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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氏家訓(1)

안씨가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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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나라의 울타리가 된 張延雋
之爲진주晉州, , 鎭撫疆, 儲積器用, 愛活黎民, 矣。
群小不得行志, 同力遷之。
旣代之後, 公私擾亂, 북주師一擧,
북제亡之迹, 啓於是矣。


7. 나라의 울타리가 된 張延雋
장연준張延雋진주晉州행대좌승行臺左丞으로 있으면서, 최고 장수를 보좌하여 국경 지역을 안정시키고 기물을 비축하여 백성들을 아끼고 살게 해주었는데, 그 위엄이 한 나라에 필적할 정도였다.
소인배들은 자기 뜻대로 할 수 없게 되자, 힘을 합쳐 그를 다른 곳으로 보내버렸다.
그가 교체되고 난 후 민관民官이 혼란해지자, 북주北周의 군사들이 일거에 공격하여 진주晉州를 먼저 진압하였다.
북제北齊 멸망의 자취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역주
역주1 張延雋(준) : 《資治通鑑》 127에서 “이에 앞서 晉州行臺左丞 張延雋은 공평하고 정직하며 부지런하고 민첩하였으며, 비축하여 대비하고 늘 준비가 되어 있어, 백성들은 편안히 생업을 꾸려나갔고 국경 내에 걱정이 없었지만, 여러 寵臣들이 그를 미워하여 바꾸게 되니, 이로 말미암아 公私가 어지럽고 시끄러워졌다.”라 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顔氏家訓》의 글을 근거로 한 것 같다.[嚴式誨]
正史에는 이 인물에 대한 기록이 없다.[역자]
역주2 : 준
역주3 行臺左丞 : 《通典》 22에서 “行臺省은 魏와 晉에 있었다.…그 관리로는 令僕射를 두었는데, 尙書丞郞이 늘 그때그때 통제하였다.…대체로 관할지역에 따라서 바깥 州에 설치하고 尙書의 일을 행하였다.”라 하였다. 《雲麓漫鈔》 2에서는 “《南史》에서는 조정에서 大臣을 파견하여 바깥 諸軍의 일을 감독하는 것을 일컬어 行臺라 하였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4 匡維主將 : 《職官分紀》 8에 ‘匡維主將’을 인용하면서 ‘愛養將士’라 해놓았고, 《事文大全》 己1에서는 ‘匡’을 ‘主’로 誤記하였다.[王利器]
역주5 : 역
역주6 隱若敵國 : 《後漢書》 〈吳漢傳〉에서 “여러 장수들이 전투가 불리함을 알았고 그중에는 많이 두려워하는 이도 있었는데, 吳漢은 의기가 변함이 없었다. 황제는 이때 사람을 보내어 大司馬가 무엇을 하는지 살펴보게 하였는데, 돌아와 지금 공격무기를 점검하고 있다고 하자, 이에 탄복을 하면서 ‘吳公은 의지가 굳센 것이 남달라서, 위엄이 혼자서 나라에 필적할 만하구나.[隱若一敵國矣]’라고 했다.”라 하였다.[趙曦明]
章懷太子의 注에서 “隱은 위엄 있고 무거운 모습으로, 그 위엄과 무거움이 혼자서 나라에 필적할 만하다는 말이다.”라 하였다.[王利器]
《漢書》 〈游俠傳〉에서 “劇孟은 豪俠으로 유명하였다. 吳‧楚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천하가 소란하였는데, 大將軍이 그를 얻게 되자 혼자서 나라에 필적할 만하였다.[若一敵國然]”라 하였다.[盧文弨]
여기서 隱은 威嚴, 威勢의 뜻이고, 敵은 대등하다, 맞선다는 뜻의 동사로 쓰였다.[역자]
역주7 此鎭先平 : 《北史》 〈周本紀〉에서 “武帝 建德 5년 10월, 황제가 군사들을 총동원하여 東伐에 나서, 內使 王誼로 하여금 晉州城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이날 밤 晉州城 위에 무지개가 뜨더니 머리는 남쪽을 향하고 꼬리는 궁궐로 들어갔다. 황제는 성으로 가서 전투를 독려했다. 北齊의 行臺左丞 侯子欽이 나와서 항복하였다. 壬申日 晉州刺史 崔嵩이 밀사를 보내어 귀순할 뜻을 알려오자, 上開府 王軌가 거기에 응하여 날이 채 밝기 전에 성에 올라 마침내 晉州를 평정하였다. 甲戌日에 上開府 梁士彦을 晉州刺史로 삼아 그 지역을 진압하였다.”라 하였다.[趙曦明]

안씨가훈(1)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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