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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氏家訓(2)

안씨가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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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古典에 삽입된 후대의 사실
36. 고전古典에 삽입된 후대의 사실
或問:“《山海經》, , 而有, 如此郡縣不少, 以爲何也?”
어떤 이가 물었다. “《산해경山海經》은 임금과 백익伯益이 기술하였는데, 장사長沙영릉零陵계양桂陽제기諸曁와 같은 〈한대漢代의〉 군현郡縣이 적지 않게 적혀 있으니,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答曰:“, 爲日久矣。
내가 대답하였다. “사관史官이 〈글자에 의구심이 생기면〉 그 난을 비워놓는 일은 그 역사가 오랜 일입니다.
加復, , 典籍錯亂, 非止於此。
게다가 나라 때 학문을 말살하고 동탁董卓서책書冊을 불태워, 전적典籍에 착오와 혼란이 생겨난 것은 단지 《산해경山海經》에만 그치지는 않을 일이지요.
예컨대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은 신농씨神農氏가 저술하였지만, 그 안에는 예장豫章, 주애朱崖, 조국趙國, 상산常山, 봉고奉高, 진정眞定, 임치臨淄, 좌풍익左馮翊 등 〈한대漢代군현郡縣의 이름과 함께 그 지역에서 산출産出되는 갖가지 약물藥物이 기재되어 있거나,
이아爾雅》는 주공周公이 지었지만, ‘효성과 우애로 이름난 장중張仲이다.’라고 〈주 선왕周 宣王 시대의 사람을〉 말하고 있거나,
仲尼修《春秋》, 而
공자孔子가 《춘추春秋》를 편수編修하였지만, 경문經文에서 ‘공구孔丘가 죽었다.’고 쓰고 있거나,
세본世本》은 〈춘추春秋 시기 나라 사람〉 좌구명左丘明이 썼지만, 연왕燕王 한 고조漢 高祖가 등장하고 있거나,
, 乃, 而云‘漢兼天下, 海內
전국戰國 시기의 위 양왕魏 襄王 에서 발굴되었다는〉 《급총쇄어汲冢瑣語》에 진망비秦望碑에 대한 기록이 있거나, 《창힐편蒼頡篇》은 이사李斯가 지었지만, ‘천하天下병합倂合하자 해내海內가 하나로 모였다.
, ’;《列仙傳》劉向所造, 而’;
진희陳豨묵형墨刑을 당하고 한신韓信이 무너졌으니 반신叛臣토벌討伐되고 잔적殘賊괴멸壞滅되었다.’고 하였거나, 《열선전列仙傳》은 유향劉向이 지었지만, 에서는 ‘74명이 불경佛經에서 나왔다.’고 하였거나,
《列女傳》亦向所造, , 終于,
열녀전列女傳》 역시 유향劉向이 지었으나 그의 아들 유흠劉歆이 다시 《열녀전송列女傳頌》을 지어 조 도양왕趙 悼襄王창후倡后에 이르러 끝을 맺었는데도,
전기傳記 중에 〈동한東漢 시기〉 경시제更始帝한부인韓夫人이나 명덕 마황후明德 馬皇后양부인梁夫人 가 실려 있는 것과 같습니다.
皆由後人所, 非本文也。”
이 모두는 후대後代의 사람들이 뒤섞어 넣은 것일 뿐, 본래의 글이 아니지요.”
