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춘추곡량전穀梁傳》稱:“
공자우公子友與
거나莒挐相搏,
。’”
近在
북제齊時, 有
강중악姜仲岳謂:“
맹孟노勞者, 公子左右, 姓
맹孟名
노勞, 多力之人, 爲國所寶。” 與吾
。
전봉田郞。’”
, 偶以四言,
경조인京兆人전봉田鳳也。
有一才士, 乃言:“時장경조張京兆及전랑田郞二人皆堂堂耳。”
강남江南有一
, 讀誤本
, 解“蹲鴟, 芋也”, 乃爲
字。
之世, 在
時, 有一才學
중신重臣, 新得
, 而頗
, 誤
전욱顓頊字,
전욱頊當爲許錄反, 錯作許緣反。
此人先有高名,
信行, 期年之後, 更有碩儒, 苦相究討, 方知誤焉。
《
한서漢書》
왕망전王莽贊云:
聲, 餘分閏位。” 謂以僞亂眞耳。
有一俊士, 自許史學,
甚高, 乃云:“
왕망王莽非直鴟目虎吻, 亦紫色蛙聲。”
又《
예악지禮樂志》云:“給
挏馬酒。”
이기李奇注:“以馬乳爲酒也,
乃成。”
向學士又以爲種桐時, 태관太官釀馬酒乃熟, 其孤陋遂至於此。
, 亦稱學問, 讀
, 爲杖策之杖,
“
造歷”,
磨之磨。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묻기를 좋아하면 〈아는 것이〉 많아진다.”고 하였으며,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혼자 배워서 친구가 없으면 고루孤陋하고 견문見聞이 좁다.”고 하였으니, 대개 모름지기 갈고 닦으면서 서로 계발해야 할 것이다.
문을 닫아걸고 책을 읽어서 선입견을 스승 삼아 자기가 옳다고 여기다가 많은 사람들이 널리 앉아 있는 자리에서 오류와 착오를 범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 일컫기를 “공자우公子友가 거나莒拏와 서로 밀치며 싸우자, 좌우의 사람들이 ‘맹로孟勞〈로 죽이라〉!’ 하고 소리쳤다.” 하였다.
맹로孟勞란 노魯나라 보검의 이름이니 《광아廣雅》에도 보인다.
그런데 근래 북제北齊에 있을 때 강중악姜仲岳이란 이는 “맹로孟勞란 공자公子의 측근으로 성이 맹孟이고 이름이 노勞이니, 힘이 장사라 온 나라에서 보배로 여겼다.”고 하면서 나와 끈질기게 다투었다.
그 무렵에 청하군淸河郡의 군수 형치邢峙는 당대의 대학자인데 그가 나를 도와 이를 증명해주고 나서야 얼굴을 붉히면서 승복하였다.
또 《삼보결록三輔決錄》에 이르기를 “영제靈帝의 전각殿閣 기둥에 ‘당당하도다 자장子張이여!
경조인京兆人 전봉田鳳이 그러하리니.’라고 써놓았다.”고 하였으니, 대개 《논어論語》를 인용하여 사언四言으로 대우對偶를 맞추어 경조京兆 사람 전봉田鳳을 평가한 것이었다.
어떤 재자才子가 있어 이를 두고 말하기를 “당시에 장경조張京兆와 전랑田郞 두 사람이 다 위풍당당하였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설명해주는 말을 듣자 그는 처음에는 크게 놀라더니, 나중에는 이내 이 때문에 부끄러워하고 뉘우쳤다.
강남江南의 어떤 세도가가 오류가 있는 판본으로 〈촉도부주蜀都賦注〉를 읽었는데 “준치蹲鴟란 토란[芋]이다.”라고 풀이한 데서 〈‘우芋’자가〉 그만 ‘양羊’자로 되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양고기를 선물하자 답서에 이르기를 “외람되이 토란[蹲鴟]을 받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온 조정이 다 놀랐으나,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이해를 못하다가 한참 뒤에 짐작해서 비로소 이와 같은 줄을 알게 되었다.
북위北魏 시기에 낙양洛陽에 있을 때 재학才學을 겸비한 어떤 중신重臣이 새로 《사기음史記音》을 얻었는데, 오류가 많아서 ‘전욱顓頊’이라는 자字에 반절反切을 잘못 써놓아 ‘욱頊’이 ‘허許’와 ‘녹錄’의 반절反切로 쓰였어야 하는데 ‘허許’와 ‘연緣’의 반절反切로 잘못 쓰여 있었다.
마침내 조신朝臣들에게 말하기를 “종래에는 ‘전욱專旭’과 같은 음으로 잘못 읽었으나 ‘전현專翾’과 같이 읽어야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사람이 일찌감치 명성을 떨치고 있었으므로 일제히 그 말을 믿고 따라 읽다가 1년이나 지난 뒤에 다른 대학자가 끈덕지게 연구, 토론하고서야 비로소 이것이 오류였음을 알게 되었다.
《한서漢書》 〈왕망전王莽傳〉 찬贊에 이르기를 “순정純正치 못한 색깔과 순정純正치 못한 소리이니 여분의 순정純正치 못한 지위이다.[紫色䵷聲 餘分閏位]”라고 하였으니, 이는 〈모두가 비정통의 왕조를 형용한 것으로써〉 가짜가 진짜를 어지럽혔음을 일컬은 말이다.
과거에 언젠가 내가 여러 사람들과 책 얘기를 하다가 화제가 왕망王莽의 모습에 이르렀다.
출중한 선비 하나가 스스로 사학史學에 정통했노라 자부하였고 명망도 아주 높았는데, 말하기를 “왕망王莽은 올빼미의 눈에 범의 입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낯빛은 자주색이고 목소리는 개구리 소리였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또 《한서漢書》 〈예악지禮樂志〉에 “태관太官에게 동마주挏馬酒를 주었다.”고 하였는데, 이기李奇는 주석을 달기를 “마유馬乳로 만든 술로, 위아래로 흔들면[揰挏] 만들어진다.”고 하였다.
충동揰挏 두 글자가 모두 손수변[扌]을 따르며, 여기서 충동揰挏이란 세게 부딪치며 위아래로 흔듦을 말한 것으로, 지금도 낙주酪酒를 만들 때는 역시 그렇게 한다.
전번의 그 학사學士는 또 오동을 심을[種桐] 때에 태관太官이 빚은 낙주酪酒가 그제야 익는다고 여겼으니 그 고루孤陋함이 마침내 이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태산太山의 양숙羊肅 역시 학문으로 칭송되는 이였으나 반악潘岳의 부賦를 읽고 “주周 문왕文王 시절의 약지조弱枝棗”라는 구절에서 〈‘지枝’자를〉 ‘지팡이[杖策]’라고 할 때의 ‘장杖’자인 줄 알았으며, 《세본世本》에 보이는 “황제黃帝의 사관史官 용성容成이 역사[歷]를 서술하였다.”는 구절에서 ‘역歷’자를 ‘디딜방아와 맷돌[碓磨]’이라고 할 때의 ‘마磨’자인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