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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氏家訓(2)

안씨가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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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약한 南朝 士大夫
梁世士大夫, 皆尙, , 出則車輿, 入則扶侍, 郊郭之內, 無乘馬者。
所愛, 給一, 常之, 擧朝以爲
至乃尙書郎乘馬, 則之。
, 不耐寒暑, 坐死倉猝者, 往往而然。
, 性旣, 未嘗乘騎, 見馬, 莫不震懾,
乃謂人曰:“正是虎, 何故名爲馬乎?” 其風俗至此。


3. 유약한 남조南朝 사대부士大夫
양대梁代사대부士大夫들은 모두 너른 옷자락에 넓은 허리띠를 두르고 커다란 을 쓰고 굽 높은 신발 신고 다니기를 좋아하였고, 나가면 수레를 타고 다니고 들어오면 시중을 받았으니, 교외 성곽 안에는 말 타는 이가 없었다.
주홍정周弘正선성왕宣城王의 총애를 받아 〈선성왕이〉 과하마果下馬 한 마리를 선사하자 늘 타고 다녔는데, 조정에서 다들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군다고 여겼다.
심지어 상서랑尙書郞이 말을 탔다가 죄를 물어 탄핵되는 일까지 있었다.
후경侯景의 난이 일어나자 〈사대부들은〉 피부가 무르고 뼈가 부드러워 보행步行을 감당하지 못하고, 몸이 허약하고 기운이 없어 추위와 더위를 견디지 못해서, 창졸간에 앉은 채로 죽는 이들이 왕왕 있었다.
건강령建康令이었던 왕복王復은 성품이 점잖은 데에다 일찍이 말을 타본 적이 없어서, 말이 울며 숨을 내뿜고 마구 날뛰는 것을 보면 깜짝 놀라 벌벌 떨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고서 남들에게 말하기를 “정녕 범이거늘 무슨 까닭에 말이라고 부르오?”라 했으니, 그 풍속風俗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역주
역주1 褒衣博帶 : 《漢書》 〈雋不疑傳〉에서 “暴勝之가 청하여 서로 만나게 되었는데, 雋不疑는 褒衣博帶를 했다.”라 하였고, 注에서 “소맷자락이 너르고 큰 옷을 입고 넓은 허리띠를 둘렀다는 말이다.”라고 했다.[盧文弨]
역주2 大冠高履(리) : 《後漢書》 〈光武帝紀〉에서 “光武帝는 진홍색 옷에 大冠을 썼다.”라 했다. 생각건대, 高履는 굽이 높은 나막신[高齒屐]과 같다.[盧文弨]
高齒屐은 본서 제8 〈勉學〉편 2에도 나온다.[王利器]
커다란 冠과 높은 신발을 말한다.[역자]
역주3 周弘正 : 본서 제8 〈勉學〉편 10 주 15) 참조.[역자]
역주4 宣城王 : 《梁書》 〈哀太子大器傳〉에서 “太宗의 嫡長子로서 中大通 3년에 宣城郡王에 봉해졌다.”라 하였다.[盧文弨]
梁 簡文帝 蕭綱의 큰 아들 蕭大器를 가리킨다.[역자]
역주5 果下馬 : 《魏志》 〈東夷傳〉에서 “濊(예)나라에서 果下馬가 나오는데, 漢 桓帝 때에 바쳤다.”라 하였고, 注에서 “果下馬는 키가 석 자로, 이 말을 타고 과일나무 아래를 지나갈 수 있어서 果下馬라고 부르며, 《博物志》와 〈魏都賦〉에 나온다.”라 하였다.[趙曦明]
