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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氏家訓(1)

안씨가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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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잘못된 訓育의 비극 - 琅邪王
낭야왕, 太子母弟也。
生而聰慧, 무성제及后竝篤愛之, 衣服飮食, 與東宮相準。
帝每面稱之曰, “此黠兒也, 。”
, , , 不與諸낭야왕等, 太后猶謂不足, 常以爲言。
年十歲, 驕恣無節, , 必擬
嘗朝남전南殿, 見進新冰, 獻早李, 還索不得, 遂大怒,
曰:“至尊已有, 我何意無?”
不知, 率皆如此, 識者多有之譏。
, 又懼有救, 乃勒麾下軍士, , , 受勞而罷, 後竟坐此幽薨。


5. 잘못된 訓育의 비극 - 琅邪王
북제北齊 무성제武成帝의 아들 낭야왕琅邪王태자太子와 한 배에서 난 아우였다.
나면서부터 총명하였으므로 무성제武成帝황후皇后가 함께 그를 몹시 친애하여 의복이며 음식을 태자와 똑같이 해주었다.
황제는 매번 그의 면전에서 칭찬하기를 “요 똑똑한 녀석, 꼭 큰일을 이룰 것이다.”라고 하였다.
태자가 즉위하게 되자 낭야왕琅邪王별궁別宮에 거처하였는데 예우가 분수에 넘쳐서 다른 여러 왕들과 대우가 달랐음에도 태후太后는 오히려 〈예우가〉 부족하다고 여겨서 늘 이를 이야깃거리로 삼았다.
나이가 열 살 남짓 되면서는 교만방자하기 이를 데 없어져 기물이며 의복이나 기호품을 반드시 황제를 따라 같이 하였다.
언젠가 남전南殿에서 황제를 뵐 때 황실의 주방을 맡던 관리가 막 꺼낸 얼음을 진상하고, 과수원을 맡던 관리가 철 이른 오얏을 헌상하는 것을 보고서 낭야왕琅邪王이 집에 돌아와 이를 찾다가 얻지를 못하자, 마침내 크게 화를 내며 꾸짖기를 “황상皇上은 이미 가졌는데, 내게는 어찌하여 없는가?”라고 하였다.
분수를 모르기가 대개 이 지경이었으므로 식견 있는 이들은 춘추시기의 숙단叔段주우州吁에 비겨 낭야왕琅邪王을 비난하였다.
나중에는 재상을 미워하다가 조칙을 멋대로 고쳐 그를 참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를 구원하려는 세력이 있을까 두려워 휘하의 군사를 지휘하여 궁궐문을 지키게까지 하였는데, 어차피 반란을 일으키려는 의도는 없었으므로 황제의 위로를 받자 곧 군사를 물렸으나, 나중에는 마침내 이 일에 연루되어 유폐된 채 죽임을 당하였다.


