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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氏家訓(2)

안씨가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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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모님 산소와 집안 형편
2. 부모님 산소와 집안 형편
돌아가신 부모님은 모두 아직 고향인 건업建鄴의 선산으로 돌아가시지 못하고, 객지인 강릉江陵의 성곽 동쪽에 묻혀 계신다.
末, 已, 欲營
승성承聖 말에 이미 〈산소를〉 양도揚都로 옮기고 싶다고 글을 올리고 이장移葬을 하려고 하였다.
蒙詔賜銀百兩, 已於揚州小郊北地, 便値淪沒, 流離如此, 數十年間, 絶於還望。
허락이 떨어지면서 백 냥까지 하사하시어 양주揚州 교외의 작은 마을 북쪽 땅에서 이미 기와까지 굽고 있었는데, 의 멸망을 만나 이렇게 떠돌아다닌 지가 수십 년이니 돌아갈 희망조차 끊어졌다.
今雖, , 何由辦此資費?
이제 비록 통일은 되었지만 집안 형편이 곤궁하니 무슨 수로 이장해 모실 비용을 마련할 수 있겠느냐?
且揚都汙毁, 無復, 還被, 未爲得計。
또한 양도揚都는 파괴되어 남은 것 하나 없고, 게다가 낮고 습한 곳에 모시는 것이 반드시 좋은 생각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自咎自責, 。計吾兄弟, 不當仕進。
내 자신에 대한 책망과 질책이 심장을 꿰뚫고 골수에 사무친다. 생각해보면 우리 형제들은 벼슬에 나가서는 안 되었다.
但以門衰, 骨肉單弱, 之內, 傍無一人, 他鄕, 無復
다만 집안이 기울어 형제들은 외롭고 약했고 오복五服 내에 방계 친척도 하나 없었으며, 타향에 옮겨와서 살다 보니 기댈 만한 조상의 음덕蔭德도 없었다.
使汝等沈淪, 以爲先世之恥。
너희들로 하여금 천한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한다면 이는 선조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人間, 不敢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서 〈벼슬을〉 감히 그만두지 못하였던 것이다.
兼以北方政敎嚴切, 全無隱退者故也。
아울러 북방은 정교政敎가 엄격해서 은퇴하는 이가 전혀 없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역주
역주1 先君先夫人皆未還建鄴舊山 : 顔之推의 9대조인 顔含이 晉 元帝를 따라 江南으로 건너왔으므로, 建鄴이 그의 고향이다. 《北齊書》 〈顔之推傳〉의 〈觀我生賦〉에서 “長干을 지나다가 마음 갑갑하였고, 白下에 성묘하러 갔다가 발길 떼지 못하였다.”라 하였고, 自注에서 “靖侯 이하 7代의 산소가 모두 白下에 있다.”라고 했다.[盧文弨]
舊山은 오늘날의 故鄕과 같은 말이다.[王利器]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해가 아직 建鄴의 선산으로 돌아오지 못했다는 말이다.[역자]
역주2 旅葬 : 객지에서 장사 지내다.[역자]
역주3 承聖 : 梁 元帝의 年號(552~555)이다.[역자]
역주4 : 上奏文으로, 대개 군주의 글이나 하사품을 받고서 자신의 마음을 담아 쓰는 경우가 많다.[역자]
역주5 揚都 : 南北朝 시대에 南朝의 수도였던 建鄴을 일컫던 명칭이다.[역자]
역주6 遷厝(조) : 厝는 措로도 쓰는데, 靈柩를 잠깐 둔다는 뜻이다. 遷厝는 바로 무덤을 옮기는 일이다.[王利器]
移葬한다는 뜻이다.[역자]
역주7 燒塼 : 三國 吳나라 때부터 陳‧隋代에 이르기까지 江南에서는 무덤 내에 벽돌을 쓸 경우 직접 구워서 사용하였고, 벽돌의 일부에는 반드시 매장 연월일과 亡者의 성씨를 새겼다. 또 南朝의 대귀족은 3만 장 정도의 벽돌을 사용하였고, 세 번 정도 구워야 했으며, 또 천 명의 노동력이 필요하였다.[陳直]
역주8 本朝 : 顧炎武는 “옛사람들은 섬기던 나라를 일컬어 本朝라 하였는데, 魏의 文欽은 〈降吳表〉에서 ‘대대로 魏나라의 은혜를 받고서도 本朝를 도울 수가 없었으니, 부끄러움을 안고 위를 우러러보고 아래를 굽어보아도 몸 둘 데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또 吳나라가 망한 후에 蔡洪이 刺史 周俊에게 준 편지에서, 吳朝가 賢良을 천거했다고 말한 것이 이것이다. 顔之推가 北齊와 北周에서 계속 벼슬을 하였으면서 梁을 本朝라고 칭한 것은, 아마 신하로서의 표현이라 고칠 수가 없었을 것이며, 당시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불만스럽게 여기지는 않았다.”라 했다. 《日知錄》 13 참조.[徐鯤]
