의 〈射雉賦〉를 가리킨다.[趙曦明]
역주9 混雜其雄雌矣 : 이 賦에 대한 徐爰의 注에서 “顔延年은 潘岳이 잘못 쓴 것으로 보았다. 《詩經》의 ‘有鷕雉鳴’은 ‘수컷을 찾는 것[求牡]’이고, ‘朝雊’는 ‘암컷을 찾는 것[求雌]’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鷕鷕朝雊’라 한 것은 양쪽을 다 든 것으로, 수컷과 암컷이 모두 우는 것이다.”라 하였다. 徐爰의 견해가 옳다. 옛사람들의 行文 중에는 이와 비슷한 것들이 많다.[趙曦明]
徐爰과 顔延年은 모두 〈南朝〉 宋人이고 顔之推는 그 이후 사람이므로, 顔延年의 견해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 분명하다.[段玉裁]
역주10 孔懷兄弟 : 《詩經》 〈小雅 常棣〉에는 ‘兄弟孔懷’로 되어 있다.[趙曦明]
역주11 述從祖弟士璜(황)死 : 《太平御覽》 695에 인용된 陸機의 〈與長沙夫人書〉에서 “士璜이 죽어 저고리 하나가 적은 것이 안타까우니, 저의 새 저고리를 그에게 주십시오.”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 편지이다.[王利器]
역주12 : 황
역주13 當謂親兄弟爲孔懷 : 三國時代부터 隋代까지의 문장에서 ‘孔懷之親’, ‘孔懷之思’, ‘孔懷之情’ 등과 같은 식으로 ‘孔懷’를 친형제라는 의미로 사용한 예들이 많았다.[王利器]
역주14 父母孔邇 : 《詩經》 〈周南 汝墳〉에 나온다.[王利器]
역주15 異物志 : 《隋書》 〈經籍志〉에서 “《異物志》 1卷은 漢代에 議郞 楊孚가 지었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16 擁劍狀如蟹(해) : 《古今注》 中 〈魚蟲〉 第5에서 “蟚蚏은 작은 게로서 바닷가에 살며 흙을 먹는데, 일명 長卿이라고도 한다. 집게발 하나가 유난히 커서 그것을 擁劍이라고 부른다. 또한 執火라는 이름도 있는데, 집게발이 붉은색이어서 그렇게 부른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17 : 해
역주18 何遜 : 《梁書》 〈文學傳〉에서 “何遜은 字가 仲言이고 東海 郯 사람이다. 여덟 살에 시와 문장을 지을 줄 알았고, 劉孝綽과 더불어 당시에 존중받았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19 躍魚如擁劍 : 何遜의 〈渡連圻〉 2首에서 “물고기 노는 것이 마치 擁劍과 같고, 원숭이가 걸린 것이 마치 오이가 매달린 것 같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20 御史府中列柏樹…號朝夕鳥 : 《漢書》 〈朱博傳〉에 故事가 나온다.[王利器]
역주21 文士往往誤作烏鳶用之 : 顔之推가 당시에 본 《漢書》는 어쩌면 전하는 과정 중 착오가 난 것일 수도 있는데, 宋祁는 이 한 가지만 근거로 古書를 고치려고 하였으므로 신뢰할 수가 없다. 御史府를 烏署라 하는 것은 唐代에 만들어진 책에서도 나온다. ‘烏府’, ‘烏臺’라는 말이 《白六帖》에 나오고, 唐의 張良器는 〈烏臺賦〉에서 “문에는 새벽에 지렁이가 나오고, 나무에는 석양에 까마귀[烏]가 온다.”라 하였는데, 바로 이 故事를 사용한 것이다. 이로 미루어 唐 이후로 《漢書》에서 모두 ‘烏’로 써왔음이 분명하다.[周壽昌]
역주22 項曼都詐稱得仙 : 葛洪의 이 견해는 王充의 《論衡》 〈道虛〉에서 나왔다.[劉盼遂]
역주23 仙人以流霞一杯與我飮之 輒不飢渴 : 《抱朴子》 〈袪惑〉에 나온다.[盧文弨]
역주24 霞流抱朴碗 : 현존하는 簡文帝의 文集에는 이 시가 없다.[王利器]
