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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氏家訓(1)

안씨가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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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江南의 文學(3) - 何遜, 何思澄, 何子朗
實爲淸巧, 多論者, 恨其每病苦辛, 饒貧寒氣, 不及也。
雖然, 유효작甚忌之, 平生誦하손詩, 常云:㦎不道車。”
又撰, 止取하손兩篇, 時人譏其不廣。
유효작劉孝綽當時旣有重名, 無所與讓, 唯服, 常以사조詩置几案間, 動靜輒諷味。
간문제簡文도연명陶淵明간문제, 亦復如此。
하손者, 하손하사징思澄하자랑子朗也。
하자랑子朗信饒淸巧。
하사징思澄여산廬山, 每有佳篇, 亦爲


22. 江南의 文學(3) - 何遜, 何思澄, 何子朗
하손何遜의 시는 실로 청교淸巧하고 형사形似의 표현이 많았지만, 양도揚都의 논자들은 그의 시가 늘 고생을 한탄하고 춥고 배고픈 기색이 넘쳐서, 유효작劉孝綽의 한가롭고 온화함에 미치지 못함을 아쉬워했다.
비록 그러하였으나 유효작劉孝綽하손何遜을 매우 싫어하여, 평생 그의 시를 읊을 적마다 늘 “거백옥蘧伯玉 수레 소리가 북궐에 울린다니, 삐그덕 삐그덕 무도한 수레로군.”이라 하였다.
또 《시원詩苑》을 편찬하면서 하손何遜의 시는 2편만 실어, 당시 사람들이 그의 속 좁음을 나무랐다.
유효작劉孝綽은 당시에 이미 명성이 높았기 때문에 〈시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았는데, 오로지 사조謝脁에게만은 굴복하여 늘 그의 시를 책상에 올려놓고 틈만 나면 읽고 음미하였다.
간문제簡文帝도연명陶淵明의 글을 애호한 것 역시 이와 같았다.
강남江南의 속담에 “에는 삼하三何가 있는데, 하자랑何子朗이 가장 낫다.”는 말이 있었다.
삼하三何하손何遜, 하사징何思澄, 하자랑何子朗이다.
하자랑何子朗청교淸巧한 표현이 참으로 풍부했다.
하사징何思澄여산廬山을 유람할 적마다 가작佳作을 지어냈는데, 역시 최고의 작품이었다.


