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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氏家訓(2)

안씨가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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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씨보다는 人品
2. 글씨보다는 인품人品
, 擧世惟知其書, 翻以能自蔽也。
왕일소王逸少(왕희지王羲之)는 풍류 있는 재사才士였고 성품이 시원시원한 명인名人이었건만, 세상에서는 오직 그의 글씨만 알아주었으니, 글씨 잘 쓰는 것 때문에 도리어 〈그의 식견과 인품이〉 가려지고 말았다.
소자운蕭子雲은 늘 탄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제서齊書》를 지어 하나의 전범典範을 엮어내었는데, 문장의 광대한 뜻이 스스로도 볼 만하다 하겠건만, 오직 필적으로만 명성을 얻었으니 또한 이상한 일이로다.”
淸華, 才學優敏, 後雖入關, 亦被禮遇。
왕포王褒는 집안의 문벌이 높고 재주와 학식이 뛰어나서, 뒤에 비록 〈포로가 되어〉 관중關中으로 들어갔지만 그곳에서도 예우를 받았다.
猶以書工, 崎嶇之間, 辛苦筆硯之役, 嘗悔恨曰:“假使吾不知書, 可不至今日邪!”
그러나 여전히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비석碑石들 사이에서 고생하며 글씨 쓰느라 힘들었는데, 일찍이 후회하며 이렇게 한탄한 적이 있다. “만약 내가 글씨 쓸 줄을 몰랐다면, 오늘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겠지!”
以此觀之, 愼勿
이런 일들로 볼 것 같으면, 절대로 글씨를 가지고 자부해서는 안 된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비천한 사람들 중에는 글씨 잘 쓰는 것으로 발탁된 이들이 많다. 그러니 가 같지 않으면 더불어 일을 꾀하지 않는 법이다.
역주
역주1 王逸少風流才士 蕭散名人 : 《晉書》 〈王羲之傳〉에서 “王羲之는 字가 逸少이다. 어릴 적에 말을 더듬었는데, 장성해서는 말도 잘하고 성품이 곧고 꿋꿋하다는 평이 있었다. 특히 隷書를 잘해 古今의 으뜸이 되었다. 논자들은 그의 筆勢를 칭송하여, 나부낌은 마치 뜬 구름 같고 꼿꼿함은 마치 놀란 용과 같다고 한다.”라 하였다. 생각건대, 逸少는 人品이 매우 높고 원대한 식견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이를 풍류 있고 시원시원하다[風流蕭散]는 것으로 지목한다는 것도 심히 천박한 일이다.[趙曦明]
朱熹가 王羲之를 논한 것도 그 취지가 이와 같다.[郝懿行]
蕭散은 조용하고 한가롭다는 말인데, 여기서는 성품이 간결하고 거리낌이 없다는 뜻으로 쓰였다.[역자]
역주2 吾著齊書……唯以筆跡得名 : 《梁書》 〈蕭子恪(각)傳〉에서 “蕭子恪의 여덟 번째 동생 子顯은 《齊書》 60권을 지었다.”라 하였고, 또 “子雲은 字가 景喬이고 蕭子恪의 아홉 번째 동생이다. 草書와 隷書를 잘 써서 세상의 모범이 되었다. 스스로 鍾繇(요)와 王羲之를 열심히 모방하면서 글씨체를 약간 변화시켰다고 했다. 高祖가 그의 글씨를 논하여 ‘筆力은 힘차고 손과 마음이 상응하며, 교묘하기는 杜度를 넘어서고 아름답기는 崔寔(식)을 능가하였으니, 마땅히 鍾繇과 나란히 달리며 앞을 다툰다고 하겠다.’라고 할 만큼 인정을 받았다. 《晉書》 110권을 지었다.”라 했다.[趙曦明]