역주
역주1 夏禹及益所記 : 梁玉繩의 《史記志疑》 권35에 의하면 “劉秀(西漢)의 〈上山海經表〉, 趙曄(漢)의 《吳越春秋》 〈越王無余外傳〉, 《論衡》 〈別通〉, 《路史》 〈後紀〉에서는 모두 ‘《山海經》은 伯益이 지었다.’고 하며, 《隋書》 〈經籍志〉와 《顔氏家訓》 〈書證〉에서는 ‘禹와 伯益이 기술한 것이다.’라고 하며, 《水經注》 〈敘〉와 《水經注》 〈濁漳水〉에서는 모두 ‘禹가 지었다.’고 하니, ……의구스러워 단정 지을 수가 없는 데다 문장 또한 번잡스런 데가 많으니 일시에 1인의 손으로 완성된 것이 아닌 듯하다.”라고 하였다.[王利器]
夏禹와 伯益이 기술한 것이다. 伯益은 益이라고도 하며 五帝 중 顓頊의 후손으로, 嬴姓의 始祖이다.[역자]
역주2 長沙零陵桂陽諸曁 : 《漢書》 〈地理志〉에 의하면 “長沙國은 秦나라 때의 郡이고, 零陵郡은 武帝 元鼎 6년에 설치되었으며, 桂陽郡은 高帝 때 설치되었고, 會稽郡은 秦나라 때 설치되었는데 諸曁縣을 두고 있다.”라고 하였다.[趙曦明]
역주3 史之闕文 : 《論語》 〈衛靈公〉편에 보이는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오히려 사관이 비워놓은 글에까지 〈이해가〉 이르렀다.’라고 하였다.”는 구절의 何晏의 《集解》에 의하면 “包咸(東漢)은 ‘옛날의 良史는 글자를 쓸 때 의구심이 생기면 그 난을 비워놓고 이를 아는 사람을 기다렸다.’ 하였다.”라고 하였다.[王利器]
역주4 秦人滅學 : 《史記》 〈秦始皇本紀〉에 의하면 “丞相 李斯가 奏請하기를, 史官들이 秦을 비난한 기록을 모두 불태우도록 하고, 博士로서 맡은 직무가 아닌데도 감히 儒家書와 百家語를 소장한 온 천하의 사람들은 모두 郡守와 縣尉에게 출두하여 〈그 책들을〉 모아놓고 불태워버리도록 하였다.”라고 하였다.[趙曦明]
역주5 董卓焚書 : 《後漢書》 〈董卓傳〉에 의하면 “天子를 西都 長安으로 옮기게 하고 宗廟와 官府 및 주택을 모두 불태워버려 200리 안에는 더 이상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라고 하였다.[趙曦明]
역주6 本草神農所述 : 《隋書》 〈經籍志〉에 의하면 “《神農本草經》 8권과 4권은 雷公이 集注하였다.”라고 하였다.[趙曦明]
역주7 有豫章朱崖趙國常山奉高眞定臨淄馮翊等郡縣名 : 《漢書》 〈地理志〉에 의하면 “豫章郡은 高帝 때에 설치되었고, 合浦郡은 武帝 元鼎 6년에 설치되었는데, 5개 縣을 두었고 이 가운데 朱盧縣은 《後漢書》 〈郡國志〉에는 朱崖縣으로 되어 있다. 趙國郡은 옛날 秦나라의 邯鄲郡으로 高帝 4년에 趙國郡이 되었다. 常山郡도 高帝 때 설치되었고, 泰山郡도 高帝 때 설치되었는데, 24개 縣을 두었고 이 가운데 奉高縣이 있다. 眞定國은 武帝 元鼎 4년에 설치되었으며, 齊郡은 12개 縣을 두고 있는데 그 가운데 臨淄縣은 太師 尙父가 冊封되었던 곳이다. 左馮翊은 옛날 秦나라의 內史를 武帝 太初 元年에 고친 것이다.”라고 하였다.[趙曦明]
역주8 爾雅周公所作 : 陸德明(唐)의 《經典釋文》 〈序錄〉에 의하면 “《爾雅》의 〈釋詁〉 1편은 대개 周公이 지은 것이며, 〈釋言〉 이하에 대해서는 혹자는 말하길 ‘仲尼가 늘렸다던가, 子夏가 보탰다던가, 叔孫通이 더했다던가, 梁文이 보충했다던가.’ 하는데, 張揖이 이에 대해 자세히 논한 바 있다.”라고 하였다.[趙曦明]
역주9 張仲孝友 : 《詩經》 〈小雅 六月〉편의 시구이다.[趙曦明]
