於時, 城內四萬
人, 王公朝士, 不下一百, 便是恃
양간侃一人安之, 其相去如此。
후경侯景이 막 건업建業에 들어왔을 때 궁궐 문은 비록 닫혀 있었지만 민관民官이 혼란에 빠져서 다들 어찌할 바를 몰랐다.
태자좌위수太子左衛率이었던 양간羊侃은 동액문東掖門을 지키며 인원을 나누어 배치하고 공격에 대처하였는데, 하루 밤새에 모든 준비를 다 해내어 결국 백여 일 동안 흉적들에 대항할 수 있었다.
이때 성안에 있던 4만여 명쯤의 민간인과 적어도 100명이 넘는 왕공王公들과 조정의 신하들이 바로 양간羊侃 한 사람에 의지하여 버틸 수가 있었으니, 그 〈능력의〉 차이가 이와 같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소보巢父와 허유許由는 천하天下를 사양하였건만, 저자거리의 소인들은 한 푼의 이익을 다툰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