《抱朴子》 〈袪惑〉篇의 내용은 王充의 《論衡》 〈道虛〉篇에 근거를 둔 것이다. 〈道虛〉篇에서 “河東 蒲阪 사람 項曼都가 도술을 좋아하여 神仙術을 배우려고 가족을 내버리고 달아났다가 3년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니 말하기를 ‘떠날 때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얼핏 보니 누워 있었던 것 같은데, 신선 몇 사람이 나를 데리고 하늘에 올라 달로부터 몇 리 되는 곳에 멈추었다. 달을 보니 아래위가 모두 어두웠고, 그 어두운 곳에서는 방향을 알 수가 없었다. 달 옆에 있으니 그곳은 춥고 쓸쓸했는데, 배가 고파 먹으려 하면 그때마다 신선이 나에게 流霞酒 한 잔을 마시게 하였다. 한 잔 마시면 그때마다 몇 달 동안 배가 고프지 않았다. 떠나온 지가 몇 년 몇 달이 되는지 또 어떻게 왔는지도 몰랐는데, 또 문득 누운 것 같더니 다시 이리로 내려왔다.’라고 하였다. 河東에서는 그를 일컬어 斥仙이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抱朴子》 이야기의 출처이다. 簡文帝의 시에서 “유하주를 따른 抱朴子의 사발[霞流抱朴碗]”이라고 하였으니 “유하주 따른 王充의 사발[霞流王充碗]”이라고 해도 되겠는가? 顔之推가 나무랄 만도 하다.[劉盼遂]
역주25 郭象以惠施之辨爲莊周言也 : 《莊子》 〈天下〉篇에서는 ‘惠施多方…’ 이하 부분을 惠施의 말로 지목하여 서술하면서 그 옳고 그름을 따지고 있다. 郭象의 注에서는 “예전에 내가 《莊子》를 읽기 전에, 일찍이 논자들이 尺捶, 連環의 의미를 놓고서 다투며 모두 莊周의 말이라 한다고 들었다. 이 〈天下〉篇은 諸子들을 비교하며 평한 것인데, 이 章에 이르러서는 그 내용이 뒤죽박죽이고 말도 이치에 맞지 않으니, 길거리에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사실을 해치고 있음을 알겠다.”라 하였다. 郭象의 注가 본래 정확한 것인데 顔之推가 비난했으니, 잘못된 것이다.[趙曦明]
여기서 郭象이 惠施의 辨說을 莊周의 말로 여겼다는 것은, 앞서 簡文帝의 시에서 項曼都의 것으로 인용해야 할 것을 抱朴子의 것으로 잘못 인용했음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다.[역자]
역주26 囚司徒崔烈以鋃鐺(낭당)鎖 : 《後漢書》 〈崔駰傳〉에 “〈崔駰의〉 손자가 崔寔이고 從弟가 崔烈인데, 〈崔烈은〉 유모를 시켜 돈 500만 전을 바쳐서 司徒가 될 수 있었다. 獻帝 때 아들 崔鈞이 袁紹와 함께 山東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董卓이 이 일로 崔烈을 잡아들여 郿의 감옥에 넘기고는 족쇄로 묶고 項鎖를 채웠다. 董卓이 죽자 〈풀려나〉 城門校尉에 제수되었다.”라 하였다.[趙曦明]
《能改齋漫錄》 7에서 “韓子蒼은 〈夏夜廣壽寺偶書〉에서 ‘성에 밤 알리는 종소리 울리자, 스님 다 다녀가고 법당은 텅 비었다. 침상 옮기어 서남쪽을 향하고는, 누워서 저녁 바람에 흔들리는 風磬 바라본다.’라 하였다. 《顔氏家訓》에서…顔之推가 인용한 ‘鋃鐺’이란 글자는 모두 쇠금변[金]인데, 韓子蒼이 쓴 글자는 모두 구슬옥변[玉]이며, 鋃鐺을 풍경의 뜻으로 쓰고 있지 쇠사슬이 아니다. 韓子蒼은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므로 아마 다른 근거가 있을 것이다. 洪龜父 역시 ‘풍경이 절에서 울린다.[琅璫鳴佛屋]’라고 했다.”라 하였다. 《漢書》 〈王莽傳 下〉의 “以鐵鎖琅當其頸”에 대하여 顔師古는 “琅當은 큰 족쇄[長鎖]이다.”라고 했는데, 글자는 구슬옥변이 맞다.[王利器]
역주27 囚司徒崔烈以鋃鐺 : 낭당
역주28 武烈太子 : 《南史》 〈忠壯世子方等傳〉에서 “字는 實相이고 元帝의 장자이다. 젊어서 聰敏하였고 뛰어난 재주를 지녔는데, 남방을 토벌하다가 패하여 익사하자 시호를 忠壯이라 하였다. 元帝가 즉위하자 시호를 武烈世子로 고쳤다.”라 하였다.[盧文弨]
역주29 銀鎖三公脚 刀撞僕射(야)頭 : 蕭方等의 文集이 전하지 않아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王利器]
역주30 : 야

안씨가훈(1)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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