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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氏家訓(2)

안씨가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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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投壺와 彈棋
投壺之禮, 近世愈精。古者,
今則唯欲其, 益多益喜, 乃有之名。
其尤妙者, 有蓮花驍。
賀又嘗爲小障, 置壺其外, 隔障投之, 無所失也。
至鄴以來, 亦見, 有此, 擧國遂無投得一驍者。
亦近世雅戱, 消愁釋憒, 時可爲之。


13. 투호投壺탄기彈棋
투호投壺의 예법은 근세에 와서 더욱 정교해졌다. 옛날에 〈항아리를〉 팥으로 채운 것은 화살이 튀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에는 오로지 화살을 튀어오르게 하려고 하며, 많이 튀어나올수록 더 좋아해서 〈떨어진 화살의 자세에 따라〉 의간倚竿, 대검帶劍, 낭호狼壺, 표미豹尾, 용수龍首 등의 명목이 있게 되었다.
특히 뛰어난 솜씨로 연화효蓮花驍라는 것이 있다.
여남汝南주괴周璝주홍정周弘正의 아들이고, 회계會稽하휘賀徽하혁賀革의 아들이었는데, 이들 모두 화살 하나로 능히 마흔 번 이상 튀어오르게 할 수 있었다.
하휘賀徽는 또 일찍이 조그만 가리개를 만들어, 항아리를 그 뒤에 두고 가리개 너머로 던졌는데, 실패한 것이 없었다.
에 온 이래로 광녕왕廣寧王난릉무왕蘭陵武王 등이 정교한 투호 도구들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지만, 온 나라 안에 화살을 던져 한 번이라도 튀어오르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끝내 없었다.
탄기彈棋 역시 근래에 나온 점잖은 놀이로서 시름을 녹여주고 심란함을 풀어주므로, 때때로 해볼 만하다.


