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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氏家訓(2)

안씨가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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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先祖 靖侯의 가르침
宇宙可其極, 不知其窮, 唯在少欲知足, 爲立爾。
吾終身, 以爲名言也。


1. 선조先祖 정후靖侯의 가르침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욕심은 내키는 대로 부려서는 안 되고, 뜻은 채워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우주는 그 끝까지 가볼 수 있어도 타고난 성정性情은 그 끝을 모르므로, 오로지 욕심을 줄이고 만족을 아는 데에 그 한계를 세운다.
선조이신 정후靖侯께서 자식과 조카들에게 훈계하시기를 “너희 집은 서생書生 집안으로서 대대로 부귀한 이가 없었으니, 지금부터 벼슬은 〈녹봉이〉 이천석二千石을 넘어서는 안 되고, 혼인은 세도 있는 집안을 탐하지 말라.”고 하셨다.
나는 평생 가슴속에 간직하면서 명언名言이라고 여겨왔다.


역주
역주1 禮云……志不可滿 : 《禮記》 〈曲禮 上〉에 나온다.[趙曦明]
역주2 : 이르다. 미치다.[역자]
역주3 情性 : 性情, 즉 타고난 심정과 성질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사람의 본질적인 욕심을 의미한다.[역자]
역주4 涯限 : 《藝文類聚》 18에 인용된 王僧孺의 〈爲韋雍州致仕表〉에서 “일단 붙잡고 오르면 결국 끝[涯限]이 없어진다.”라 하였다. 涯限은 한계와 같은 말이다.[王利器]
역주5 靖侯 : 顔之推의 9世祖로서 이름은 含이다. 본서 제5 〈治家〉편 14 참조.[盧文弨]
역주6 戒子姪曰……婚姻勿貪勢家 : 《景定建康志》 43에 인용된 晉代 李闡(천)의 〈右光祿大夫西平靖侯顔府君碑〉에서 “王處明은 君(顔含)의 外弟였는데, 아들 子允의 혼인을 위해 君의 딸을 청하였고, 桓溫은 君 부인의 從甥로서 君의 작은 딸과 혼인하기를 청하였지만, 君은 둘 다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나는 茂倫을 강에서 만나 옛 친구를 언급하며 눈물을 닦으면서 속마음을 이야기했다. 茂倫은 오직 한 가지 혼인만 맺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어찌 내가 이 말을 잊겠는가? 桓溫은 자기 기운을 믿고 명성을 좋아하니, 그가 대성한다면 나라를 기울여 위태롭게 할 것이고, 만약에 실패한다면 죄가 사돈에게까지 미칠 것이다. 너희 집은 書生 집안으로 대대로 富貴한 사람이 없었으니, 끝까지 네가 禍를 심지 않도록 하라. 지금부터 벼슬은 녹질이 이천석이 넘어서는 안 되고, 혼인은 대대로 지위가 있어온 집안[世位家]을 탐하지 말라.’ 하였다.”라 하였다. 《顔魯公文集》 〈大宗碑銘〉에서는 “桓溫이 혼인을 청하였지만 그가 번창한 집안이라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고서, 자손들에게 훈계하기를 ‘지금부터 벼슬은 이천석이 넘어서는 안 되고, 혼인은 世家를 탐하지 말라.’라 하였다.” 했다. 생각건대, 앞의 두 글에서는 모두 ‘世’로 되어 있는데, 《顔氏家訓》에서 ‘勢’로 쓴 것은 잘못 고친 것이 아닌가 싶다.[王利器]
역주7 汝家書生門戶……自今仕宦不可過二千石 : 漢代 이래로 官制에 中二千石, 二千石, 比二千石 등이 있는데, 이들은 오직 公의 지위에만 오르지 못하였을 뿐, 官品으로는 역시 높은 지위이다. 邴曼容은 벼슬을 하면서 六百石을 넘지 않으려 하여, 바로 자진 면직하고 떠났으니 얼마나 허심탄회한가?[盧文弨]
二千石이면 漢人들은 大官이라고 했는데, 벼슬하는 사람들이 허심탄회한지 조급한지는 여기서 그 취향을 엿볼 수 있다. 《漢書》 〈疏廣傳〉에서 “이제 벼슬을 해서 이천석에 이르렀으니, 벼슬도 이루었고 이름도 세웠다.”라고 했다. 또 同書 〈寧成傳〉에서는 “일컬어 말하기를 ‘벼슬이 이천석에 이르지 못하고, 장사도 천만 錢에 이르지 못한다면, 어떻게 남들과 견줄 수 있으랴?’라 했다.” 하였다. 《世說新語》 〈賢媛〉에 따르면 “王經은 어렸을 때 빈궁했으나 벼슬이 祿秩 이천석에 이르렀는데, 그의 모친이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본래 가난한 집 자식인데 벼슬이 이천석에 이르렀으니 여기서 그만두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라 했다.” 하였다. 江淹의 〈自序傳〉에서는 “벼슬에 있어 바라는 것은, 이천석 녹봉의 卿의 지위를 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다. 漢魏 이래로 벼슬길이 어려워서, 일반적으로 벼슬이 浮沈하는 이들은 대개 이 정도를 손에 넣을 수 있는 한계로 여겼다. 《北齊書》 〈張瓊傳〉에서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큰아들 忻(흔)은……普泰 연간에 都督이 되었고, ……공을 세워 魏 平陽公主에게 장가를 들어서 駙馬都尉, 大將軍, 開府儀同三司, 建州刺史, 南鄭縣伯에 제수되었다. 瓊은 자신이 지나치게 출세했다고 걱정하며 늘 친지들에게 말하기를 ‘사람의 벼슬과 작위는 중간쯤에 있는 것[處中]만 한 게 없소. 나는 지위와 녹질이 너무 높아 심히 걱정이오.’라 했다.” 하였는데, 張瓊과 顔之推 모두가 北齊의 신하로서, 張瓊이 했던 걱정이나 顔之推가 가슴속에 간직했던 생각이나 그 道는 같다.[王利器]
역주8 服膺 : 《中庸》에서 “한 가지의 善을 얻으면, 소중하게 가슴속에 간직하고[拳拳服膺] 그것을 잃지 않는다.”라 하였고, 朱熹의 注에서 “받들어 간직하여 가슴속에 두니, 능히 잘 지켜나감을 말한 것이다.”라 하였다.[王利器]

안씨가훈(2)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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