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顔氏家訓(2)

안씨가훈(2)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안씨가훈(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3. 王羲之體의 영향력
以來, 吾見眞草多矣,
家中嘗得十卷, 方知諸書, 莫不得羲之之體, 故是書之淵源。
蕭晩節所變, 乃是


3. 왕희지체王羲之體의 영향력
나라 왕실 비각祕閣서화書畫들이 흩어져 없어진 이후에도 나는 이왕二王(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의 해서楷書초서草書 글씨들을 많이 보았는데,
일찍이 집에서 〈이왕二王의 글씨〉 10권을 찾아내고서, 비로소 도홍경陶弘景완연阮硏, 그리고 소자운蕭子雲의 글씨가 모두 왕희지王羲之의 서체에서 터득한 것이며, 그래서 〈왕희지체王羲之體가〉 이 글씨들의 연원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소자운蕭子雲이 만년에 바꾸었던 글씨체도 바로 왕희지王羲之 젊은 시절의 필법筆法이었다.


역주
역주1 梁氏祕閣散逸 : 祕閣은 內府와 같다. 《歷代名畫記》 1에서 “梁 武帝는 귀하고 별난 것들을 더 보태려고 거듭 찾아 모았다. 元帝는 평소에 재주와 기예가 있는 데에다 스스로도 그림을 잘 그렸는데, 옛날의 진기한 것들이 궁정 서고에 가득하였다. 侯景의 난이 일어나자 太子 蕭綱은 秦始皇이 또다시 천하의 책들을 불태우려 하는 꿈을 꾸었다. 그러고 나서 궁정 서고의 책과 그림 수백 상자가 侯景에 의해 불탔다. 侯景의 난이 평정되자 가지고 있던 그림들을 모두 수레에 실어 江陵으로 가져갔는데, 西魏의 장수 于謹에 의해 江陵이 함락되어 元帝가 항복을 하게 되자, 名畫와 法書 및 典籍 24만 권을 모아 後閤舍人 高善寶에게 보내어 불태우게 하였다. 元帝는 불 속에 몸을 던져 함께 분신하려고 하였지만 궁녀들이 그의 옷을 붙잡아 죽음을 면하였다. 吳‧越의 보검들도 모두 기둥에 쳐서 분지르고서, ‘蕭氏의 시대가 마침내 여기에 이르고 말았구나! 儒敎의 올바른 도리가 오늘 밤으로 끝이 났구나.’라고 한탄했다. 于謹 등은 타다 남은 불씨 안에서 책과 그림 4천 여 두루마리를 수습해서 長安으로 가져갔다. 그래서 顔之推는 〈觀我生賦〉에서 ‘백성은 100만 명이 포로가 되었고, 책과 역사기록 1천 수레 분량이 연기로 날아갔다.’라고 했다. 역사가 기록된 이후로 이런 일은 없었다. 하늘 아래 온 세상의 문화가 다 상실되고 말았다.”라 하였다. 顔之推가 “梁나라 왕실 祕閣의 書畫들이 흩어져 없어졌다.[梁氏祕閣散逸]”라고 한 것은 분명 이 일을 가리키는 것이다.[王利器]
祕閣은 중요한 문서나 도서를 보관하는 궁정의 창고인데, 여기서는 여기에 보관하고 있던 書畫 등을 가리킨다.[역자]
역주2 二王 : 王羲之와 그의 아들 王獻之를 가리킨다. 《晉書》 〈王羲之傳〉에서 “王獻之는 字가 子敬이다. 7, 8세 무렵에 글씨를 배웠는데, 羲之가 몰래 뒤에서 그의 붓을 잡아당겼지만 붓을 뺏을 수 없자, 감탄하며 말하기를 ‘이 아이는 뒤에 또 큰 명성을 얻을 것이오.’라 하였다. 일찍이 벽에다가 넓이가 1丈이 되는 큰 글씨를 쓴 적이 있는데, 羲之가 아주 잘 썼다고 여겼다. 그것을 구경한 이가 수백 명이었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3 陶隱居 : 《法書要錄》 1과 《道藏》 〈茅山志 1〉에는 梁 武帝와 陶隱居의 書啓들 중 王羲之의 것에 들어 있는 것이 몇 통 수록되어 있다. 陶隱居는 또 華陽眞逸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그가 쓴 〈瘞(예)鶴銘〉을 어떤 이들은 王羲之의 글씨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역시 陶隱居가 王羲之體를 터득하였음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가 된다. 자세한 것은 王觀國의 《學林》 7 참조.[王利器]
