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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氏家訓(1)

안씨가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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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편협한 儒學者
俗間儒士, 不涉群위서, 之外, 而已。
吾初入, 與최문언崔文彦交遊, 嘗說事。
최문언轉爲諸儒道之, 始將, 懸見, 云:
“文集止有, 豈當論經書事乎?
且先儒之中, 未聞有왕찬王粲也。”
최문언笑而退, 竟不以《왕찬집粲集》示之。
之在, 與諸博士의조宗廟事, 引據《한서漢書》, 博士笑曰:
“未聞《한서漢書》得證經術。”
위수便忿怒, 都不復言, 取《위현성전》, 擲之而起。
博士一夜共之, , 乃來謝曰:


11. 편협한 儒學者
세간의 유학자儒學者들은 여러 책들을 섭렵하는 것이 아니라, 경서經書위서緯書 이외에는 의소류義疏類의 주석서를 읽을 뿐이다.
내가 처음 에 들어가서 박릉博陵 사람 최문언崔文彦과 교유했는데, 언젠가 《왕찬집王粲集》가운데서 정현鄭玄의 《상서주尙書注》를 힐난하였던 일을 두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최문언崔文彦이 여러 유학자들에게 이 얘기를 옮겨 전하였는데, 막 입을 떼자마자 〈어떤 유학자가〉 일찌감치 배척하는 태도를 드러내 보이며 말하였다.
문집文集에는 , 와 함께 , 가 있을 뿐인데 경서를 논하는 일이 어찌 키나 하겠습니까?
더구나 선유先儒 가운데 왕찬王粲이란 자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를 못하였습니다.”
최문언崔文彦은 웃어버리고 물러나왔을 뿐, 끝내 그에게 《왕찬집王粲集》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위수魏收의조議曹에 있을 때 여러 박사들과 함께 종묘의 일을 의논하다가 《한서漢書》를 근거로 인용하자 박사들이 웃으며 말하였다.
“《한서漢書》가 경학經學을 논증할 수 있다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하였군요.”
위수魏收가 크게 분노하여 아무것도 다시는 말하지 않고 〈위현성전韋玄成傳〉을 가져다가 던져주고는 일어나버렸다.
박사들이 밤새 함께 이를 찾아보고서는 날이 밝자 그제야 사죄하러 와서 말하였다.
위현성韋玄成에게 이만 한 학문이 있었을 줄이야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역주
역주1 經緯 : 經書와 緯書이다. 《後漢書》 〈方術列傳 樊英傳〉의 注에 “《七緯》로는 《易緯》, 《書緯》, 《詩緯》, 《禮緯》, 《樂緯》, 《孝經緯》, 《春秋緯》가 있다.”고 하였다.[趙曦明]
《困學紀聞》 8에 “鄭玄은 《周禮》와 《儀禮》를 주석하며, 《易說》, 《書說》, 《樂說》, 《春秋說》, 《禮家說》, 《孝經說》을 인용하였으니 이들은 모두 緯書들이다. 《河洛七緯》는 도합 81篇으로, 《河圖》 9篇, 《洛書》 6篇에 〈周나라 초기 이래 孔子에 이르기까지 9聖에 덧붙여 서술된〉 30篇이 따로 있으며, 《七緯》는 36篇이다. 그 외에도 《尙書中候》와 《論語讖》이 있으나 모두 《七緯》에 포함되지 않는 것들이다.”라고 하였다.[盧文弨]
위에서 ‘《七緯》는 36篇이다.’ 1句는 周法高의 補正의 내용을 참고하여 삽입한 것이다.[역자]
역주2 義疏 : 經文의 注釋이다. 南北朝 시기에 기원한 注釋 體制의 하나로 原書와 舊注의 文意를 疏通시켜 原書의 思想을 밝히기 위해 관련 자료를 널리 섭렵하고 舊注를 검증하며 이를 보충하여 논술한다. 南朝 梁나라 때 皇侃이 지은 《論語義疏》는 지금 전하는 이 무렵의 가장 완전한 義疏 부류의 주석서이다. 본편 10 주 32) 참조.[역자]
