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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氏家訓(1)

안씨가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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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옛사람들의 勉學
15. 옛사람들의 勉學
古人勤學, 有, , , , 亦勤篤。
옛사람은 부지런히 배웠으니, 〈졸음을 쫓느라〉 송곳을 움켜쥐거나, 〈유학의 길에 나서려고〉 도끼를 던져 보이거나, 눈[雪]빛에 〈책을〉 비추어 보거나, 반딧불이를 〈명주자루에다〉 모으거나, 김을 매면서도 경전을 끼고 있거나, 양을 치면서도 〈부들〉 잎 쪽지로 책을 엮었으니 역시 부지런히 열심히 배웠다고 하겠다.
梁世彭城 , 交州刺史勃之孫, 早孤家貧, 燈燭難辦, 常買尺寸折之, 明夜讀。
나라 때 팽성군彭城郡유기劉綺교주자사交州刺史 유발劉勃의 손자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집안이 가난하여 등촉燈燭을 마련하기 어렵자 늘 물억새를 사다가 잘게 잘라 태워서 밝게 밝혀놓고 밤중에도 책을 읽었다.
孝元初, 精選, 綺以才華, 爲, 殊蒙禮遇, 終於
원제元帝가 처음 회계會稽로 나가 막료들을 정선할 때 유기劉綺는 그 재능이 출중하여 국상시國常侍기실記室이 되어 특별한 예우를 받았으며 마침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까지 이르렀다.
朱詹, 世居江陵, 後出, 好學, 家貧無資, 累日不爨, 乃時呑紙以實腹, 寒無氈被, 抱犬而臥。
의양현義陽縣주첨朱詹은 대대로 강릉江陵에 살다가 나중에 양도揚都로 나왔는데,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고 재산이 없어 며칠 동안 밥을 짓지 못하면 종이를 삼켜서 배를 채웠으며, 추워도 덮을 담요가 없으면 개를 껴안은 채 누웠다.
犬亦, 起行盜食, 呼之不至, 哀聲動隣, 猶不廢業, 卒成學士, 官至鎭南錄事參軍, 爲孝元所禮。
개 또한 굶주려서 음식을 훔쳐 먹으러 나가서 불러도 오지 않으면 〈개를 부르는〉 애처로운 소리가 이웃에까지 들렸건만 오히려 학업은 포기하지 않아서, 마침내 학사學士가 되고 벼슬이 진남녹사참군鎭南錄事參軍에까지 이르러 원제元帝에게 예우를 받았다.
此乃不可爲之事, 亦是勤學之一人。
이는 〈대개의 사람들은〉 할 수가 없는 일이니 그 역시 부지런히 공부한 현인賢人들 중 한 사람이다.
臧逢世, 年二十餘, 欲讀班固《漢書》, 苦假借不久, 乃就姊夫劉緩乞丐書翰, 手寫一本, 服其志尙,
동관군東莞郡장봉세臧逢世는 나이 스물 남짓에 반고班固의 《한서漢書》를 읽고자 하였으나 책을 오래 빌릴 수 없어 고민하다가 자형 유완劉緩에게 명함이나 편지의 〈오려낸〉 가장자리를 얻어와 《한서》 한 질을 다 손으로 베껴 쓰니, 군부軍府의 사람들이 그의 의지에 감복하였다.
卒以《漢書》聞。
마침내는 《한서漢書》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역주
역주1 握錐 : 《戰國策》 〈秦策〉에 “蘇秦은 책을 읽다 졸음이 오면 송곳을 당겨 스스로 제 넓적다리를 찔러[引錐自刺其股] 피가 발까지 흘러내렸다.”고 하였다.[趙曦明]
역주2 投斧 : 《廬江七賢傳》에 “文黨은 字가 仲翁으로, 아직 배우지 못하였던 때에 다른 사람과 함께 산으로 들어가 나무를 골라서 함께 간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학문을 구하려고 멀리 가려 하니, 먼저 시험 삼아 나무 위로 내 도끼를 던져 올리면[投我斧] 도끼가 마땅히 나무에 걸릴 것이다.’ 하고는 우러러보며 도끼를 던졌는데, 도끼가 과연 나무 위에 걸리므로, 長安으로 가서 經學을 사사받았다.”고 하였다.[趙曦明]
역주3 照雪 : 《初學記》에 인용된 《宋齊語》에 “孫康은 집안이 가난하여 항상 눈에 반사된 빛으로[映雪] 책을 읽었다.”고 하였다.[趙曦明]
‘孫康映雪’의 고사이다.[역자]
역주4 聚螢 : 《晉書》 〈車武子傳〉에 “武子는 南平縣 사람으로 널리 배워 여러 방면에 통달했다. 집안이 가난하여 기름을 늘 구하지는 못하자 여름철이면 명주자루에 수십 마리 반딧불이를 담아[盛數十螢] 그 불빛으로 책을 비추어 보며 밤을 새웠다.”고 하였다.[趙曦明]
