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顔氏家訓(1)

안씨가훈(1)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안씨가훈(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13. 글 쓸 때 조심해야 할 사항
蓋忌夫惡名之傷實也。
比世往往見有和人詩者, 題云, 。” 不可輕言也。
。” 은운詩云: 간문제簡文曰:“비욱, 은운又颻颺其母。”
, 不可用也。
世人或有文章引《시경者, 《송서宋書》已有, 如此, 幸須避之。
北面事親, 위양渭陽》之詠;堂上養老, :皆大失也。
擧此一隅, 宜愼。


13. 글 쓸 때 조심해야 할 사항
오균吳均문집文集에 〈파경부破鏡賦〉가 있다.
옛날에 고을 이름이 〈아침부터 노래한다는 의미의〉 조가朝歌라는 곳에서 안연顔淵은 머물지 않았고, 마을 이름이 〈어머니를 이긴다는 의미의〉 승모勝母라는 곳에서 증자曾子는 옷깃을 여미었다.
아마도 나쁜 이름이 실질을 해칠까 봐 꺼렸기 때문일 것이다.
파경破鏡이 흉악한 짐승이라는 이야기가 《한서漢書》에 나오는데, 글을 지을 때에는 부디 이러한 이름들을 피하기를 바란다.
근자에 남의 시에 화답한 시에서 제목을 왕왕 ‘경동敬同’이라 한 경우를 보는데, 《효경孝經》에서 “어버이를 섬기는 자세로 임금을 섬겨 공경하는 마음이 똑같다.[敬同]”라고 하였으므로, 함부로 쓸 말이 아니다.
양대梁代 비욱費旭의 시에서 “옳은지 그른지 모르겠구나.[不知是耶非]”라 하고, 은운殷澐의 시에서 “흔들흔들 운모 배.[颻颺雲母舟]”라 하였더니, 간문제簡文帝가 “비욱費旭은 그 아비를 몰라보고, 은운殷澐은 또 그 어미를 흔드는구나.”라고 하였다.
이것이 비록 다 예전의 사례가 있는 표현이긴 하지만 써서는 안 된다.
세인들 중에는 간혹 《시경詩經》에서 “둥둥 북을 두드리네.[伐鼓淵淵]”라 한 구절을 끌어다 글을 쓰는 이들이 있는데, 《송서宋書》에 이미 ‘누유屢遊’라는 표현에 대한 비난이 있었으니, 이와 같은 것들은 반드시 피하도록 해야 한다.
안채에 어버이를 모시고 있으면서 외숙外叔과 이별할 때 〈위양渭陽〉의 노래를 부른다거나, 집에 노부모를 봉양하고 있으면서 형을 전송할 때 환산桓山의 슬픔을 읊는다거나 하는 일은 모두 큰 잘못이다.
여기에 든 것은 일부이니 그때그때 신중하게 해야 한다.


역주
역주1 吳均集 : 《梁書》 〈文學傳〉에서 “吳均은 字가 叔庠이고 吳興 故鄣 사람이다. 文體가 淸拔하고 옛 기상이 있어, 호사가들 중에 이것을 본뜨는 이가 있었는데, 이를 일컬어 吳均體라 하였다.”라 하였다. 《隋書》 〈經籍志〉에 “梁代 奉朝請 吳均 文集 二十卷”이라고 기록되어 있다.[趙曦明]
역주2 破鏡賦 :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趙曦明]
역주3 邑號朝歌…曾參斂襟 : 《漢書》 〈鄒陽傳〉에 “마을 이름이 勝母여서 曾子는 들어가지 않았고, 고을 이름이 朝歌여서 墨子는 수레를 돌렸다.”라 하였는데, 이 글과는 다르므로 아마도 다른 근거가 있을 것이다.[趙曦明]
《淮南子》와 《鹽鐵論》 〈晁錯〉篇에서 모두, “마을 이름이 勝母여서 曾子가 들어가지 않았다.”라고 했다.[鄭珍]
《水經》 淇水注에 인용된 《論語撰考讖》에서 “고을 이름이 朝歌여서 顔淵은 머물지 않았고 칠십 제자들은 눈을 가렸는데, 宰予만이 돌아보다가 수레에서 떨어졌다.”라고 하였다.[龔道耕]
