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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氏家訓(1)

안씨가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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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거짓은 결국 드러나게 마련
吾見世人, 淸名登而入, 信譽顯而然諾虧, 不知
人之虛實眞僞在乎心, 無不見乎迹, 但察之未熟耳。
一爲察之所鑒, ,
, , 當於爾時, 自以巧密。
後人書之, 留傳萬代, 可爲也。
近有大貴, 以孝著聲, 前後居喪, 哀毁踰制, 亦足以高於人矣。
而嘗於
塊之中, 以塗臉, 遂使成瘡, 表哭泣之過。
左右不能掩之, 益使外人謂其居處飮食, 皆爲不信。
者, 乃貪名不已故也。


3. 거짓은 결국 드러나게 마련
내가 세상 사람들을 보니, 청렴淸廉하다는 명성이 오를수록 뇌물을 받고, 신용信用 있다는 칭송이 자자할수록 약속을 깨뜨리면서, 뒤에 나오는 창이 앞에 있는 방패를 망가뜨리는 줄 모른다.
복자천虙子賤은 “여기에서 성실한 사람은 저기에서도 드러난다.”라고 하였다.
사람의 허실虛實진위眞僞는 마음속에 들어 있으면 행적에 드러나기 마련이며,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은〉 단지 충분히 살피지 못했기 때문일 뿐이다.
일단 살펴서 발각되고 나면 교묘한 거짓이 서투른 진실만 못하니 거기에는 엄청난 치욕이 뒤따른다.
백석伯石의 지위를 사양했고 왕망王莽은 정치에서 물러났는데, 당시에 그들은 교묘해서 아무도 모를 거라고 혼자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후인들이 글로 써서 만대에 전하고 있으니 모골이 송연하다고 할 만하다.
근래에 어떤 지체 높은 귀족이 효성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전후로 양친의 상을 치르면서 슬픔으로 몸을 상한 것이 정해진 법도를 넘어서 남들보다 대단하다고 할 만하였다.
그런데 앞서 상중의 거처에서 파두巴豆를 얼굴에 발라 부스럼을 만들어서 지나치게 슬피 울었음을 나타내었다.
가까이 있는 어린 동복들이 그 비밀을 숨기지 못해서, 〈결국〉 바깥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거처나 음식까지도 다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하게 만들고 말았다.
한 가지 거짓 때문에 백 가지의 진실을 잃은 까닭은, 바로 끝없이 명성을 탐하였기 때문이다.