역주3 王褒(포)地冑(주)淸華……可不至今日邪 : 《周書》 〈王褒傳〉에서 “王褒는 字가 子淵이고 琅邪 臨沂(기) 사람이다. 조부 王儉으로부터 부친 王規에 이르기까지 모두 江南에서는 이름이 높았다. 王褒는 학식과 도량에 있어 깊이와 통찰력이 있었고, 마음이 차분하고 조용하였으며 역사의 기록들을 두루 읽었는데, 특히 글을 잘 지었다. 梁의 國子祭酒 蕭子雲이 그의 고모부로서, 草書와 隷書를 특히 잘 썼다. 王褒는 결국 그를 모범으로 삼아 書藝 분야에서 명성이 蕭子雲에 버금갔으며, 나란히 세상에서 존중을 받았다. 江陵城이 함락되고 元帝가 항복을 하자, 王褒는 王克 등 수십 명과 함께 長安으로 갔다. 太祖는 王褒와 王克에게 말하기를 ‘나는 王氏의 외손자이고 그대들은 모두 나의 외삼촌뻘이므로, 마땅히 친척의 마음으로 대할 것이니, 고향을 떠났다고 개의치 마시오.’라고 했다. 모두 車騎大將軍‧儀同三司에 제수되어 다들 은혜를 받았다. 世宗은 文學을 무척 애호하였고, 王褒는 庾信과 더불어 재능과 명성이 모두 높아 특히 가까이하였는데, 수레를 타고 행차할 때 王褒가 늘 수행하였다.”라 하였다.[趙曦明]
《北史》 〈儒林 趙文深傳〉에서는 “江陵이 함락된 후 王褒가 關中으로 들어가자, 귀족들은 다들 한결같이 王褒의 글씨를 배웠고, 趙文深의 글씨는 멀리 내쳐졌다. 趙文深은 부끄럽고 원통한 기색이 말과 표정에 나타났다. 뒤에 사람들의 취향은 어찌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서, 그도 글씨체를 고치려고 王褒의 글씨를 익혔지만, 끝내 이룬 것은 없고 도리어 ‘邯鄲學步’라는 비난만 받게 되었다.”라 하였다.(《太平御覽》 749에 인용된 《三國典略》에도 나온다.) 이 역시 王褒가 北周에 들어간 후 글씨로 세상에서 존중을 받은 일이다.[王利器]
역주4 地冑(주) : 盧思道의 〈勞生論〉에서 “집안의 문벌[地冑]이 높고 빛났다.”라 하였다. 《資治通鑑》 110 胡三省의 注에서 “地는 문벌[門]을 말한다.”라고 했다.[王利器]
역주5 碑碣(갈) : 《後漢書》 〈竇憲傳〉의 注에서 “네모난 것을 碑라 하고, 둥근 것을 碣이라 한다.”라 하였다.[王利器]
비석을 말한다.[역자]
역주6 以書自命 : 字劃은 반드시 모양이 분명하고 바르게 써야지 잘 쓰려고 해서는 안 되는데, 이렇게 해야 공경을 받는다. 顔之推의 수백 마디의 말 중에 어디 드러내려고 한 것이 있었던가![朱軾]
글씨로 자부하다. 自命은 自負 혹은 自處한다는 뜻이다.[역자]
역주7 廝猥(시외)之人 以能書拔擢者多矣 : 《北齊書》 〈張景仁傳〉에서 “張景仁이란 사람은 濟北 사람이다. 어릴 때 부친을 여의고 집안이 가난했는데, 글씨 배우는 일을 業으로 삼아 마침내 草書와 隷書를 잘 쓰게 되었다. 뽑혀서 書生의 자리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魏郡의 姚元標, 潁(영)川의 韓毅와 袁買奴, 滎(형)陽의 李超 등과 이름을 나란히 했다. 世宗이 모두 끌어들여 賓客으로 삼았다.……蒼頡 이래로 八體의 書法으로 벼슬을 얻고 승진한 이는 한 사람뿐이었다.”라 하였다. 顔之推가 이른바 ‘비천한 사람으로 글씨를 잘 써서 발탁된 자’라고 한 것은, 아마도 張景仁 같은 부류들을 가리킬 것이다.[王利器]
廝猥는 ‘비천하다, 천박하다’는 뜻이다.[역자]
역주8 道不同 不相爲謀 : 이 말은 《論語》 〈衛靈公〉에 나오는 문장이다.[王利器]

안씨가훈(2)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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