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藏名
, 終蹈流沙;
, 卒辭
초楚재상相:此
之徒耳。
、
,
, 遞相誇尙,
, 皆以
신농씨農、
之化, 在乎己身,
之業, 棄之度外。
而
以黨
見誅, 觸
之網也;
以多笑人被疾, 陷
也;
, 背
之文也;
, 無
之鑒也;
喪妻, 神傷而卒, 非
之情也;
, 異
也;
, 豈
之流也;
以傾動
, 寧
之風也;
,
也;
, 違
也:
直取其淸談雅論, 剖玄析微, 賓主往復, 娛心悅耳, 非濟世成俗之要也。
於梁世, 玆風復
, 《
장자莊》、《
노자老》、《
주역周易》, 總謂
。
,
주홍정周弘正, 化行都邑, 學徒千餘, 實爲盛美。
在
間, 復所愛習, 召置學生, 親爲敎授, 廢寢忘食, 以夜繼朝, 至乃
愁憤, 輒以講自釋。
무릇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책은 대개 진성眞性을 보전保全하고 본성本性을 함양涵養하는 것이니 외물外物 때문에 자신에게 누累를 끼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노자老子는〉 이름을 감추고 조정관리朝廷官吏 노릇도 하였으나 끝내는 사막으로 들어가버렸으며, 〈장자莊子는〉 칠원漆園에서 종적을 감추고 살며 마침내 초楚나라의 재상宰相 직책을 사양하였으니, 이들은 멋대로 방종하는 무리일 따름이다.
하안何晏과 왕필王弼이 노장老莊을 본받아 전술傳述하자 마침내 서로 번갈아 크게 떠받들어 그림자가 〈형체마다〉 따라붙고, 풀들이 〈바람에 쏠려〉 한데로 쓰러지듯이 모두가 신농씨神農氏와 황제黃帝의 교화가 제 몸에 있다고 여길 뿐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학업은 포기하고 도외시하였다.
그러나 하안何晏은 조상曹爽과 같은 패가 되었다가 주살誅殺을 당하였으니 권력을 위해 죽는 그물망에 걸려든 것이며, 왕필王弼은 자주 남들을 비웃다가 미움을 받았으니 호승지벽好勝之癖의 함정에 빠진 것이며, 산도山濤는 재물을 축적하다 남들의 비난을 받았으니 많이 감추어둔다면 잃는 것도 〈그만큼〉 많다는 글〈의 교훈〉을 어긴 것이며, 하후현夏侯玄은 재능과 명망 때문에 살육을 당하였으니 뒤틀리고 혹이 불거진 것들 〈즉 무용지용無用之用의 가르침〉에 비추어보지를 못했던 것이며, 순찬荀粲은 아내가 죽자 비탄에 빠져 죽었으니 〈장자莊子가〉 동이를 두드리던 심정이 아니었으며, 왕연王衍은 죽은 아들을 애도함에 슬픔을 이길 수가 없었으니 동문오東門吳의 달관한 경지와 달랐으며, 혜강嵇康은 세속을 배척하다 화를 자초하였으니 어찌 〈도道의〉 광채를 거두어 머금은 채 세속과 함께하고자 하였던 〈노자老子의〉 부류였겠으며, 곽상郭象은 선망을 받자 권세를 오로지하였으니 어찌 제 몸을 〈낮추어〉 뒤에 두고 자신의 생사를 도외시한 기풍이 있었겠으며, 완적阮籍은 술에 취해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 있었으니 위태로운 길에서 서로가 조심을 시키라던 일깨움을 어긴 것이며, 사곤謝鯤은 장물臟物을 숨겼다가 관직에서 쫓겨났으니 〈먹고 남음직한〉 여분의 물고기조차 도로 놓아주었던 〈장자莊子의〉 무욕無慾을 어긴 것이다.
저들은 모두 사계斯界의 영수領袖로서, 노장老壯을 종지宗旨로 삼았다.
그 나머지 속세의 더러움에 속박되고 명리名利의 아래에 〈매여서〉 허우적거리던 이들에 대해 어찌 일일이 다 거론하겠는가.
그저 그들은 고상한 담론의 형식으로 허황된 이치를 탐색하느라 주인과 손이 서로 묻고 답하며 마음과 귀를 즐겁게 할 뿐이었으니, 세상을 구제하고 풍속을 바로잡을 요체要諦는 아니었던 것이다.
양대梁代에 이르자 이러한 풍조는 다시금 널리 퍼져서, 《장자莊子》, 《노자老子》, 《주역周易》을 아울러 ‘삼현三玄’이라 일컬었다.
양梁 무제武帝와 간문제簡文帝는 자신이 직접 이것을 강론하였으며, 주홍정周弘正이 군왕을 모시고 삼가 치국治國의 대도大道를 아뢰자 교화敎化가 도읍에 행하여지며 배우는 무리들이 천여 명에 이르렀으니 실로 성황을 이루었다.
원제元帝는 강릉江陵과 형주荊州에 출임出任해 있을 때 다시 즐겨 익혀오던 것을 학생들을 불러다놓고 직접 교수하느라 침식조차 잊고 밤을 꼬박 새웠는데, 극히 피곤해지거나 울분이 쌓이면 문득 강론을 하여 스스로 풀곤 하였다.
나는 그때마다 곧잘 말석에 참가하여 양梁 원제元帝의 강론講論을 직접 들었으나, 성품이 진작부터 미련하고 어리석어서 이 역시 좋아하지는 않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