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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氏家訓(2)

안씨가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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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씨는 적당히
書跡, 微須留意。
江南諺云:“。” 承晉‧宋餘俗, 相與事之, 故無頓者。
吾幼承, 加性愛重, 所見亦多, 而翫習頗至, 遂不能佳者, 良由故也。
然而此藝不須過精。
夫巧者勞而智者憂, 常爲人所役使, 更覺爲累, 遺戒, 深有以也。


1. 글씨는 적당히
해서楷書초서草書필체筆體는 신경을 좀 써야 한다.
강남江南 속담에 “짤막한 편지가 천 리에 내놓는 얼굴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여풍餘風을 이어받아 다들 글씨에 힘썼으므로, 〈글씨〉 때문에 낭패를 당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어려서 가업家業을 이어받은 데에다 천성적으로 글씨를 아끼고 소중히 여겼으며, 내가 본 법서法書도 꽤 많고 즐겨 익혀온 공력功力도 제법 상당하였지만, 끝내 잘 쓰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타고난 소질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기예는 지나치게 뛰어날 필요가 없다.
재주 있는 자는 고달프고 지혜로운 자는 근심이 많아, 늘 남에게 부림을 당하여 더욱더 성가시게 느껴질 것이니, 위중장韋仲將(위탄韋誕)이 유언으로 남긴 가르침은 참으로 일리가 있다.


