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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氏家訓(2)

안씨가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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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능한 南朝 士大夫
吾見世中文學之士, 古今, , 及有試用, 多無所堪。
之世, 不知有之禍;處之下, 不知有之急;
保俸祿之資, 不知有耕稼之苦;肆吏民之上, 不知有勞役之勤,
故難可以也。
晉朝南渡, 士族, 故江南, 有才幹者, 擢爲已下, 已上, 典掌機要。
其餘文義之士, 多迂誕浮華, 不涉世務,
纖微過失, 又惜行, 所以處於, 蓋護其短也。
至於, , 諸王, 並曉習, 濟辦時須, 縱有小人之態, 皆可鞭杖,
故多見, 蓋用其長也。
人每不自量, 擧世怨梁武帝父子愛小人而疏士大夫, 此亦耳。


2. 무능한 남조南朝 사대부士大夫
내가 세상에서 문학文學한다는 선비들을 보았더니, 고금古今 품평品評은 마치 손바닥 가리키듯 쉽게 하면서도, 일을 시켜보면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태평한 시대에 살다 보니 난리의 재앙도 모르고, 조정朝廷 주변에서만 지내다 보니 전쟁의 화급함도 모르며,
녹봉으로 받는 재물이나 지키며 살다 보니 농사의 어려움도 모르고, 하급관리나 백성들 위에서 멋대로 굴다 보니 노역勞役의 고단함을 모른다.
그래서 시대 상황에 적응하고 일을 처리해나가기가 어려운 것이다.
왕조가 남쪽으로 건너와 사족士族들을 우대하자, 강남江南에서 관리로서 재간 있는 이들은 상서령尙書令복야僕射 이하 상서랑尙書郎중서사인中書舍人 이상의 벼슬에 발탁되어, 기밀과 중요한 일들을 맡아서 관장하였다.
그 나머지 문관文官의 선비들은 대부분이 허황하고 겉만 번드르르하여 세상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
조그만 잘못으로 차마 매질하기도 그렇고 해서, 〈이런 사람들은〉 일은 별로 없으면서 직위만 높은 자리에 두는데, 아마도 그 단점을 덮어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대각영사臺閣令史주서主書, , , 그리고 번왕藩王들을 수행하는 전첨典籤이나 성사省事 같은 하급관리들은, 다들 직무를 익혀 잘 알고 있어 그때그때 급한 상황을 잘 처리해내고, 설령 소인小人의 행태가 있다 하더라도 모두 매질로 엄하게 다스릴 수가 있다.
그래서 맡겨놓고 부리는 경우가 많이 보이는데 아마도 그 장점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늘 자신을 헤아리지 못하고 세상에서 다들 양 무제梁 武帝 부자父子소인小人을 아끼고 사대부士大夫를 멀리한다고 원망하였는데, 이 역시 눈이 제 눈의 속눈썹을 보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역주
역주1 品藻 : 《漢書》 〈揚雄傳〉에서 “칭찬하며 품평하였다.[稱述品藻]”라 하였고, 顔師古는 “品藻란 그 等級과 文質을 정하는 것이다.”라 하였다. 江淹의 〈雜體詩序〉에서는 “비록 근원과 유파를 품평하기[品藻淵流]에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헤아려 따져보았다는 점에서 어긋남이 없다.”라 하였다. 《世說新語》에 〈品藻〉篇이 있다.[王利器]
등급을 매겨 평하다, 즉 품평하다는 뜻이다.[역자]
역주2 若指諸(저)掌 : 《禮記》 〈仲尼燕居〉에서 “나라 다스리기를 마치 손바닥 가리키듯 할 뿐이로다.”라 하였고, 注에서 “나라 다스리며 손바닥을 가리킨다고 한 것은 알기 쉽다는 말이다.”라 하였다. 《論語》 〈八佾〉에서는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이야기를 아는 자가 천하를 다스리면 그건 마치 이걸 보는 듯하겠지!’라고 하시면서, 그의 손바닥을 가리키셨다.”라고 하였고, 《集解》에서 “包咸이 말하기를 ‘마치 손바닥 위의 물건을 가리키는 것처럼 그것이 쉬움을 말했다.’라 하였다.”라고 했다. 《中庸》에서는 “나라 다스리기가 마치 손바닥에 놓고서 보는 것 같은가?”라 하였고, 朱熹의 注에서 “그것을 손바닥에서 본다는 것은 쉽다는 말이다.”라고 했다.[王利器]