《西京雜記》 上에 의하면 “〈郭威는〉 ‘《爾雅》에는 張仲孝友라는 말이 보이는데, 張仲은 〈西周시대 재상 尹吉甫의 친구로〉 宣王 때 사람이니 周公이 지은 것이 아닌 게 분명하다.’고 하였으나, ……《爾雅》는 나온 지가 오래되었고 예로부터 학자들에게 전하기로 모두가 周公이 쓴 것이라고들 하니, ‘張仲孝友’ 같은 구절은 後人들이 보탠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다.[王利器]
역주10 經書孔丘卒 : 《春秋》 哀公 16년에 의하면 “夏 4월 己丑日에 孔丘가 죽었다.”라고 하였다.[趙曦明]
역주11 世本左丘明所書 : 《漢書》 〈藝文志〉에 의하면 “《世本》 15편은 옛 史官이 黃帝 이래로 春秋 시기의 諸侯와 大夫에 이르기까지를 기록한 것이다.”라고 하였다.[趙曦明]
秦嘉謨의 《世本輯補》에 의하면 “《世本》이 左丘明에 의해 지어졌다는 말은 《顔氏家訓》에서 처음 얘기된 것으로 사실 《漢書》 〈司馬遷傳〉이나 《後漢書》 〈班彪傳〉에서는 분명히 언급된 바가 없다.”라고 하였다.[王利器]
《世本》은 《世系》, 혹은 《系本》이나 《代本》으로도 불린다. 先秦 시기 史官이 편찬한 것으로 주로 上古시대 帝王, 諸侯, 卿大夫의 家族世系를 기록한 史籍이며, 〈帝系〉, 〈王侯世〉, 〈卿大夫世〉, 〈氏族〉 등 15편으로 나뉘어 있다. 司馬遷의 《史記》, 韋昭의 《國語注》, 杜預의 《春秋經傳集解》, 司馬貞의 《史記索隱》, 張守節의 《史記正義》 등에서 이를 인용, 참고하고 있으나, 南宋 末年 이후 모두 亡失되고, 지금은 輯本만 전한다.[역자]
역주12 有燕王喜漢高祖 : 秦嘉謨의 《世本輯補》에 의하면 “《世本》이 周나라 때 史官들이 서로 계승하여 지은 책임은 劉向의 《別錄》과 《周禮》의 鄭玄 注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래서 燕王 喜의 얘기가 있을 뿐이다. 漢 高祖의 경우도 漢代人이 《世本》을 이어 보완한 것일 뿐, 原文은 아니다.”라고 하였다.[王利器]
역주13 汲冢瑣語 : 《晉書》 〈東晳傳〉에 의하면 “太康 2년에 汲郡 사람 不準이 혹은 安釐王冢이라고도 하는 전국 시기의 魏 襄王 墓를 도굴하며 竹書 수십 수레를 얻었는데 그 속에 《瑣語》 11편이 있었으니, 여러 나라의 解夢, 妖怪, 觀相 등에 관한 책이다.”라고 하였다.[趙曦明]
역주14 載秦望碑 : 《史記》 〈秦始皇本紀〉에 의하면 “37년에 會稽山으로 올라가 大禹께 제사 지내고 南海를 바라본 후 石刻[秦望碑]을 세워 秦의 德을 칭송하였다.”라고 하였다.[趙曦明]
역주15 蒼頡篇李斯所造 : 《法書要錄》 2에 실린 庾元威의 《論書》에 의하면 “《漢書》와 《晉書》 및 《古今字書》에서는 모두 이르기를 ‘《蒼頡》 9편은 李斯가 지은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하였다.[王利器]
역주16 幷廁 : 한 울타리 안에 모이다. 幷은 ‘통합시키다’, ‘모이다’의 뜻이며, 廁은 側(가)과 같은 말이니 ‘테두리[邊沿]’의 뜻이다.[역자]
역주17 豨(희)黥韓覆 : 陳豨가 墨刑을 당하고 韓信이 무너지다. 《法書要錄》 2에 실린 庾元威의 《論書》에 의하면 “《蒼頡》 제9장에서 豨와 信과 京劉 등을 논하고 있는데, 郭璞은 ‘豨와 信이란 陳豨와 韓信이요, 京劉란 大漢이며 西土란 長安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預言이 아닐진대, 어찌 秦나라 때의 조정 재상이 漢나라 조정의 人物을 얘기하겠는가?”라고 하였다.[王利器]
