年十四五, 初爲
, 便知好學, 懷袖握書, 曉夕諷誦。
후주後主之奔
, 遣其西出,
動靜, 爲
북주周軍所獲。
疑其不信, 歐捶服之, 每折一
,
愈厲, 竟斷四體而卒。
이 무렵 안지추顔之推는 북제北齊의 황문시랑黃門侍郞의 지위에 있었다.[역자]
북제北齊에 전붕란田鵬鸞이란 환관이 있었는데 본래 만족蠻族이었다.
나이 열너덧에 처음 환관이 되자마자 곧 공부에 재미를 느껴 책을 끌어안은 채 움켜쥐고 밤낮 없이 외고 암송하였다.
맡은 직급이 아주 낮아 시키는 일이 힘들고 괴로워도 한가한 틈을 살펴 사방을 두루 돌면서 묻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매번 문림관文林館에 들를 때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땀을 흘리곤 했는데 책에 대해 묻는 것 외에 다른 말은 할 겨를도 없었다.
옛사람들의 절조節操와 의리義理에 관한 일들을 보게 되면 일찍이 감격하여 오랫동안 음미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나는 그를 대단히 좋아하여 한층 더 이끌고 격려해주었다.
후일 그는 인정받고 예우를 받아 경선敬宣이란 이름도 하사받고 지위도 시중개부侍中開府에 이르렀다.
북제의 후주後主가 청주靑州로 달아날 적에 그를 서쪽으로 내보내고 동정을 살피게 하였는데 북주北周의 군사에게 붙잡혔다.
북제北齊의 군왕君王이 어디에 있는지 묻자 속여서 말하기를 “일찌감치 떠났으니 국경을 벗어났으리라고 여겨진다.”고 하였다.
〈북주北周의 군사가〉 이를 의심하고 믿지 않았으므로 그가 실토하도록 때렸는데, 사지四肢가 하나씩 잘릴 때마다 말씨와 안색이 더욱 준엄해지다가 끝내 사지四肢가 다 잘려서 죽었다.
만이蠻夷의 어린아이조차 오히려 배움을 통하여 충성忠誠을 이룰 수가 있었으니, 북제北齊의 장상將相들은 경선敬宣의 종만도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