역주3 承平 : 治國平天下가 이어진다는 말로, 태평의 시대가 오랫동안 지속됨을 일컫는다. 《漢書》 〈食貨志〉에서 “王莽은 漢나라가 태평한 상황[承平之業]을 틈탔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4 喪亂 : 많은 사람들이 죽는 전쟁, 전염병, 천재지변 등의 큰 변란을 말한다.[역자]
역주5 廟堂 : 본래는 祠堂이나 宗廟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나라의 정무를 처리하는 朝廷을 뜻한다.[역자]
역주6 戰陳 : 戰陣, 즉 전쟁이란 뜻이다.[역자]
역주7 應世經務 : 《春秋公羊傳》 襄公 29년조에 대한 何休의 注에서 孔子의 말을 인용하여, “三王 때에 肉刑의 법규가 점차 늘어나면서, 시대에 따라[應世] 교활하고 간교한 거짓이 많아졌다.”라고 했다. 《白虎通》 〈五刑〉에서는 “傳에 이르기를 ‘三皇 때에는 文字가 없었고 五帝 때에는 象을 그렸으며, 三王은 刑法을 밝혀 시대에 맞추어[應世] 다섯 가지로 만들었다.’라 하였다.”라고 했는데, 應世란 그 시대와 세상에 적응한다는 말로, 여기서 이 뜻을 사용하였다. 《十六國春秋》 〈北燕錄〉에서 “武로써 난을 평정하고, 文으로써 일을 처리한다.[文以經務]”라고 했다. 經務라는 표현은 이 글에 근거한 것이다.[王利器]
시대 상황에 맞추어 일을 처리한다는 뜻이다.[역자]
역주8 優借 : 넉넉하게 사정을 보아준다[從優假借]는 뜻으로, 오늘날에 優待라고 하는 것과 같다. 《後漢書》 〈劉愷(개)傳〉에서 “肅宗은 그의 의로움을 훌륭하게 보아, 특별히 그를 우대하였다.[特優假之]”라 하였다. ‘優假’나 ‘優借’는 같은 뜻이다.[王利器]
역주9 冠帶 : 《文選》에 실린 〈西京賦〉의 薛綜 注에서 “冠帶는 縉紳과 같은 것으로 벼슬아치를 일컫는다.”라 하였다.[王利器]
본래는 모자와 허리띠 즉 예복을 가리키지만, 전하여 이를 착용하는 관리를 뜻한다.[역자]
역주10 令僕 : 尙書令과 僕射(야)를 말한다.[역자]
《晉書》 〈殷浩傳〉에서 “服喪이 끝나자 불러서 尙書僕射에 임명했으나 취임하지 않아, 다시 建武將軍 겸 揚州刺史로 임명하니 결국 조정의 권력에 참여하게 되었다.……뒤에 그만두고 庶人이 되었다.……桓溫이 郗(치)超에게 말하기를 ‘殷浩는 덕도 있고 말도 잘해서 예전에 尙書令이나 僕射에 임명했으면 百官들의 본보기가 되기에 충분하였을 텐데, 朝廷에서 그의 재능을 잘못 사용했을 뿐이오.’라고 했다.” 하였다.[王利器]
《晉書》 〈職官志〉에서 “尙書令은 祿秩이 천 석으로 제수되면 책명으로 임명하는데, 尙書省 소속이기 때문이다. 僕射는 官服과 祿秩이 尙書令과 같다. 尙書는 본래 秦나라 때 설치한 것을 漢나라가 계승하였는데, 晉이 渡江하면서 吏部, 祠部, 五兵, 左民, 度支 등 五尙書가 있었다.”라 하였다.[盧文弨]
역주11 尙書郎中書舍人 : 《晉書》 〈職官志〉에서 “尙書郞은 문서를 만들고 초안 잡는 일을 주관하며, 닷새마다 번갈아 入直하여 建禮門 내에 있었다. 처음에 三省을 따라서 관청으로 오면 먼저 尙書郎中을 맡았다가, 한 해가 차면 尙書郞이라 하고 3년이 지나면 侍郞이라 불렀는데, 관리들 중 유능한 자를 뽑아서 시켰다. 中書舍人은 晉初에 舍人과 通事를 각각 10명씩 두었다가, 강남으로 내려와 舍人과 通事를 합하여 通事士人으로 불렀으며, 상주문을 바치는 일을 관장하였다.”라 하였다.[盧文弨]
역주12 捶(추)楚 : 《說文解字》에서 捶는 “몽둥이로 때린다.”로 풀이하였고, “楚는 가시나무이다.[楚 荊也]”라 하였으며, 종아리를 치는 데에 쓴다.[盧文弨]