역주3 博陵 : 《隋書》 〈地理志〉에 “博陵郡은 冀州에 속한다.”라고 하였다.[趙曦明]
역주4 王粲集中難鄭玄尙書 : 《困學紀聞》 2에 “《王粲集》에서 鄭玄의 《尙書注》를 비난한 일은 지금은 唐代 元行沖의 《釋疑》에만 보인다. 王粲이 말하기를 ‘세상사람들은 伊水와 雒水 以東, 淮水와 漢水 以北으로는 鄭玄 한 사람뿐이라 일컬으며, 모두 先儒들은 결점이 많으나 鄭玄은 道를 갖추었다고들 말한다. 내가 혼자 의심쩍어 탄식하다가 이 때문에 배우고자 하여, 《尙書注》를 얻어 물러나서 그 뜻을 생각해보았으나 그 뜻이 모두 다하였는데도 의혹은 오히려 아직 풀리지 않았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盧文弨]
역주5 發口 : 입을 떼다.[역자]
역주6 排蹙 : ‘배척하다[排笮]’의 뜻이다.[盧文弨]
역주7 詩賦銘誄 : ‘賦’란 문채와 수식을 펼쳐가면서 사물을 묘사하여 정감을 그려가는 韻文이며, ‘銘’이란 공적과 미덕을 찬양하는 韻文이며, ‘誄’란 생존 시의 행적을 나열해나간 韻文이다.[王利器]
역주8 魏收 : 《北齊書》 〈魏收傳〉에 “魏收는 字가 伯起로, 아이 때의 이름이 佛助였으니, 鉅鹿郡 下曲陽 사람이다. 책을 읽을 때 여름철에는 나무그늘을 따라 나무침상을 옮겨가며 글을 읊조렸는데, 여러 해가 지나 나무침상이 닳았지만 쉼없이 노력하였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름이 났다.”라고 하였다.[趙曦明]
역주9 議曹 : 議案을 심의하는 기관 혹은 직책이다. 諮議參軍 등의 관직이 이에 해당된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제6 〈風操〉篇 9 주 1) 참조.[역자]
역주10 韋玄成 : 《漢書》 〈韋賢傳〉에 “韋賢의 작은 아들 玄成은 字가 少翁으로 배우기를 좋아하여 아비의 學業을 닦아, 明經科를 통하여 諫大夫에 발탁되었다.”라고 하였다.[盧文弨]
역주11 披尋 : ‘열어놓고 찾아보다.[披閱尋討]’의 뜻이다. ‘披’는 본편 4에 보이는 ‘흰 명주를 잡고 雌黃을 펼쳐 연다.[披]’는 구절의 ‘披’와 쓰임이 같다. 韓愈는 〈進學解〉에서 “손으로는 끊임없이 百家의 전적을 펴서 열었다.[披]”고 하였다. 《文選》 〈琴賦〉의 注에 따르면 “披란 열다[開]의 뜻이다.”라고 하였다.[王利器]
역주12 達明 : 날이 밝다, 혹은 명백히 밝히다의 뜻도 있으나, 여기서는 앞 구절의 ‘밤새[一夜]’와 호응하는 의미이다.[역자]
역주13 不謂玄成如此學也 : 《太平廣記》 258에 인용된 《大唐新語》에 “唐나라 張由古는 관리의 재능은 있으나 學術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는데 누차 臺省을 역임하였다. 일찍이 여럿이 있는 데서 ‘班固가 큰 재능을 지녔건만 그의 문장이 《文選》에 오르지 못하였구나.’ 하고 탄식하므로, 어떤 이가 그에게 ‘〈兩都賦〉며 〈封燕然山銘〉이며 〈典引〉 등이 나란히 《文選》에 들어가 있는데 어찌하여 없다고 말씀하시는지요?’ 하자, 由古가 말하기를 ‘이는 모두 班孟堅의 文章이니, 어찌 班固와 상관있는 일일까.’ 하므로, 이를 듣던 사람들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라고 하였다. 이 사람은 班固를 몰랐던 것이요, 저 사람들은 《漢書》를 몰랐던 것이니, 그런 사람이 혼자도 아니고 짝을 이루었다고 할 만하다.[王利器]
不謂란 짐작하지 못하다, 생각하지 못하다, 혹은 알리지 않다의 뜻이다.[역자]

안씨가훈(1)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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