역주
역주1 金貝 : 《漢書》 〈食貨志〉에서 “金刀와 거북등딱지와 조개[金刀龜貝]는 물자를 유통시키는 수단이다.”라 했다. 《說文解字》에서 “貝는 바다의 甲蟲으로서 象形字이다. 옛날에 貝를 화폐로 삼고 거북을 보물로 여겼는데, 周代에 와서 泉이라는 화폐를 사용했으며, 秦代에 와서는 貝를 없애고 錢을 사용했다.”라 하였다.[盧文弨]
화폐, 돈, 여기서는 뇌물이라는 뜻으로 쓰였다.[역자]
역주2 後之矛戟 毁前之干櫓也 : 《韓非子》 〈難勢〉에서 “客이 말하였다. 창과 방패를 파는 사람이 있었는데, 방패의 견고함을 자랑하며 그것을 뚫을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하였다. 좀 있다가 자기 창을 자랑하며 ‘내 창의 날카로움은 못 뚫을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 말에 응하여 ‘당신의 창으로 당신의 방패를 뚫으면 어떻게 되겠소?’라 하자, 그 사람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뚫을 수 없는 방패와 뚫지 못할 것이 없는 창은, 그 명분이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顔之推의 이야기는 여기에 근거한 것이다. 《說文解字》에서 “櫓는 큰 방패이다.[櫓 大盾也]”라 했다.[朱亦棟]
鄭珍의 견해도 같다. 《禮記》 〈儒行〉에서 “禮와 義를 방패로 삼는다.[禮義以爲干櫓]”라 하였고, 鄭玄의 注에서 “干櫓는 작은 방패와 큰 방패이다.”라 하였다.[王利器]
창은 뇌물을 받고 약속을 파기하는 일을 비유한 것이고, 방패는 청렴하다는 명성이나 신용 있다는 칭송을 비유한 것이다. 창과 방패의 비유를 통해 모순된다는 뜻을 나타내었다.[역자]
역주3 虙(복)子賤 : 孔子의 제자로서, 姓은 虙이고 이름은 不齊이며, 子賤은 그의 字이다. 宓子賤으로도 쓰며 ‘掣肘’(지나치게 간섭하여 마음대로 못하게 한다는 뜻) 故事의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역자]
역주4 : 복
역주5 誠於此者形於彼 : 《孔子家語》 〈屈節解〉에서 “巫馬期가 單父 고을의 경계에 들어가서 밤에 물고기를 잡는 사람을 만났는데, 고기를 잡아서는 바로 놓아주므로 巫馬期가 그 까닭을 물었다. 고기 잡던 사람이 말하기를 ‘물고기 중 큰 것은 우리 大夫가 아끼는 것이고, 작은 것은 우리 대부가 키우려고 하는 것이라서, 이 두 가지는 바로 놓아주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巫馬期가 돌아와서 孔子께 고하여 말하기를 ‘宓子賤의 덕이 지극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밤길을 가면서도 마치 엄한 형법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듯이 여기게 하였습니다. 감히 묻사오니 복자천은 어떻게 하였기에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가 있었을까요?’라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일찍이 그와 이야기를 하면서, 「여기서 성실한 자는 저기서도 드러난다.[誠於此者刑於彼]」고 했더니, 복자천이 이 방법을 單父에서 행하였구나.’라고 하셨다.”라 하였다. ‘刑’과 ‘形’은 옛날에 통용되던 글자였다. 《孔子家語》에 의하면 〈이 대목은〉 孔子가 宓子賤에게 하신 말씀이다.[盧文弨]
역주6 巧僞不如拙誠 : 《韓非子》 〈說林 上〉에서 “그러므로 교묘한 거짓이 서투른 진실만 못하다[巧詐不如拙誠]고 하는 것이다. 樂羊은 공을 세우고도 의심을 받았고, 秦西巴는 죄를 지었으면서도 더욱 신뢰를 받았다.”라고 하였다.[趙曦明]
《三國志》 〈劉曄傳〉의 注에 나오는 傅子가 인용한 속담도 《韓非子》와 같다.[王利器]
역주7 承之以羞大矣 : 《周易》 恒掛에 “九三은, 그 덕이 항구하지 않은지라 때로는 치욕이 이어지기도 한다.[或承之羞]”라 하였고, 王弼의 注에서는 “德行이 항구하지 않으면 서로 어긋나 모순되는데, 불러서 따질 수 없으므로 때로는 치욕이 이어질 수 있다.[故或承之羞也]”라 하였다.[趙曦明]
역주8 伯石讓卿 : 《春秋左氏傳》 襄公 30년에서 “伯有가 죽고 나자 太師로 하여금 伯石을 卿의 자리에 오르도록 명하였는데, 伯石은 사양하였다. 太史가 물러나오자 다시 명하게 하였다. 다시 명하였지만 또 사양을 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세 차례 하더니, 마침내 임명장을 받고 들어가 절을 올렸다. 공자 産은 이 일로 그의 사람됨을 싫어하였지만, 자신의 지위 다음으로 삼았다.”라 하였다.[趙曦明]
伯石은 春秋時代 鄭나라의 신하였다.[역자]
역주9 王莽辭政 : 《漢書》 〈王莽傳〉에서 “大司馬 王根이 王莽을 추천하여 자신의 관직을 대신하게 하자, 황제가 결국 王莽을 발탁하여 大司馬로 삼았다. 哀帝가 즉위하자 〈王莽은〉 上疏를 올려서 나이가 많아 물러나고 싶다고 하였다. 哀帝가 말하기를 ‘先帝께서 그대에게 정치를 맡기고 群臣들은 내치면서 짐이 宗廟를 받들 수 있게 되었고, 훌륭하게 그대와 한 마음으로 뜻을 맞추어나가고 있소. 이제 그대가 병을 핑계로 물러나겠다고 하니 짐은 매우 마음이 아프구려. 이미 尙書에 그대를 도와 일을 보고하도록 명해놓았소.’라 하였다. 또한 승상 孔光 등을 보내어 太后에게 ‘大司馬가 즉시 조정에 나오지 않는다면 皇帝는 감히 聽政을 할 수가 없습니다.’라 하였다. 太后가 다시 王莽에게 일을 보라고 하였지만, 이미 傅太后가 노했다는 핑계를 들어 다시 사퇴를 청하였다.”라 하였다.[趙曦明]
白居易의 〈放言〉 詩에서 “周公이 유언비어를 두려워하던 시절, 王莽이 겸손하고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아직 찬탈하기 전, 만약 그때에 그들이 죽었다면, 그들 삶의 眞僞를 그 누가 알겠는가?”라 하였는데, 그 뜻이 顔之推와 같다.[王利器]
西漢 말 王莽은 大司馬로 있으면서 두 차례 사임하여 권력과 이권에 뜻이 없음을 나타내었으나, 결국 쇠약해진 漢 王室을 찬탈하여 新을 세웠다.[역자]
역주10 骨寒毛豎(수) : 뼈가 시리고 털이 곤두서다. 毛骨이 송연하다. 아주 끔찍하고 두렵다.[역자]
역주11 : 수
역주12 苫(점)塊 : 《禮記》 〈問喪〉에서 “거적자리를 깔고 흙덩이 베개를 베고서[寢苫枕塊], 부모가 땅속에 계심을 슬퍼한다.”라 하였다.[盧文弨]
부모 상중의 거처를 뜻한다.[역자]
역주13 : 점
역주14 巴豆 : 《本草綱目》에 “巴豆는 巴郡에서 생산되며 독성이 강하다.”라 하였다.[盧文弨]
대극과에 속하는 활엽 관목으로 그 씨는 약으로 쓰이지만 독성이 강하다고 한다.[역자]
역주15 童豎 : 豎는 아직 冠禮할 나이가 되지 않은 잔심부름하는 아이이다.[盧文弨]
역주16 以一僞喪百誠 : 《文選》에 수록된 〈答賓戱〉에서 “功勳은 허위로 조작되어서는 안 되고, 名聲은 거짓으로 세워져서는 안 된다.”라 하였다.[王利器]

안씨가훈(1)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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