劉晝의 《新論》 〈鄙名〉章에도 “물 이름이 盜泉이라 孔子께서는 〈그 물로〉 양치질을 하지 않으셨고, 고을 이름이 朝歌라 顔淵이 머물지 않았으며, 마을 이름이 勝母라 曾子가 수레를 돌렸고, 驛亭의 이름이 柏人이라 漢나라 임금이 밤에 피하였다. 왜 그랬을까? 그 이름이 義를 해치기 때문이다.”라 하였는데, 이 역시 《顔氏家訓》과 마찬가지로 朝歌에서 수레를 돌린 것을 顔淵의 일로 보고 있다. 《太平御覽》 157에 인용된 《論語撰考讖》에도 “마을 이름이 勝母여서 曾子가 옷깃을 여미었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說苑》 〈談叢〉, 《論衡》 〈問孔〉, 《新論》 〈鄙名〉 역시 《顔氏家訓》과 마찬가지로 勝母에 들어가지 않은 것을 曾子의 일로 보았지만, 《史記》 〈鄒陽傳〉의 《索隱》에 인용된 《尸子》에서는 孔子의 일로 보았다.[王利器]
역주4 破鏡乃凶逆之獸 事見漢書 : 《漢書》 〈郊祀志〉에서 “옛날 天子가 봄에 解祠를 지낸 적이 있다는 말이 있는데, 黃帝께 제사를 지낼 때는 梟 한 마리와 破鏡을 사용하였다.”라고 하였고, 注에서 孟康의 말을 인용하여 “梟는 새 이름으로 어미를 잡아먹고, 破鏡은 짐승 이름으로 아비를 잡아먹는다. 黃帝는 이런 것들을 멸종시키고자, 관리들에게 제사에서 다들 이것을 사용하게 하였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5 敬同 : ‘同’자를 써서 和答詩임을 나타내는 것은, 駱賓王이나 陳子昻 같은 初唐의 여러 시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별도로 ‘奉和同∼’이라 한 것이 있는데, 여기서 ‘和’자는 後人들이 덧붙여 넣은 것이다.[盧文弨]
葉夢得의 《玉澗新書》에서 “《類文》에 梁 武帝의 〈同王筠和太子懺悔詩〉를 실어놓고, 王筠의 韻字를 답습한 것이라고 하였다.”라고 한 것도, 당시 和答詩의 詩題에 ‘同’자를 썼다는 증거이다.[王利器]
역주6 孝經云 資於事父以事君而敬同 : 唐 玄宗의 注에서 “資는 취한다는 뜻으로, 아버지를 공경함이 임금을 공경함과 같다는 말이다.”라 하였다. 《孝經》 〈士章〉篇 참조.[王利器]
역주7 梁世費旭詩云 不知是耶非 : 漢 武帝의 〈李夫人歌〉에 “긴가민가하면서, 서서 바라보네.[是耶非耶 立而望之]”라는 구절이 있다.[趙曦明]
‘費旭’은 ‘費昶’이 되어야 옳다. 《南史》 〈何思澄傳〉에서 “王子雲은 太原 사람으로서 江夏 출신의 費昶과 더불어 모두 고을의 才人이었다. 費昶은 樂府를 잘 지었고 또 鼓吹曲도 지어 武帝가 존중했다.”라고 했다. 《隋書》 〈經籍志 集部〉에 ‘梁 新田令 《費昶集》 3卷’이라 기록되어 있다. 《樂府詩集》 卷17에 수록된 梁代 費昶의 〈巫山高〉 중에 “아름다운 저 바위 귀퉁이에서, 마음의 시비를 어찌 알겠나?[彼美巖之曲 寧知心是非]”라고 한 부분이 있는데, 顔之推가 인용한 것과는 다른 詩句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顔之推의 지적으로 인해 고쳤을 수도 있다. 劉盼遂는 費昶을 費甝으로 보았는데 옳지 않다.[王利器]
원작자는 “옳은지 그른지 모르겠다.”라는 의도로 쓴 詩句이지만, 助詞로 사용된 ‘耶’자에 ‘아버지’라는 뜻이 있으므로 “아버지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뜻으로 誤讀될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역자]
역주8 : 운
역주9 颻颺雲母舟 : 《晉宮閣記》에서 “舍利池에 雲母 배가 있었다.”라고 했다. 《初學記》 참조.[趙曦明]
殷澐은 殷芸이 아닌가 싶다. 《梁書》 〈殷芸傳〉에 “殷芸은 字가 灌蔬이고 陳郡 長平 사람이다. 마음을 모아 학문에 힘썼고 여러 책들을 두루 읽어 昭明太子의 侍讀이 되었다.”라고 하였으므로, 분명 簡文帝와도 접촉이 있었을 것이다. 또 湘東王의 記室參軍으로 褚澐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河南 陽澤 사람으로 詩가 남아 있다. 이 두 사람의 성이나 이름 중 하나를 잘못 쓴 것임에 틀림이 없다.[盧文弨] 여기서 雲母의 ‘母’자가 어머니를 떠올리게 한다는 말이다.[역자]