여기서는 梁朝를 가리킨다.[역자]
역주9 混一 : 《資治通鑑》에서 “隋 文帝 開皇 7년에 梁을 멸하고, 그 임금 蕭琮(종)을 폐위시켜 莒(거)公으로 삼았다. 8년 겨울 10월에 晉王 廣을 淮南行省尙書令 겸 行軍元帥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陳나라를 치게 하여 9년 正月에 그 임금 叔寶를 사로잡으니, 陳나라가 평정되었다.”라 하였다.[趙曦明]
《晉書》 〈恭紀〉에서 “천지사방을 섞어 하나로 만들었다.[混一六合]”라 했고, 《隋書》 〈煬紀〉에서 “수레와 문자가 하나로 통일되었다.[車書混一]”라고 했다. 混一이란 뒤섞이어 통일됨을 말한다.[王利器]
隋에 의한 南北朝의 통일을 가리킨다.[역자]
역주10 家道 : 胡式鈺의 《竇存》 4에서 “집안의 재물[家資]을 家道라 한다. 陸士衡이 〈百年歌〉에서 ‘자손은 창성하고 집안의 재물은 풍성하다.[家道豐]’라고 한 것이나 《顔氏家訓》에서 운운한 것은, 《周易》에서 ‘남편은 남편답고 아내는 아내다우면, 家道가 바르게 된다.’라고 한 것과는 다르다.”라 하였다.[王利器]
집안의 재산이나 집안 형편을 일컫는 말이다.[역자]
역주11 罄(경)窮 : 곤궁, 궁핍의 뜻이다.[역자]
역주12 奉營 : 여기서는 제사를 받들고 이장을 하는 것을 말한다.[王利器]
역주13 孑遺(혈유) : 《詩經》 〈大雅 雲漢〉에서 “周나라에 남은 백성, 하나도 없구나.[靡有孑遺]”라 하였고, 傳에서 “외로이[孑然] 홀로 되었다.”라 하였으며, 《正義》에서는 《釋訓》을 인용하여 “孑然은 외로운 모습[孤獨之貌]이다.”라 했다. ‘靡有孑遺’란 주워 얻을 만한 잔해조차도 없다는 말이다. 《隋書》 〈地理志 下〉에 “丹陽郡은 東晉 이후로 郡을 설치하여 揚州라 하였는데, 陳을 평정하고 나서는 다 갈아엎어 개간하도록 명하고, 다시 石頭城에다가 蔣州를 설치하였다.”라 한 기록이 있다.[王利器]
남은 것, 즉 잔해라는 뜻이다.[역자]
역주14 下溼 : 옛사람들은 다들 江南이 지대가 낮고 습하다고 했다. 《史記》 〈屈原賈生列傳〉에서 두 번이나 “長沙는 卑濕하다.”라 했다. 또 〈淮南衡山列傳〉에서는 “南方은 卑濕하다.”라고 했으며, 또 〈貨殖列傳〉에서도 “江南은 卑濕하다.”라고 했다. 《陳書》 〈蕭詧傳〉에서는 〈愍時賦〉를 인용하여 “남방은 지대가 낮아[南方卑] 屈原을 탄식하게 하였고, 長沙는 습하여[長沙溼] 賈誼를 슬프게 했다.”라 하였다. 下溼은 卑溼과 같다.[王利器]
지대가 낮고 공기가 습하다.[역자]
역주15 貫心刻髓 : 《潛夫論》 〈交際〉에서 “정성을 서로에게 쏟아서, 심장을 꿰뚫고 골수에 이른다.[貫心達髓]”라 하였는데, 여기서 이것을 활용한 것이다.[王利器]
역주16 五服 : 고대 喪禮에 있어 亡者와의 親疏에 따라 입는 다섯 단계의 喪服, 즉 斬衰(참최), 齊衰(자최), 大功, 小功, 緦麻(시마)를 말한다. 본서 제6 〈風操〉편 22 참조.[역자]
역주17 播(파)越 : 《後漢書》 〈袁術傳〉에서 “天子가 播越하였다.”라고 하였고, 李賢의 注에서 “播는 옮긴다[遷]는 뜻이고, 越은 달아난다[逸]는 뜻이다. 그 거처를 잃었다[失所居]는 말이다.”라 했다.[王利器]
거처를 옮기다.[역자]
역주18 資廕(음) : 《周書》 〈蘇綽傳〉에서 “오늘 뽑아서 천거하는 뜻은, 조상의 음덕[資蔭]에 한정하지 않고 오직 인재를 얻자는 데에 있다.”라 했다. 《資治通鑑》 111의 胡三省 注에서 “資는 문벌지위[門地]가 밑천이 된다는 말이다.”라 하였다.[王利器]
조상의 음덕, 혹은 조상의 음덕으로 얻은 벼슬을 뜻한다.[역자]
역주19 廝(시)役 : 《春秋公羊傳》 宣公 12년의 何休 注에서 “풀을 베어 덮는 사람을 廝라 하고, 물을 긷는 사람을 役이라 한다.”라고 했다.[盧文弨]
하찮은 일, 또는 그런 일을 하는 하인이나 머슴을 뜻한다.[역자]
역주20 靦(전)冒 : 靦은 얼굴이 추하다는 뜻이다.[盧文弨]
부끄러움을 무릅쓰다.[역자]
역주21 墜(추)失 : 본서 제13 〈止足〉편 3에서 “나는 근래에 黃門侍郞이 되었는데 진작에 그만두고 물러났어야 했지만, 그때에는 객지에 기탁해서 사는 처지로서 비방을 당할까 두려웠고, 그만둘 생각은 했어도 그럴 만한 여유가 거의 없었다.”라고 한 것도, 여기서 말한 것과 더불어 모두 ‘사람들 사이에서 부끄러움을 무릅쓴[靦冒人間]’ 예로 자연스럽게 풀이가 된다.[王利器]
〈관직에서〉 실족하여 떨어지다. 그르쳐서 떨어지다. 여기서는 벼슬을 그만둔다는 뜻이다.[역자]

안씨가훈(2)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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