역주
역주1 齊武成帝 : 《北齊書》 〈武成紀〉에 “世祖 武成皇帝(561~564 在位)의 諱는 湛으로, 神武皇帝의 아홉째 아들이다.”라고 하였다.[趙曦明]
여기서 齊는 北齊를 말한다. 東魏 武定 8년(550) 高洋이 東魏 孝靜帝를 폐하고 자립하여 국호를 齊라 하였는데 史書에서는 北齊라고 칭한다. 幼主 承光 元年(577)에 北周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역자]
역주2 琅邪(야)王 : 北齊 武成帝의 열세 아들 중 셋째인 高儼(558~571)이다.[역자]
역주3 : 야
역주4 當有所成 : 《北齊書》 〈琅邪王儼傳〉에 “황제가 늘 ‘요 똑똑한 녀석, 꼭 큰일을 이룰 것이다[當有所成]’라고 말하였으니, 後主를 열등하다고 여겨 폐위시킬 뜻을 품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王利器]
역주5 太子卽位 : 《北齊書》 〈後主紀〉에 “後主 緯는 자가 仁綱으로, 太寧 2년(562)에 皇太子로 옹립되었다.”라고 하였다.[趙曦明]
역주6 王居別宮 : 《北齊書》 〈琅邪王儼傳〉에 “高儼은 항상 궁중에 있으면서 含光殿에 앉아 업무를 보았다. 和士開와 穆提婆는 이를 꺼려 武平 2년(571)에 高儼을 北宮으로 내쫓았다.”라고 하였다.[趙曦明]
역주7 禮數 : 예전에는 ‘禮’를 ‘數’라고도 하였다. 《詩經》 〈小雅 我行其野〉의 ‘序’에 보이는바 “아내를 맞아들이는 禮[數]가 바르지 않음을 풍자한 것이다.”라는 鄭玄의 주석에서 ‘數’는 곧 ‘禮’의 뜻이라고 하였다.[王利器]
역주8 優僭 : 禮遇가 분수에 넘침에도 꺼리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王利器]
역주9 : 六朝人은 숫자를 말할 때 모두 그 아래에 ‘許’를 붙여 말하였으니, 이는 모두 불확정적인 표현으로, 지금의 ‘左右’에 해당하는 말이다.[王利器]
역주10 器服玩好 : 《北齊書》 〈琅邪王儼傳〉에 “高儼은 기물과 의복, 기호품이 모두 後主와 같았다.”라고 하였다.[王利器]
역주11 乘輿 : 天子. 天子는 지존한 이여서 감히 무람없이 말하지 못하였으므로 ‘乘輿’라고 말한 것이다. ‘乘’은 ‘載’와 뜻이 같으며, ‘輿’는 ‘車’와 뜻이 같다.[趙曦明]
역주12 典御 : 《隋書》 〈百官志〉에 “中尙食局에는 典御가 2명으로, 수라에 관한 일을 도맡아 본다.”라고 하였다.[趙曦明]
역주13 鉤盾 : 《隋書》 〈百官志〉에 “司農寺는 倉市와 薪菜, 園池와 果實을 관장하며 平準, 太倉, 鉤盾 등 관서의 令과 丞을 통괄한다. 鉤盾은 또한 따로 大囿와 上林, 遊獵, 柴草, 池藪, 苜蓿 등 6부의 丞을 거느린다.”라고 하였다.[趙曦明]
역주14 訽(구) : 明代 萬曆 연간의 ‘顔嗣愼刊本’의 주석에 “訽는 詬와 같다. 怒의 뜻이며, 詈의 뜻이다.”라고 하였다.[王利器]
역주15 : 구
역주16 分齊 : 分際이다.[洪業] 분수와 같은 뜻이다.[역자]
역주17 叔段 : 公叔段을 가리킨다. 春秋 시기 鄭 武公의 아들로 莊公과는 한 배에서 태어난 아우이다. 그의 어머니 武姜이 맏이 莊公을 낳으며 난산을 겪었으나, 둘째 叔段을 낳으면서는 순산을 하였던 까닭으로, 叔段은 좋아하되 莊公은 싫어하였다. 莊公이 즉위한 이후에도 叔段은 어머니 武姜과 결탁하고 자신의 세력을 키워 莊公을 습격할 기회를 노리므로 莊公이 마침내 그를 토벌하여 共國으로 달아나게 하였다. 그래서 共叔段으로 불리기도 한다. 《春秋左氏傳》 隱公 元年條에 보인다.[역자]
역주18 州吁 : 春秋 시기 衛 莊公의 아들로 桓公의 배 다른 아우이다. 그의 형 桓公을 시해하고 즉위하였으나, 재위 1년도 안 되어 그 역시 신하들에게 시해되었다. 《春秋左氏傳》 隱公 3년조에 보인다.[역자]
역주19 後嫌宰相 遂矯詔斬之 : 《北齊書》 〈琅邪王儼傳〉에 “高儼은 和士開와 穆提婆 등이 사치스러워 주택을 너무 화려하게 꾸민 것이 몹시 못마땅하여 侍中 馮子琮에게 ‘和士開는 罪가 엄중하니, 내가 그를 죽이겠다.’라고 말하였다.”고 하였다.[趙曦明]
역주20 防守殿門 : 《北齊書》 〈琅邪王儼傳〉에 “高儼은 京畿 지역의 軍士 3천여 명을 이끌고 千秋門에 주둔하였다.”라고 하였다.[趙曦明]
역주21 旣無反心 : 《北齊書》 〈琅邪王儼傳〉에 “황제가 宿衛軍에게 갑옷을 내려주고 장차 출전하려 하다가, 斛(곡)律光이 ‘폐하께서 직접 千秋門에 이르시는 것이 옳으실 테니, 琅邪王이 감히 움직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므로 이를 따랐다. 斛律光이 高儼의 손을 억지로 끌고 앞으로 나아가 황제에게 청하기를 ‘琅邪王은 나이가 어립니다. 장성한 다음에는 그러지 않을 것이니 그 죄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므로, 한참 있다가 그를 석방하였다.”라고 하였다.[趙曦明]

안씨가훈(1)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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