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顔氏家訓(1)

안씨가훈(1)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안씨가훈(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3. 자식 교육의 成功과 失敗 - 王僧辯과 어떤 學士
위부인魏夫人, 性甚嚴正。
왕승변
분성時, 爲三千人將, 年踰四十, 少不如意, 猶捶撻之, 故能成其勳業。
時, 有一, 聰敏有才, 爲父所寵, 失於敎義, 一言之是, 徧於, 終年譽之;一行之非, 藏文飾, 冀其自改。
年登, 暴慢日滋, 竟以言語不擇, 爲抽腸
鼓云。


3. 자식 교육의 成功과 失敗 - 王僧辯과 어떤 學士
나라의〉 대사마大司馬 왕승변王僧辯의 어머니 위부인魏夫人은 성품이 매우 엄격하고도 단정하였다.
왕승변王僧辯분성湓城에 있을 때 휘하에 3천 명을 거느린 장수로서 나이가 마흔이 넘었건만 조금이라도 〈어머니의〉 뜻에 어긋나기만 하면 여전히 회초리를 들었으니, 이 때문에 그는 공훈을 이룰 수 있었다.
원제元帝 때의 어떤 학사學士는 총명하고 재주가 있어 아버지에게 총애를 받았으나 〈그 아버지는〉 올바른 도리를 가르치는 데에는 실패하였으니, 어쩌다 〈그의 자식이〉 옳은 말이라도 한마디 하면 낯선 사람들에게까지 두루 알리고 한 해가 다 가도록 자랑하다가, 어쩌다 〈그의 자식이〉 잘못을 저지르면 이를 감추고 변명해주면서 스스로 고치기만 바랐다.
결혼하고 벼슬할 나이가 되자 포악하고 교만함이 날로 심해져 마침내 말을 가리지 않고 내뱉다가 주적周逖에게 창자가 뽑히고 피가 북에 발라졌다고 한다.


역주
역주1 王大司馬 : 《梁書》 〈王僧辯傳〉에 “僧辯(?~555)은 자가 君才로 右衛將軍 神念의 아들이다. 世祖는 僧辯을 征東將軍, 開府儀同三司, 江州刺史로 삼았으며, 長寧縣公에 봉하였다.”고 하였다.[趙曦明]
錢大昕은 이에 대해 “僧辯에게 여전히 大司馬의 지위를 수여하였다.”는 등 몇 구가 더 있어야 했다고 주석하였으니 ‘大司馬’라는 글자가 누락되었음을 알 수 있다.[周法高]
王僧辯은 처음에는 北魏를 섬겼으나 梁나라에 귀순한 다음에는 湘東王 蕭繹의 左常侍 겸 司馬의 지위를 역임하였다. 후일 陳霸先(나중의 陳 武帝)과 함께 侯景의 난(548~552)을 진압하는 등 공을 세웠고 湘東王이 元帝로 즉위하자 侍中, 尙書令 등의 重臣으로 기용되었다. 그러나 元帝가 西魏의 침공으로 敗死한 후 王僧辯 역시 정변의 와중에서 陳霸先의 습격을 받아 피살되고 말았다.[역자]
역주2 湓(분)城 : 〈尋陽記〉에 “晉 武帝 太康 10년(289)에 江水의 이름에 근거하여 江州를 설치하였다. 成帝 咸和 원년(326)에는 湓城으로 옮겨 다스렸으니, 곧 지금의 湓城郡이 이곳이다.”라고 하였다.[趙曦明]
역주3 : 분
역주4 梁元帝 : 《梁書》 〈元帝紀〉에 “世祖 孝元皇帝의 諱는 繹(508~554)이며, 자는 世誠이고, 어렸을 때 자는 七符이니, 高祖의 일곱째 아들로 承聖 원년 겨울 11월 丙子일에 江陵에서 皇帝에 즉위하였다.”고 하였다.[趙曦明]
承聖은 552년 11월에서 555년 4월까지를 일컫던 梁 元帝의 연호이다. 元帝는 처음 湘東王으로 봉해져 江陵에 주둔하고 있을 때 侯景의 반란이 일어나자 王僧辯과 陳霸先 등을 파견하여 侯景을 토벌한 다음 江陵에서 帝位에 올랐으나 在位 3년 만에 西魏에 포로가 되고 피살되었다.[역자]
역주5 學士 : 官名이다. 南北朝 시기의 學士는 도서를 편찬하고 저술을 맡았다.[역자]
역주6 行路 : 漢‧魏‧南北朝 시대의 관용어로, 낯선 사람과 같은 말이다. 《文選》에 수록된 蘇子卿의 詩에서 “四海가 다 형제이니, 누가 行路人인가?”라 하였고, 《隋書》 〈李諤傳〉에서 “평생 친구로 교유하며 情이 마치 형제와 같았는데, 그의 죽음에 이르고 보니 아득함이 마치 낯선 사람[行路] 같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7 : 엄
역주8 婚宦 : 결혼하고 벼슬에 나아가다. 곧 成年이 되었음을 가리킨다.[역자]
역주9 周逖 : 그의 생애를 살필 수가 없다. 다만 《陳書》 〈周迪傳〉에 “梁 元帝는 周迪에게 持節通直散騎常侍와 壯武將軍, 高州刺史를 제수하고, 臨汝縣侯에 책봉하였다.”고 하였다.[盧文弨]
周逖과 周迪이 동일인인지 더 이상 확인하기는 어렵다.[역자]
역주10 釁(흔)鼓 : 《史記》 〈高祖本紀〉에 “북에 피를 발랐다.[釁鼓]”고 하였으며, 裴駰의 《史記集解》에 “應劭는 ‘釁이란 祭이다. 희생을 죽여 그 피를 북에 바르는 것을 釁이라 한다.’ 하였다.”고 하였다.[王利器]
역주11 : 흔

안씨가훈(1)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