梁代 사람 陶弘景을 가리킨다. 본서 제15 〈養生〉편 1 주 22) 참조.[역자]
역주4 阮交州 : 張懷瓘의 《書斷》 中에서 “梁代의 阮硏은 字가 文幾이고 陳留 사람이다. 벼슬은 交州刺史까지 올랐다. 글씨를 잘 썼는데, 그의 行書와 草書는 王獻之에게서 나왔고 隷書는 鍾繇의 體를 익혔다. 行書와 草書는 入妙의 경지였고, 隷書는 入能의 수준이었다.”라 하고, 또 陶弘景을 언급하여 “당시에 蕭子雲과 阮硏과 더불어 각각 王羲之의 한 가지 體를 터득하였다는 평이 있었다.”라고 한 것은, 《顔氏家訓》에 근거한 것이다.[嚴式誨]
陳思의 《書小史》 7에서 “阮硏은 字가 文磯이고 陳留 사람이다. 벼슬은 交州刺史까지 올랐다. 글씨를 잘 썼는데, 그의 行書와 草書는 王羲之에게서 나왔지만 정교하고 능숙함은 더욱 뛰어났다. 그 筆勢는 솟아오르는 샘물 줄기가 교차하여 물을 대듯, 쉬지 않고 앞다투어 달려가는 것 같았다. 張懷瑾이 말하기를 ‘阮硏은 蕭子雲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는데, 당시 蕭子雲과 阮硏 등이 각기 王羲之의 필체를 한 가지씩 터득하였다는 평이 있었다.’라고 하였는데, 이 사람의 근력이 가장 뛰어났다. 용기에 견주자면 갑옷을 입고 병기를 든 것과 같아서, 향하는 곳에 대적할 자가 없었다. 담론으로 논하자면 늘어진 뺨에 우적우적 씹는 어투로 천천히 말을 하며, 궤변 같은 억지를 부리기도 한다. 李信이나 王離의 공격에도 子貢이나 魯連의 변통은 없으니, 힘은 陶弘景을 넘어서고 씩씩함은 蕭子雲을 뒤덮는다고 할 만하다. 그의 隷書는 鍾繇의 書體를 익혔으나 風致는 좀 약한 데가 있다. 庾肩吾가 말하기를 ‘阮硏은 오늘에 살면서도 옛날을 바라보고, 온갖 오묘한 세계에 들어가 빠짐없이 살펴보았으며, 비록 王羲之를 스승으로 삼고 鍾繇를 祖述했다고 하지만, 결국 또 다른 하나의 書法을 이루었으니, 역시 터득한 바가 있었다.’라고 하였다.” 하였다.[王利器]
역주5 蕭祭(좨)酒 : 蕭子雲을 말한다. 《梁書》 〈蕭子雲傳〉에서 “大同 2년 員外散騎常侍 國子祭酒로 전보되었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6 右軍年少時法也 : 王羲之의 벼슬이 右軍將軍이었다.[趙曦明]
이 글에 따르면 王羲之의 書法은 ‘젊은 시절의 書法’과 ‘眞草’의 구분이 있었다. 《太平御覽》 666에 인용된 《太平經》에서 “郗愔(치음)은 字가 方回이고 高平 金鄕 사람으로, 晉의 鎭軍將軍이 되었다. 마음속으로 道敎의 法術을 숭상하여 몰래 스스로 좇아서 행하였다. 隷書를 잘 썼는데 王羲之와 비견했다. 손으로 직접 《道經》을 쓰기 시작하여 거의 100卷을 채웠으며,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이 많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른바 ‘王羲之 젊은 시절의 筆法[右軍年少時法]’이란 아마도 時俗에 부응한 隷書였을 것이다. 그 뒤에 바뀌어서 ‘眞草’가 된 것이 바로 顔之推가 말한 “楷書의 正子體가 볼 만하였고, 俗字가 없지는 않다.[楷正可觀 不無俗字]”라고 한 것이며, 또한 韓愈가 〈石鼓歌〉에서 “王羲之의 속된 글씨가 예쁜 모양만 쫓았다.[羲之俗書趁姿媚]”라고 한 것이며, 오늘날 볼 수 있는 〈蘭亭序〉 등의 글씨가 이것이다. 王維의 시 〈故人張諲工詩善易卜兼能丹靑草隷頃以詩見贈聊獲酬之〉에서 “둥근 부채에 써준 草書가 王內史를 얕보았다.[團扇草書輕內史]”라 한 것 역시, 王羲之가 草書를 잘 썼음을 말해준다.[王利器]

안씨가훈(2)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