漢代로부터 郎官의 관리는 과실을 범하면 회초리를 맞았는데, 《世說新語》 〈品藻〉의 기록을 보면 東晉 때까지도 이런 관행이 지속되고 있어, 사람들은 이 직책을 맡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南史》 〈蕭琛(침)傳〉에 의하면, 이것이 없어진 것은 齊 明帝 때부터였다. 하지만 唐代에도 參軍이나 薄尉 같은 하급관리들은 종종 매를 맞았다.[王利器]
역주13 淸高 : 맑고 높은 자리란 뜻으로, 높기는 하지만 일이 없어 한가로운 직책을 말한다.[역자]
역주14 臺閣令史 : 《後漢書》 〈仲長統傳〉에서 “비록 三公은 두었지만, 일은 臺閣으로 귀착된다.”라 하였고, 注에서 “臺閣은 尙書를 말한다.”라 하였다.[王利器]
《宋書》 〈百官志〉에서 “東漢 때 令史가 18人이었고, 晉初에는 正令史가 20人, 書令史가 30人이었으며, 諸公令史는 定員이 없었다.”라 하였다.[盧文弨]
尙書省의 하급관리이다. 臺閣은 尙書省을 뜻한다.[역자]
역주15 主書 : 《續漢書》 〈百官志〉에서 “尙書는 六曹로 되어 있고, 一曹에는 三主書가 있으므로, 따라서 令史는 18人이었다.”라 하였다.[盧文弨]
尙書省에 속한 하급관리이다.[역자]
역주16 監帥 : 監과 帥로서, 尙書省에 속한 하급관리이다. 《隋書》 〈百官志〉에 의하면 北齊에서는 尙書省 밑에 尙令局과 尙藥局을 설치하고 각각 監을 4인씩 두었다고 하며, 또 齋帥局을 설치하고 帥를 4인을 두었다고 한다. 顔之推가 北朝에 오래 있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北朝의 관직을 혼용해서 쓴 것이다.[庄辉明‧章义和]
역주17 籤省(첨성) : 籤은 籤帥를 말하고, 省은 省事를 일컫는다. 主書, 監, 帥의 아래이며, 명성과 지위가 낮고 미천하여 기록에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때때로 列傳에 나온다.[盧文弨]
《南史》 〈恩倖 呂文顯傳〉에서 “故事에 지방의 관청 내에서 일을 논하면 모두 서명을 하는데, 먼저 논한 일을 그대로 서술한 다음, 뒤에 날짜를 쓰고 밑에 또 어떤 직책에 누구라는 서명을 하였다. 그러므로 지방에서는 典籤을 두어서 이 일을 담당했다. 본래는 5품의 관리였으나 宋初에 士族의 벼슬로 바뀌었다.”라 하였다. 《唐六典》 29 ‘親王府典籤’ 아래의 原注에서 《齊職儀》를 인용하여, “諸公의 領兵局에는 典籤이 두 사람 있다.”라 하였다. 또 《齊書》 〈王敬則傳〉에서는 “州郡에 임하여 省事로 하여금 辭令을 읽게 하여 판결을 내렸는데, 모두 이치에 어긋남이 없었다.”라 하였고, 《資治通鑑》 154의 胡三省 注에서는 “省事는 아마 오늘날의 通事와 같은 것으로, 양편의 적이 서로 바라보고 있을 때 양쪽으로 왕래하며 말을 전하게 한다.”라 하였다.[王利器]
여러 藩王들을 수행하는 典籤과 省事로서 모두 하급관료이다.[역자]
역주18 吏用 : 관리의 업무, 즉 직무라는 뜻이다.[역자]
역주19 肅督 : 엄하게 감독하고 독려한다는 뜻이다.[역자]
역주20 委使 : 맡겨서 일을 시킨다는 뜻이다.[역자]
역주21 眼不能見其睫(첩) : 《史記》 〈越世家〉에서 “齊나라 使者가 말하기를 ‘참 운 좋게 越나라가 망하지 않았군요. 나는 이 계략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데, 눈이 털끝은 보면서도 그 속눈썹은 보지 못하는 것[目見豪毛而不見其睫]과 같기 때문입니다.’라 했다.” 하였다.[趙曦明]
《韓非子》 〈喩老〉에서 “杜子가 楚 莊王에게 간언하기를 ‘臣은 왕의 지혜가 눈과 같을까 걱정이거늘, 눈은 100보 바깥은 잘 볼 수 있으면서도 제 속눈썹은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라 하였다.” 하였다. 사용한 비유는 같지만 《韓非子》가 《史記》보다 먼저 나왔다.[王利器]
눈은 제 속눈썹을 볼 수는 없다. 즉 남의 결점은 잘 알면서 자신의 결점에는 어둡다는 뜻을 비유하였다.[역자]

안씨가훈(2)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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