역주18 畔討滅殘 : 陽湖縣 사람 孫星衍은 滅殘을 殘滅로 교정하고 顔之推가 틀렸다고 여겼다.[盧文弨]
畔은 叛과 같은 말로 畔討란 ‘叛臣이 討伐되다.’의 뜻이다. 殘은 殘賊으로, 殘滅은 ‘殘賊이 殲滅되다.’의 뜻이다.[역자]
역주19 贊云七十四人出佛經 : 佛經이 中國에 들어온 가장 이른 시기에 대해, 秦始皇 때 外國의 승려 釋 利防 等 18인이 佛經을 가지고 中國에 들어왔다고도 하고, 西漢 成帝 때 光祿大夫 劉向(약 B.C. 77~B.C. 6)이 朝廷에 소장된 圖書를 校閱하다 藏書 가운데서 佛經을 발견하였다고도 하나, 이 둘은 傳說에 불과하여 믿을 수가 없다. 學界에서는 가장 일러도 西漢 末年, 대개 哀帝 元壽 元年(B.C. 2) 이후에 중앙아시아의 大月氏(지)國으로부터 전래된 것으로 여긴다.[역자]
역주20 其子歆又作頌 : 《隋書》 〈經籍志〉에 의하면 “《列女傳》 15권은 劉向이 짓고 曹大家가 주석하였으며, 《列女傳頌》 1권은 劉歆이 지었다.”라고 하였다.[趙曦明]
역주21 趙悼后 : 趙悼倡后로도 불리며, 趙 悼襄王의 王后이다. 《史記》 〈趙世家〉의 《集解》에서 徐廣이 인용한 《列女傳》에 의하면 곧 “邯鄲의 倡后이다.”라고 하였다.[盧文弨]
倡后(B.C. ?~B.C. 228)는 곧 趙倡后이다. 戰國 말기 趙나라 사람으로 趙나라 마지막 왕 趙遷의 生母이자 悼襄王 趙偃의 妃이다.[역자]
역주22 更始韓夫人 : 《後漢書》 〈劉玄傳〉에 의하면 “劉玄은 更始將軍이 되었다가 나중에 皇帝에 즉위하였다. 寵姬 韓夫人은 특히 술을 좋아하여 곧잘 皇帝를 모시며 술을 마셨는데 常侍가 정무를 아뢰는 모양이라도 보면 문득 노하며 ‘황제께서 지금 나랑 술을 드시는데 꼭 이때 일거리를 갖고 오는가?’ 하고는 일어나 책상을 쳐서 부서뜨리곤 하였다.”라고 하였다. 《列女傳》의 기록도 대개 같다.[趙曦明]
역주23 明德馬后 : 東漢 시기 明帝(A.D. 27~75)의 皇后 馬氏(A.D. 38~79)이다. 明德皇后, 明德太后, 馬太后, 馬貴人 등으로도 불렸다. 책을 읽고 사리에 밝아 皇后가 되자 항상 정무를 토론하여 총애와 공경을 함께 받았으며, 章帝가 즉위하고 太后로 추존되어서도 죽을 때까지 謙虛하고 儉約하였다.[趙曦明]
역주24 梁夫人嫕(예) : 《列女傳》에 의하면 “梁夫人 嫕는 梁竦의 딸이자 樊調의 妻로, 東漢 시기 孝和皇帝(A.D. 88~106 재위)의 이모요, 恭懷皇后의 同腹 누이이다. 恭懷皇后가 和帝를 낳은 뒤 竇后가 專橫하려고 梁氏를 모함하였으나, 나중에 竇后가 죽자 嫕는 民間에서 上書를 올려 하소연하였다.”라고 하였다.[趙曦明]
역주25 羼(찬) : 段玉裁의 《說文解字注》 4篇上 〈羼篆 下〉에서 이르길 “羼이란 羊이 서로 섞이는 것이다.……일설에는 서로 앞으로 나가는 것이라고도 한다.……《顔氏家訓》에서 이르길 ‘전적에 착오와 혼란이 생긴 것은 모두 後代의 사람들이 뒤섞어 넣은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서로 앞으로 나간다.’는 것이 引伸된 뜻이다.”라고 하였다.[王利器]

안씨가훈(2)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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