《漢書》 〈霍光傳〉에 “召皇后께서 작은 마차를 어거하셨다.”라 하였고, 注에서 張晏의 말을 인용하여 “漢 왕실의 마구간에는 果下馬가 있었는데 키가 석 자이고 輦을 끌었다.”라 하고, 또 顔師古의 말을 인용하여 “말을 과일나무 밑에서 탈 수가 있어, 果下馬라 불렀다.”라고 했다. 《北史》 〈尉景傳〉에서는 “이에 앞서 尉景에게 果下馬가 있었는데, 文襄이 자기에게 달라고 하자 주지 않고, ‘흙은 서로 떠받쳐야 담이 되고 사람도 서로 떠받쳐야 왕이 되는 법이오. 말 한 마리라도 자기가 기르겠다고 해서 남에게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는 법이오.’라고 했다.” 하였다. 따라서 果下馬는 당시에 진귀한 것으로 간주되었다고 하겠다. 또 《述異記》에 “南郡에서 果下牛가 나오는데 키가 석 자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소에도 이런 종류가 있었던 것인데, 모두 그 왜소함을 말하는 것이다.[王利器]
키가 몹시 작은 조랑말의 일종이다.[역자]
역주6 服御 : 말을 타고 부리다. 服馭와 같다.[역자]
역주7 放達 : 마음이 활달하여 멋대로 하고 남의 구속을 받지 않다.[역자]
역주8 糾劾(규핵) : 罪狀을 파헤쳐서 꾸짖다. 糾彈하다.[역자]
역주9 及侯景之亂……坐死倉猝者 : 《資治通鑑》 192에서 “梁 武帝와 신하들은 이 세상이 苦이고 虛하다는 이야기만 했는데, 侯景의 난이 일어나자 백관들이 말을 탈 줄도 몰랐다.”라고 했고, 胡三省의 注에서 “이야기 화제가 오직 苦行과 空寂뿐이었다는 말이다.”라 했다.[王利器]
역주10 體羸(리)氣弱 : 몸이 약하고 기운이 없다. 羸는 야위고 약하다는 뜻이다.[역자]
역주11 建康 : 《通典》 〈州郡〉 12에서 “丹陽郡의 江寧은 본래 이름이 金陵이며, 吳나라 때 建業이 되었고, 晉나라 때 愍帝의 諱를 피하여 建康으로 고쳤다.”라고 하였다.[盧文弨]
지금의 南京으로 당시 南朝의 수도이다.[역자]
역주12 王復 : 宋本의 原注에 “어떤 판본에는 ‘建康令王復’ 이하의 한 단락이 빠져있다.”라 하였는데, 宋本을 제외한 대부분의 판본에는 이 단락이 없다.[王利器]
王復이란 인물은 未詳이다. 《南史》 〈賊臣傳〉과 《北史》 〈庾信傳〉에 의하면, 侯景의 亂이 일어났을 때 建康令으로 있던 인물은 〈哀江南賦〉의 작가로 유명한 庾信(513~581)이었다. 侯景의 叛軍이 建康을 공격할 때 그는 궁중의 文武 천여 명을 이끌고서 朱雀航에 주둔하여 적을 막도록 명을 받았으나, 적의 병사들이 모두 鐵面한 것을 보고서 먼저 군사를 내버리고 달아났다고 한다. 梁나라는 결국 建康의 臺城이 함락되고 武帝와 簡文帝가 차례로 죽음을 맞이하였으며, 이후 국력이 급속히 쇠퇴하면서 亡國의 길로 내닫게 되었다.[역자]
역주13 儒雅 : 점잖고 우아하다.[역자]
역주14 嘶歕(시분)陸梁 : 陸梁은 뛰어오른다[跳躍]는 뜻이다.[盧文弨]
《穆天子傳》 5에서 “黃의 연못에서 그 말은 모래를 내뿜었고[歕沙], ……黃의 늪에서 그 말은 옥을 내뿜었다.[歕玉]”라 하였다. 《說文解字》 欠部에서 “歕은 공기를 불어내는 것이다.”라 하였는데, 지금은 ‘噴’으로 쓴다. 《文選》에 수록된 〈西京賦〉의 “괴이한 짐승들이 마구 날뛴다.[陸梁]”에 대해, 薛綜은 “동서로 배회하는 것[東西倡佯]”이라 했고, 劉良은 “달리는 모양[行走貌]”이라고 했다.[王利器]
말이 울고 숨을 내뿜으며 마구 날뛴다. 陸梁은 어지럽게 날뛰고 달아나는 모양이다.[역자]

안씨가훈(2)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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