역주10 不識其父 : 아버지를 ‘耶’라고 하는 것은 아마 속칭일 것이다. 옛날 〈木蘭詩〉에서 “명부마다 아버지 이름[耶名]이 있다.”라 하였다.[盧文弨]
南朝 풍속에 아버지를 속칭 ‘耶’라 하였다. 《南史》 〈王彧傳〉에 “큰 아들 絢이 5, 6세 무렵에 《論語》를 읽다가 ‘周나라는 夏나라와 殷나라 2代를 거울로 삼았다.’라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 외조부 何尙이 그를 놀리며 ‘그 다음은 「耶耶하도다, 그 문화는!」으로 고칠 수 있겠구나.’라고 하자, 絢이 바로 답하기를 ‘어른의 이름을 가지고 어찌 희롱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草翁의 바람은 반드시 외삼촌이다.」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라는 일화가 나온다. 《論語》의 이 句節 뒤에 바로 “찬란하다, 그 문화는![彧彧乎文哉]”이 이어지는데 ‘彧’이 王絢 아버지의 이름자이므로 何尙이 장난삼아 그렇게 고쳐서 말해본 것이다. 이를 통해 南朝에서 아버지를 통칭 ‘耶’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劉盼遂]
《文心雕龍》 〈指瑕〉에서 “〈요즘은〉 同音字를 가지고 비난을 하고 反切音으로 흠을 잡는데, 비록 예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 일이지만, 오늘날에는 채택하는 경우가 있다.”라고 했다. ‘是耶’의 ‘耶’에는 아버지의 뜻이 있고 ‘雲母’의 ‘母’는 어머니라는 뜻이니, 이것이 바로 同音字로 비난했음을 입증하는 증거이다. 뒤에 나오는 ‘伐鼓’의 경우도 反切音으로 흠을 잡았음을 입증하는 증거이니, 이들이 모두 앞에서 말한 ‘피해야 할 원칙들이 정교하고 상세하다.[諱避精詳]’라고 한 것에 해당한다.[王利器]
‘草翁의 바람은 반드시 외삼촌이다.’라는 것은 외조부의 이름자가 尙이므로 《論語》 〈顔淵〉에 ‘草尙之風 必偃’을 인용하여 ‘草翁之風’이라 말한 것이다.[역자]
역주11 此雖悉古事 : 漢 武帝의 〈李夫人歌〉에서 “긴가민가 하면서, 서서 바라보았네.[是耶非耶 立而望之]”라 한 것과, 《初學記》에 수록된 〈晉宮閣記〉에서 “舍利池에 雲母로 장식한 배가 있다.[舍利池有雲母舟]”라 한 것을 가리킨다.[周法高]
역주12 伐鼓淵淵 : 《詩經》 〈小雅 采芑〉의 詩句이다.[王利器]
본래 反切法은 漢字의 語音을 다른 두 한자의 聲母와 韻母를 사용하여 표시하던 방법이었는데, 당시에 이것이 좋지 못한 표현을 판별하는 방법으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에서의 예와 같이 ‘伐鼓’라는 표현에 있어서 ‘伐’의 聲母와 ‘鼓’의 韻母를 결합하면 ‘腐’자가 되고, 반대로 ‘鼓’의 聲母와 ‘伐’의 韻母를 결합하면 ‘骨’자가 되는데, 이것이 이어진 ‘腐骨’의 의미가 상서롭지 못하기 때문에 ‘伐鼓’라는 표현은 피해야 한다는 말이다.[역자]
역주13 屢遊之誚(초) : 《金樓子》 〈雜記〉에서 ‘宋玉이 太宰가 자주 놀러간다.[屢游]’는 이야기를 농담으로 하게 되면서 反語에 깊이 빠져, 급기야 鮑照의 伐鼓, 劉孝綽의 布武, 韋粲의 浮柱 등의 표현이 만들어지게 되었다.”라 하였다. 《顔氏家訓》에서 ‘宋書’라고 한 것도 본래는 ‘宋玉’이었을 수 있다.[李慈銘]
《文鏡祕府論》 西冊 〈論病 文二十八病〉 第20에서 “翻語病이란 그냥 말하면[正言] 멋진 표현인데 反切로 풀면 심각한 문제가 되는 말이다. 예를 들면, 鮑照의 시 ‘닭 울면 關門 지키는 관리가 일어나고, 북을 울리면 이른 새벽에 통행을 하네.[雞鳴關吏起 伐鼓早通晨]’에서 ‘伐鼓’는 그냥 말하면[正言] 멋진 표현이지만 反切로 풀면 〈‘腐骨’이 되어〉 뜻이 상서롭지 못한데, 이것이 바로 翻語病이다. 崔氏는 ‘伐鼓는 反語가 腐骨이므로, 이것이 문제이다.’라고 했다.”라 하였다. 여기서 伐鼓의 反語를 腐骨로 보았다. ‘屢遊’의 反切은 알 수가 없다. 鮑照의 시는 《文選》에 수록된 〈行藥至城東橋 一首〉이다.[王利器]