역주5 鋤則帶經 : 《漢書》 〈兒寬傳〉에는 “경서를 들고 다니며 김을 매다가[帶經而鋤] 쉴 때면 언제나 읽으며 암송하였다.”고 하며, 《魏志》 〈常林傳〉의 주석에 인용된 《魏略》에도 “常林은 젊어서 외롭고 가난하였으나 스스로 노력한 것이 아니면 남에게서 취하지 않았다. 성품이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漢末에 諸生이 되어서도 경전을 가지고 다니며 밭 갈고 김매니[帶經耕鋤] 그의 처도 항상 직접 들밥을 내와 먹였다. 常林은 비록 논밭에 있었지만 그들은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을 대하듯 하였다.”고 하였다.[趙曦明]
역주6 牧則編簡 : 《漢書》 〈路溫舒傳〉에 “溫舒는 字가 長君으로 鉅鹿郡 東里 사람이다. 아비가 마을의 문지기[監門]가 되어 溫舒에게 양을 치게 하였는데, 못의 부들을 캐서 잎을 잘라 쪽지를 만들고 이를 엮어 글을 썼다.[編用書寫]”고 하였다.[趙曦明]
역주7 : 혹은 ‘云’자로 되어 있으니, ‘이르다’의 뜻이다.[王利器]
역주8 劉綺 : 梁代의 시인으로, 《秦漢魏晉南北朝詩》 〈梁詩〉에는 그의 聯句 〈增新曲相對聯句〉, 〈照水聯句〉, 〈折花聯句〉, 〈搖扇聯句〉, 〈正釵聯句〉 등이 何遜 등의 聯句와 함께 나란히 실려 있다.[역자]
역주9 : 물억새이다. 뿌리와 줄기에 대나무 같은 마디가 있으므로 ‘荻竹’이라고도 한다. 明나라 李時珍의 《本草綱目》 〈草四 蘆〉에 “蘆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길이가 한 길쯤이면서 속이 비었고 껍질이 얇고 흰빛이 나면 ‘葭’이고, ‘蘆’이고, ‘葦’이다. 葦보다 짧으면서 속이 비었고 껍질이 두껍고 검푸른 빛이 나면 ‘薍’이고, ‘荻’이고, ‘萑’이다. 가장 짧고 작으면서 속이 찼으면 ‘蒹’이고, ‘薕’이다.”라고 하였다.[역자]
역주10 : ‘燃(타다)’과 뜻이 같다.[역자]
역주11 出會稽 : 《梁書》 〈元帝紀〉에 “天監 13년에 湘東王으로 봉해졌으며, 食邑이 2천 호였다. 처음에 寧遠將軍 겸 會稽太守를 맡았다.”고 하였다.[趙曦明]
역주12 寮寀 : 幕僚, 同僚, 혹은 官舍의 뜻이다. ‘寮采’로도 쓰인다.[역자]
역주13 國常侍兼記室 : 《隋書》 〈百官志〉에 “皇子府에는 中錄事, 中記室, 中直兵 등의 參軍과 功曹史, 錄事, 中兵 등의 參軍을 설치하며, 王國에는 常侍官을 설치한다.”고 하였다. 《北堂書鈔》 69에 인용된 《干寶司徒儀》에 의하면 “記室은 書式이나 儀禮를 주관하며, 表章이나 雜記 종류의 書案이 필요하면 그 초안을 작성한다.”고 하였다.[趙曦明]
역주14 金紫光祿 : 宋本에는 句末에 ‘大夫’ 두 자가 있다.[王利器]
역주15 義陽 : 《隋書》 〈地理志〉에 “荊州에 義陽郡 義陽縣이 있다.”고 하였다.[趙曦明]
역주16 揚都 : 아래 글에서도 “揚都로 내려가면 연해지역[海邦]으로 간다고 한다.”고 했을 때 揚都는 모두 建業을 가리키니, 곧 지금의 江蘇省 南京市이다. 庾闡에게는 〈揚都賦〉가 있는데, 서술한 것은 모두가 建業의 상황들이다. 《隋書》 〈地理志 下〉에 “丹陽郡은 東晉 이후부터 郡이 설치되면서 揚州라고 불렸다. 陳을 평정하자, 詔勅을 내려 모두 반반하게 쓸어버리고 논밭으로 일군 다음 다시 石頭城에다 蔣州를 설치하였다.”고 하였다.[王利器]
역주17 飢虛 : ‘飢餓’와 같은 뜻으로 ‘뱃속이 비었다’고 말한 것이니, 魏‧晉‧南北朝시대 사람들이 관습적으로 쓰던 언어이다.[王利器]
역주18 東莞(관)臧逢世 : 《晉書》 〈地理志〉에 “徐州의 東莞郡은 太康 연간에 설치되었으며, 東莞縣은 옛날의 魯鄆邑이다.”라고 하였다. 생각건대, 臧逢世는 본서 제6 〈風操〉篇에도 보인다.[趙曦明]
臧逢世의 事迹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東莞郡은 지금의 山東省 沂水縣 지역에 있었다.[역자]
역주19 : 관
역주20 客刺 : 명함이다.[역자]
역주21 紙末 : 옛날에는 명함[客刺]이나 書翰의 가장자리가 몹시 길었다. 그러므로 그 여백에 글자를 쓸 수가 있었다.[郝懿行]
종이의 가장자리 여백이다.[역자]
역주22 軍府 : 湘東王이 관장했던 軍事機構. 湘東王의 記室 직책을 맡고 있던 자형 劉緩을 통해 臧逢世의 이름 역시 이곳에서 처음 알려졌을 것이다. 본서 제7 〈慕賢〉篇 4 주 5) 참조.[역자]

안씨가훈(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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