역주
역주1 何遜詩 : 《梁書》 〈文學 何遜傳〉에서 “東海의 王僧孺가 그의 문장을 모아 文集 9권을 만들었다. 본디 何遜의 문장은 劉孝綽과 더불어 존중을 받아 세간에서 何劉라 불렀다. 世祖가 비평론을 지어 그들에 대해 ‘시가 많으면서 잘 지은 자는 沈約이요, 적으면서 잘 지은 이는 謝脁와 何遜이다.’라고 논했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2 形似之言 : 《文選》에 수록된 沈約의 〈宋書謝靈運傳論〉에서 “司馬相如는 형상을 흡사하게 그려내는 표현[形似之言]을 잘했고, 班彪와 班固는 抒情과 說理의 이야기[情理之說]를 잘했다.”라 하였고, 《詩品》 上에서 “張協은 형상을 흡사하게 묘사해내는 표현[形似之言]을 잘 엮어내었다.”라 하였다. ‘形似’란 오늘날의 形象이라는 말과 같다.[王利器]
역주3 揚都 : 여기서는 당시 南朝의 수도였던 建業을 가리킨다.[劉盼遂]
曹毗와 庾闡 모두 〈揚都賦〉를 지었고, 唐宋人들의 類書에 많이 인용되어 있는데, 모두 建業을 가리킨다.[王利器]
본서 제6 〈風操〉篇 3과 제8 〈勉學〉篇 15, 19에도 나온다.[역자]
역주4 劉孝綽 : 《梁書》 〈劉孝綽傳〉에서 “劉孝綽은 字가 孝綽이었고 名은 冉이며 彭城 사람이다. 7세에 글을 지을 줄 알았다. 齊나라 때 中書郞을 지낸 외삼촌 王融이 그를 몹시 칭찬하고 특별하게 여겨 늘 ‘천하의 문장은 내가 없다면 마땅히 阿士에게 부탁을 해야지.’라 하였다. 阿士는 劉孝綽의 小字이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5 雍容 : 한가하고 온화하다.[역자]
《文選》 〈聖主得賢臣頌〉에서 “가만히 손을 모으고 있다.[雍容垂拱]”라 했고, 呂延濟의 注에서 “雍容은 한가롭고 온화한 모양이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6 蘧車響北闕 㦎(획)㦎不道車 : ‘蘧車’는 본래 原文에 ‘蘧居’로 되어 있었던 것을, 孫志祖의 說에 따라 고쳤다. 孫志祖는 《讀書脞錄》 7에서 “蘧居의 ‘居’는 ‘車’의 誤字임이 분명한데, 아마 蘧伯玉의 故事를 쓴 것 같다. 何遜의 시 〈早朝車中聽望〉에서 ‘蘧伯玉의 수레 소리 北闕에 울리고, 鄭의 신발이 南宮으로 들어선다.[蘧車響北闕 鄭履入南宮]’로 나온다.”라고 했다. 孫志祖가 말한 蘧伯玉의 故事는, 《列女傳》 〈仁智〉에 나온다.[王利器]
‘㦎’은 《玉篇》에서 ‘어그러짐[乖戾]’이라 했다.[盧文弨]
이것은 劉孝綽이 何遜의 詩句를 인용하여 그를 비난한 말이다. 何遜의 시에 나오는 ‘蘧車’는 춘추시대 衛나라 대부였던 蘧伯玉의 수레를 가리키는데, 그는 밤에 수레를 타고 가다가 궁궐문 앞에 이르러서는 예의를 표하기 위해 수레에서 내려 걸어갔다는 이야기가 《列女傳》 〈仁智〉에 나온다. 劉孝綽은 이 故事를 反用하여 수레 소리가 삐걱거린다고 함으로써, 何遜의 詩를 혹평한 것이다.[역자]
역주7 : 획
역주8 詩苑 : 劉孝綽이 지었다는 이 책은, 아마도 漢代 이후 여러 시인들의 시만을 모아 만든 詩選集으로 추정되는데, 《隋書》 〈經籍志〉의 목록에도 수록되어 있지 않아 唐代에는 이미 亡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역자]
역주9 謝朓(조) : 《南齊書》 〈謝朓傳〉에서 “謝脁는 草書와 隷書를 잘 쓰고 五言詩에 능하여, 沈約이 늘 ‘200년 이래로 이런 시는 없었다.’라고 말했다.”라 하였다. 《梁書》 〈庾肩吾傳〉에서는 “梁 簡文帝가 湘東王에게 보낸 편지에서 ‘근래의 謝脁, 沈約의 시와 任昉, 陸倕의 산문은 실로 文章의 최고이고 글쓰기의 전범이다.’라고 했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10 : 조
역주11 梁有三何 子朗最多 : 《梁書》 〈文苑傳〉에서 “何思澄은 字가 元靜이고 東海 郯 사람이다. 젊어서 부지런히 배워 글을 잘 썼다. 南康王의 侍郞으로 벼슬을 시작하였고, 平南安成王의 行參軍 겸 記室로 전보되어 江州의 막부로 수행하였다가 〈遊廬山詩〉를 지었는데, 沈約이 이를 보더니 자신은 이에 미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廷尉正에 제수되었다.…세상을 떠나며 文集 15권을 남겼다. 애초에 何思澄은 종친인 何遜, 何子朗과 함께 文名을 떨쳤는데, 당시 사람들은 ‘東海의 세 何氏들 중 子朗이 가장 뛰어나다.’라고 하였다. 何思澄은 그 이야기를 듣더니 ‘이 말은 잘못되었소. 만약에 그렇다면 〈으뜸의 지위는〉 何遜에게로 돌려야지요.’라고 하였는데, 그 속뜻은 자신이 으뜸이라는 것이었다. 何子朗은 字가 世明으로 일찍부터 재간이 있었으며 淸談을 잘했다.…固山令이 되었다가 죽었는데, 나이가 스물넷이었다. 당시 그의 文集이 세간에 유행하였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12 冠絶 : 당시 최고라서 필적할 작품이 없다는 뜻이다.[王利器]

안씨가훈(1)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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