周法高는 丁聲樹의 말을 인용하여 ‘屢遊’의 反切이 劉裕가 되는 것으로 보았다. 劉裕는 東晉 말에 宋公에 봉해져 섭정을 하다가 선양을 통해 劉宋을 건국한 宋 高祖이다. 이에 따라 《顔氏家訓》에서 ‘宋書’라고 한 것이나 《金樓子》에서 ‘宋玉’이라고 한 것도, 어쩌면 劉裕를 가리키는 ‘宋王’이거나 ‘宋主’였을지 모른다고 하였다. 宇都宮淸吉도 周法高의 견해에 따르고 있지만, 아직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역자]
역주14 : 초
역주15 流比 : 비슷한 종류의 것들[流輩比類]이다. 《三國志》 〈魏書 夏侯太初傳〉에서 “그 비슷한 것들[倫比]을 비교하여, 편파적이지 않도록 하라.”라 한 것과 뜻이 같다.[王利器]
역주16 別舅摛(리)渭陽之詠 : 《詩經》 〈渭陽〉의 〈小序〉에서 “〈渭陽〉은 秦 康公이 어머니를 그리워한 것이다. 康公의 어머니는 晉 獻公의 딸이다. 〈晉 獻公의 아들로서 뒤에 晉 文公이 되는〉 重耳가 麗姬의 참소를 당해 〈秦나라로부터 晉나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을 때 秦姬가 죽었다. 晉 穆公이 重耳를 〈본국으로 귀환하도록〉 받아들였을 때, 秦나라 太子였던 康公은 渭水 남쪽에서 重耳를 전송하면서, 어머니를 볼 수 없는 지금 자신이 외숙을 보니 마치 어머니가 계신 듯하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라 하였다.[趙曦明]
어머니가 北堂에 계시는데 외숙과 이별하면서 〈渭陽〉의 노래를 읊는 것은 큰 잘못이라는 말이다.[王利器]
역주17 : 리
역주18 送兄賦桓山之悲 : 《孔子家語》 〈顔回〉에서 “顔回가 곡을 하는 소리를 들어보니 죽은 이를 위해서 곡을 할 뿐 아니라, 거기엔 생이별하는 사람의 슬픔도 담겨 있었다. 桓山의 새가 새끼 네 마리를 길러 날개가 다 자라 장차 四海로 흩어져 날아가려 할 때, 그 어미 새가 슬피 울며 전송하는 소리를 들어보면 그 소리에 이와 비슷한 것이 있는데, 떠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孔子께서 사람을 시켜 곡하는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과연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집이 가난해서 자식을 팔아 장례를 치르고 자식과 영영 이별을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顔回는 참으로 소리를 잘 알아듣는구나.’라고 하셨다.”라 하였다.[沈揆]
‘桓山之悲’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자식을 팔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아버지가 여전히 건재하신데 형을 전송하면서 桓山의 일을 인용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王利器]
역주19 觸塗 : ‘觸塗’에서 ‘觸’자는 ‘觸類旁通[하나를 보고 열을 알다]’의 ‘觸’과 같은 뜻이다. 《唐書》 〈崔融傳〉에 “물건을 달아서 과세하는 일을, 그때그때[觸塗] 해온 지 오래되었다.”라고 한 표현이 나온다.[王利器]
‘그때그때, 경우마다’의 뜻이다.[역자]

안씨가훈(1)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