역주
역주1 眞草 : 眞은 眞書 즉 楷書를 말하고, 草는 草書를 가리킨다. 중국의 글씨체는 고대에 甲骨文과 金文이 있었고 이후 小篆과 隷書가 나왔는데, 이 隷書가 南北朝를 거쳐 隋唐에 이르러 오늘날의 이른바 楷書가 되었다. 顔之推가 말한 ‘眞’은 隷書의 흔적이 남아 있는 眞書를 가리킨다. 별도로 東漢 후기에 隷書로부터 草書가 발생하였는데, 처음에는 여전히 隷書의 필법을 갖고 있어서 草隷 혹은 章草라고 불렀으며, 南北朝 후기에 이르러서야 隷書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今草가 나왔다. 여기서 ‘草’는 章草와 今草를 둘 다 가리킨다.[莊輝明‧章義和]
眞書는 隷書인데, 오늘날에는 楷書라고 한다. 《晉書》 〈衛瓘傳〉에서 “아들 恒은 草書와 隷書를 잘 썼는데 《四體書勢》를 지어서, ‘隷書는 篆書를 빨리 쓴 것이다. 上谷 사람 王次仲이 처음으로 楷法을 만들었다.’라 했고, 또 ‘漢나라가 일어나자 草書가 생겼는데, 그것을 만든 사람의 성명은 모른다.’라 했다.”라 했다. 생각건대, 眞草라는 말은 魏 武帝의 〈選擧令〉과 《蔡琰別傳》에 나온다.[盧文弨]
褚先生(褚少孫)의 《補史記》 〈三王世家〉에서 “삼가 그 眞草의 詔書들을 정리하여, 왼편에 엮었습니다.”라 하였으므로, 眞草라는 말은 西漢 때에 이미 있었다.[王利器]
楷書와 草書의 통칭이다.[역자]
역주2 尺牘書疏 千里面目也 : 속담은 韻語를 많이 쓰므로 이 대목은 “書疏尺牘 千里面目”이 되어야, ‘牘’자와 ‘目’자가 韻에 맞는다.[劉盼遂]
《漢書》 〈韓信傳〉에 “咫尺의 편지를 받든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顔師古는 “여덟 치를 咫라고 한다. 咫尺이란 簡牘이 여덟 치보다 길고 한 자보다 짧다는 말로, 간단하게 썼음을 비유한 것이다. 오늘날 時俗에서 尺書 혹은 尺牘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그 유풍이 남은 표현일 것이다.”라고 했다. 또 생각건대, 《後漢書》 〈蔡邕傳〉에서 “언제 만날지 모를 때는, 오직 편지[書疏]만이 얼굴 보는 것을 대신할 수 있다.”라고 했는데, 江南의 속담과는 뜻이 좀 다르다.[王利器]
尺牘書疏는 길이가 한 자밖에 되지 않는 짧은 편지라는 뜻이다.[역자]
역주3 狼狽 : 狼과 狽는 짐승 이름으로 둘 다 행실이 좋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글씨를 쓸 때 필적이 좋지 않은 것을 이것에 비유했다.[盧文弨]
쩔쩔매다. 낭패하다. 徐鯤(곤)은 〈陳情表〉의 李令伯 注에 인용된 段玉裁의 견해를 근거로, 狼狽를 이리가 밟는다는 뜻의 ‘狼跋’로 보았다. 즉 이리가 앞으로 가려 하면 늘어진 턱살을 밟아 쩔쩔매고, 뒤로 가려 하면 꼬리를 밟아 쩔쩔맨다는 뜻이다.[역자]
역주4 門業 : 집안에서 줄곧 해오던 일[家門素業], 즉 家業이다. 《梁書》 〈顔協傳〉에서 “여러 책들을 널리 섭렵했고, 草書와 隷書를 잘 썼다.”라 하였고, 陳思의 《書小史》 7에서 “顔協은……湘東王의 記室이 되었다. 젊어서 여러 가지 책들을 섭렵하였고, 草書와 隷書, 飛白書 등을 잘 썼다. 吳人 范懷約이 隷書에 능하여 顔協이 그 書體를 배웠는데, 거의 原本을 능가하였다. 荊楚 지역의 碑碣은 모두 顔協이 쓴 것이다. 당시 會稽의 謝善勛이 八體六文을 잘했고 작은 글씨를 잘 썼으며, 京兆의 韋仲은 飛白書를 잘 썼는데, 모두 湘東王의 藩府에 있었다. 謝善勛은 錄事參軍이었고 韋仲은 中兵參軍이었는데, 藩府 사람들은 顔協이 韋仲보다는 낫지만 謝善勛보다는 모자란다고 보았다.”라 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顔之推가 “나는 어려서 가업을 이어받았다.[吾幼承門業]”라고 한 근거이다.[王利器]
역주5 法書 : 筆體의 본보기가 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唐나라 張彦遠의 《法書要錄》 10권이 있다.[王利器]
역주6 功夫 : 《隷釋》 〈廣漢長王君治石路碑〉에 “애쓴 것[功夫]이 9백여 일”이라 하였고, 《三國志》 〈魏書 三少帝紀〉에서는 齊王 芳靑龍의 〈七月秋八月己酉詔〉를 인용하여 “……어저께 나가서 길을 닦아놓은 것을 보았더니, 비가 내려 다시 닦아야 하고 헛되이 애만 쓴 것이었다.[徒棄功夫]”라고 했으며, 《梁書》 〈馮道根傳〉에서는 “매번 정벌이 끝나도 공적을 말하지 않으니, 그 집단에서 누군가가 그를 원망하였는데, 馮道根은 그를 달래어 말하기를 ‘明主께서 스스로 얼마나 애썼는지[功夫]를 잘 살펴 아시니, 내가 또 무슨 일을 하겠소?’라고 했다.”라 한 것으로 보아, ‘功夫’라는 말은 漢, 魏, 六朝 사람들의 관용어였다.[王利器]
역주7 無分 : 分은 天分을 말한다.[盧文弨]
소질이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分은 타고난 자질을 뜻한다.[역자]
역주8 韋仲將 : 《世說新語》 〈巧藝〉에서 “偉仲將은 글씨를 잘 썼는데, 魏 明帝가 궁전을 세우고 편액을 달려고 仲將으로 하여금 사다리에 올라가 글씨를 쓰게 하였다. 다 쓰고 내려오니 머리털과 귀밑머리가 허옇게 되어, 자손들에게 다시는 글씨를 배우지 말 것을 당부했다.”라 하였다. 劉孝標의 注에서는 《文章敍錄》를 인용하여 “韋誕은 字가 仲將이고 京兆 杜陵 사람이다. 光祿大夫를 지내다 죽었다.”라 하였고, 衛恒의 《四體書勢》를 인용하여 “韋誕은 楷書를 잘 써서, 魏나라 궁전과 누각의 글씨는 韋誕이 쓴 것이 대부분이었다. 明帝가 陵霄觀을 세웠는데 잘못하여 글씨도 쓰기 전에 편액을 먼저 달아버렸다. 그래서 바구니에 韋誕을 태우고 도르래에 긴 밧줄을 달아 끌어올려서 글씨를 쓰게 하였다. 땅으로부터 25丈이나 떨어져 올라가자 韋誕은 몹시 겁이 났다. 이에 자손들에게 이런 楷書를 쓰는 법은 그만두라고 훈계하였고, 또 그것을 가훈으로 삼았다.”라 하였다.[趙曦明]
《世說新語》 〈方正〉의 注에서는 宋 明帝의 《文章志》를 인용하여 “太元 연간에 새 궁전이 완성되자 건의한 사람들은 王獻之를 굴복시켜 편액에 글씨를 쓰게 하여 만대의 보물로 삼고 싶어 했다. 謝安이 王獻之와 얘기하던 차에, 魏나라 때 陵雲閣을 지으면서 편액에 글씨 쓰는 것을 잊어버려, 韋誕으로 하여금 사다리에 매달려 올라가 글씨를 쓰게 하였으며, 내려올 때에는 수염과 머리카락이 다 백발이 되었고 겨우 숨이 붙어 있었는데, 돌아가서 子弟들에게 ‘楷書 쓰는 법은 그만두어야 한다.’라고 말했던 일을 언급함으로써, 그의 마음을 움직여보려 하였다. 王獻之는 그 뜻을 알아차리고 정색을 하며 말하기를 ‘참 이상한 일이군요! 韋誕은 魏나라의 大臣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을 시킬 수가 있을까요! 魏나라가 오래가지 못한 것도 그 까닭이 있군요.’라고 하였다. 謝安은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라 하였다. 王獻之는 품행이 方正함을 자처함으로써 남들에게 부림을 당하지 않았으니, 技藝를 익히는 일에 지나치게 매달리지 말라고 한 顔之推의 견해보다 낫다.[王利器]

안씨가훈(2)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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