역주
역주1 實以小豆 爲其矢之躍也 : 《禮記》 〈投壺〉에서 “항아리의 목은 길이가 일곱 치, 배는 다섯 치, 주둥이 직경은 두 치 반이고, 용량은 콩 다섯 되가 들어갈 정도인데, 항아리 안을 팥으로 채우는 것은 화살이 튀어 나오기 때문이다.[壺中實小豆焉 爲其矢之躍而出也] 항아리는 자리에서 두 화살 반의 거리만큼 떼어둔다. 화살은 산뽕나무나 멧대추나무로 만드는데, 그 껍질은 벗기지 않는다.”라 하였다.[盧文弨]
역주2 驍(효) : 던져 들어간 것 같은데 다시 튀어나와서, 항아리의 입구나 귀에 걸리는 것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何焯]
《西京雜記》 下에서 “武帝 때에 郭舍人이 投壺를 잘했는데, 대나무로 화살을 만들고 멧대추나무는 쓰지 않았다. 옛날의 投壺는 적중하는 것을 세었지 되돌아오는 것은 쳐주지 않았다. 郭舍人은 화살을 튀겨서 돌아오게 하여 화살 하나가 백여 번을 돌아왔으니 이를 일컬어 驍라고 하였는데, 博에서 손바닥의 완력과 날쌔기가 驍傑이 되는 것과 같다는 말이었다. 늘 武帝를 위해 投壺를 하였고 그때마다 황금과 비단을 하사하였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3 倚竿帶劍狼壺豹尾龍首 : 司馬光의 《投壺格》에 의하면 倚竿은 화살이 항아리 입구에 비스듬히 기대 있는 것이고, 帶劍은 화살이 귀를 꿰뚫고 바닥에 닿지 않은 것이고, 狼壺는 항아리 입구에서 빙빙 돌다가 倚竿이 된 것이고, 龍尾는 倚竿이 된 화살의 깃이 자신을 향한 것이고, 龍首는 倚竿이 된 화살의 앞머리가 자신을 향한 것이다. 顔之推의 豹尾를 司馬光은 龍尾라 했다.[王利器]
던진 화살이 떨어져서 항아리 밖에 놓인 자세에 따라 붙여진 각각의 명칭이다.[역자]
역주4 汝南周璝(괴) 弘正之子 : 《陳書》 〈周弘正傳〉에서 “아들 周璝는 벼슬이 吏部郞에 이르렀다.”라 하였다.[盧文弨]
역주5 會稽賀徽 賀革之子 : 《梁書》 〈儒林傳〉에 “賀瑒(창)의 아들 革은 字가 文明이다. 젊어서 三禮에 통달하였고, 커서는 《孝經》, 《論語》, 《毛詩》, 《春秋左氏傳》을 두루 공부했다.”라고 하였으나, 賀革의 아들은 나오지 않는다.[盧文弨]
《南史》 〈賀革傳〉에서 “아들 賀徽는 풍채가 멋지고, 담론에 능하여 賀革이 몹시 아꼈다. 아들이 賀革보다 먼저 죽자, 賀革은 통곡을 하며 애통해하다가 병이 들어 죽었다.”라 하였다.[徐鯤]
역주6 廣寧蘭陵諸王 : 《北齊書》 〈文襄六王傳〉에서 “廣寧王 孝珩(형)은 文襄帝의 둘째 아들이다. 사람들을 아끼고 애호했고, 經典과 史書를 두루 배우고 글짓기를 좋아하였으며 技藝가 있었다. 蘭陵武王 長恭은 일명 孝瓘(관)이라고도 하였는데 文襄帝의 넷째 아들이었다. 표정은 부드러우나 마음은 씩씩했고, 목소리와 얼굴이 모두 아름다웠다. 지휘관이 되어서 몸소 자질구레한 일들도 부지런히 했고, 늘 맛있는 것을 얻으면 비록 오이 하나, 과일 몇 개라 할지라도 반드시 장수와 병졸들과 함께 나누었다.”라 하였다.[趙曦明]
北齊 文襄帝의 아들인 廣寧王과 蘭陵王을 말한다.[역자]
역주7 校具 : 《文選》 〈奏彈劉整〉에서 “劉整이 采音에게 말하기를, 그는 네가 수레의 장식도구[車校具]를 훔쳤다고 하였는데, ……車欄, 夾杖, 龍牽은 사실 采音이 훔친 것이 아니었다.”라고 했다. 여기서 ‘校具’라고 한 것은 《文選》의 이 글과 뜻이 같으며, 작은 가리개[小障]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校’는 장식한다[校飾]는 뜻이다. 古鈔本 《文選》에 수록된 顔延年의 〈赭(자)白馬賦〉에서는 “보석 장식이 별처럼 얽혀 있다.[寶校星纏]”라 하였고, 注에서 “校는 장식한다[裝飾]는 뜻이다.”라 하였다. 《傅子》에 〈校工〉篇이 있는데, 아낙의 머리 장식과 기타 수레와 의복, 가마와 말의 장식에 대한 내용이다. 이 외에 《南齊書》 〈輿服志〉의 여러 곳에도 ‘校飾’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는데, 대체로 工藝라는 뜻이고, 그와 연관된 물건들을 校具라 하였다.[王利器]
본래 장식물을 뜻하나, 여기서는 공예품 수준의 정교한 投壺 도구를 말한다.[역자]
역주8 彈棋 : 《藝經》에서 “彈棋는 두 사람이 대국하며, 흑백의 바둑돌이 각각 여섯 개씩인데, 먼저 바둑돌을 나열하고 서로 마주하여, 아래에서 소리치며 위에서 가격한다.”라고 했다. 《世說新語》 〈巧藝〉에서는 “彈棋는 魏나라 궁 안에서 化粧 상자를 이용해서 놀던 놀이에서 시작되었다. 文帝는 이 놀이에 솜씨가 아주 좋았는데, 수건 모서리를 써서 튀기면 적중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어떤 객이 스스로 잘한다고 하기에 文帝가 해보라고 하자, 그 객은 머리를 숙여 쓰고 있던 葛巾의 모서리로 바둑알을 튀겼는데, 솜씨가 文帝보다 나았다.”라 하였고, 注에서 傅玄의 〈彈棋賦敍〉를 인용하여 “漢 成帝는 蹴鞠을 좋아했는데, 劉向은 그것이 신체를 피곤하게 하고 힘을 고갈시키니 至尊께서 하실 일이 아니라고 하고서, 그 격식에 맞추어 彈棋를 만들었다.”라 하며, 이 놀이의 유래가 오래되었다고 했다.[趙曦明]
고대 놀이의 일종이다. 바둑알을 튀기는 방식으로 보아 오늘날의 알까기와 비슷한 놀이가 아닌가 싶다.[역자]

안씨가훈(2)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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