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顔氏家訓(1)

안씨가훈(1)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안씨가훈(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37. 彈劾된 사람들의 자손
梁世被者, 子孫弟姪, 皆詣闕三日, 陳謝, 子孫有官, 自陳解職。
子則麤衣, 蓬頭垢面, 道路, 執事, 叩頭流血, 申訴冤枉。
若配徒隷, 諸子竝立於所署門, , 動經旬日, 官司驅遣, 然後始退。
, 而以敎義見辱者, 或被輕繫而身死獄戶者, , 子孫三世不交通矣。
어사중승어사중승中丞, 初欲彈, 先與유효작善, 苦諫不得, 乃詣유효작涕泣告別而去。


37. 彈劾된 사람들의 자손
양대梁代에 체포되어 심문받는 사람은 그 자손과 동생, 조카들이 모두 궁문宮門에 가서 3일 동안 맨머리를 드러내고 맨발로 사죄를 하며, 자손이 벼슬에 있으면 스스로 사직을 표한다.
자식은 짚신을 신고 거친 옷을 입고서 쑥대머리에 때 묻은 얼굴로, 허둥지둥하면서 길에서 담당관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머리를 조아려 땅에 찧고 피를 흘리면서 억울함을 하소연한다.
만약 도형徒刑에 처해져서 노예가 되면, 여러 자식들은 모두 관아의 문에다 초막을 세우고 감히 집에서 편안히 지내지 못하는데, 한번 시작하면 열흘을 넘기곤 하며 관리들이 쫓아낸 후에야 비로소 물러난다.
강남江南에서는 감찰관이 사람들을 탄핵彈劾한 경우, 중대한 사안이 아닌데도 예법상 치욕을 당했다거나, 혹은 가벼운 사안으로 갇혔는데 옥사獄死를 했다거나 하면, 모두 원수가 되고 자손은 3대가 서로 교류하지 않는다.
도흡到洽어사중승御使中丞이 되어서 처음 유효작劉孝綽을 탄핵하려 할 때, 그의 형 도개到漑유효작劉孝綽과 전부터 친분이 있어 〈동생에게〉 간절하게 부탁을 하였지만 들어주지 않자, 이에 유효작劉孝綽을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결별을 고하고 떠났다.


역주
역주1 繫劾 : ‘劾’은 심문한다는 뜻이다.[盧文弨]
역주2 露跣 : 《資治通鑑》 142의 胡三省 注에서 “露는 맨상투[露髻]이다.”라 하였다. 《淮南子》 〈修務〉의 高誘 注에서는 “跣足이란 신발을 신지 않은 것이다.”라 하였다.[王利器]
冠을 벗어 머리를 드러내고 맨발을 하다.[역자]
역주3 草屩(갹)麤衣 : 顔本과 朱本에는 ‘屩’자 다음에 “音은 脚이고 신발이다.”라는 注가 붙어 있다.[王利器]
‘麤’는 거칠다는 뜻이다. 布帛 등의 실이 가는 것을 곱고 좋다 하고, 실이 굵은 것을 거칠고 나쁘다고 한다.[盧文弨]
짚신과 거친 옷이다.[역자]
역주4 : 갹
역주5 周章 : 본서 제8 〈勉學〉篇 16에서 “사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묻고 가르침을 청하였다.[周章詢請]”라고 하였고, 제9 〈文章〉篇 5에서는 “허둥지둥하며 두려워한다.[周章怖慴]”라고 하였다. 《文選》에 수록된 〈吳都賦〉의 注에서 “周章은 허둥거리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말한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6 要候 : 要는 ‘邀’로 쓰기도 한다.[盧文弨] 맞이하여 기다리다.[역자]
역주7 草庵 : ‘庵’은 《廣韻》에서 “작은 초막이다.”라 하였다.[盧文弨]
《風俗通》 〈愆禮〉에서 “초상집과 송사가 난 집은 맨머리를 드러내고 초막에서 지낸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訟事가 진행 중일 때 맨머리를 드러내고 초막에서 지내는 것은 東漢 때부터 이미 그러하였다.[王利器]
역주8 不敢寧宅 : 《毛詩》에서 “편안히 지낼 겨를이 없다.[不遑寧處]”라 한 것이나, 《春秋左氏傳》 桓公 18년에서 “감히 편안히 지내지 못한다.[不敢寧居]”라고 한 것처럼, 감히 편안하게 지내지 못함[不敢安居]을 말한 것이다. 후대의 《通制條格》 22에 나오는 ‘假寧’과 《元典章》 12에 나오는 ‘寧家’ 등이 바로 이 ‘寧宅’의 뜻이다.[王利器]
역주9 江南諸憲司彈人事 事雖不重 : 여기서 두 차례 사용된 ‘事’자 중 하나는 衍文인 것 같다. 각 판본마다 모두 ‘事’자가 하나 더 들어가 있다.[盧文弨]
역주10 皆爲怨讎 : 宋本에는 ‘怨’이 ‘死’로 되어 있으며, 原注에 “一本에는 ‘怨’자로 되어 있다.”라 하였다.[王利器]
‘怨’자가 옳다. 음은 冤(원)과 같다.[趙曦明]
역주11 到洽 : 《梁書》 〈到洽傳〉에서 “洽은 字가 茂㳂이고 彭城 武原 사람이다. 普通 6년에 御使中丞이 되었는데, 잘못을 찾아내어 바로잡는 데 망설임이 없고, 굳세고 곧음으로 이름이 났으며 당시 세상이 맑았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12 劉孝綽 : 《梁書》 〈劉孝綽傳〉에서 “孝綽은 字가 孝綽이고 彭城 사람으로서, 本名은 冉이었고 어릴 적 字는 阿士였다. 到洽과 친하였고 함께 東宮에서 교유하였는데, 스스로 재주가 到洽보다 낫다고 여기고는 늘 연회석상에서 到洽의 글을 비웃으니, 到洽이 그에 대해 원망을 품었다. 劉孝綽은 廷尉正이 되더니 첩을 데리고 官府로 들어왔는데, 그의 모친은 그대로 사택에 머물렀다. 到洽이 얼마 안 있어 御史中丞이 되자 아전을 보내어 그 일을 접수시키고 마침내 탄핵하여 상주하기를 ‘어린 첩[少妹]은 호화로운 관아에 데리고 들어오면서, 老母는 아래 사저에다 내버렸다.’라고 하였다. 高祖는 그의 惡行을 감추어 ‘妹’자를 ‘姝’자로 고쳐주고, 그 일로 관련하여 관직을 거두었다.”라 하였다.[趙曦明]
옛날 사람들은 ‘妹’자와 ‘姝’자를 서로 바꾸어 쓰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少妹’는 ‘少姝’의 誤字이다.[王利器]
역주13 其兄漑 : 《梁書》 〈到漑傳〉에서 “漑는 字가 茂灌으로 어려서 부친을 잃고 가난하였지만, 동생 到洽과 더불어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재주와 학식이 있었다.”라 하였다.[趙曦明]

안씨가훈(1)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