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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氏家訓(1)

안씨가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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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餘地가 있어야
人足所履, 不過數寸, 然而, 必, 每沈溺於川谷者, 何哉?
君子之立己, 如之。
至誠之言, 人未能信;至潔之行, 物或致疑, 皆由言行聲名, 無餘地也。
吾每爲人所毁, 常以此自責。


2. 餘地가 있어야
사람이 발로 밟는 곳은 몇 치에 지나지 않는데 지척인 길임에도 늘 벼랑에서 넘어지고, 외나무다리에서 매번 계곡에 빠지는 것은 왜일까?
그 주변에 여지餘地가 없기 때문이다.
군자君子가 자신을 세워나가는 일도 어쩌면 이와 같을지 모른다.
지극히 참된 말인데도 남들은 믿지 못하고, 지극히 깨끗한 행실인데도 남들은 혹 의심할 수도 있는데, 〈이는〉 모두 언행言行명성名聲에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늘 남들의 비난을 받을 때마다 언제나 이 점을 자책한다.
만약 대로를 더 열고 배다리를 더 넓힐 수 있었다면, 자로子路 말에 대한 신뢰성이 제단祭壇에 올라서 맺는 맹약盟約보다도 더 존중받고, 조희趙熹가 성을 항복시킨 것이 적의 예봉을 꺾은 장수보다 더 훌륭한 것처럼 〈나도 신뢰를 얻게〉 되었을 것이다.


역주
역주1 咫尺之途 : 거리가 얼마 안 되는 가까운 길이다. 咫는 尺의 10분의 8에 해당하는 8치의 길이를 뜻한다.[역자]
역주2 顚蹶 : 넘어지다.[역자]
역주3 崖岸 : ‘벼랑, 낭떠러지’의 뜻이다.[역자]
역주4 拱把之梁 : 《孟子》 〈告子 上〉에서 “두 줌 혹은 한 줌 굵기[拱把]의 오동나무와 가래나무”라 한 것이 拱과 把를 이어 쓴 것이다. 何焯은 외나무다리를 말하는 것으로 보았고, 盧文弨는 梁을 다리[橋]라고 하였다. 양손으로 에워싸는 것을 拱이라 하고 한손으로 쥐는 것을 把라 한다. 《淮南子》 〈繆稱訓〉에서 “그러므로 외나무다리[獨梁]를 건너갈 때처럼, 아무도 없다고 해서 그 자세를 함부로 할 수 없다.”라 하였고, 高誘의 注에서 “獨梁은 외나무다리이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5 爲其旁無餘地故也 : 《莊子》 〈外物〉에서 “땅은 참으로 넓고 크지만,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은 발로 밟고 다닐 정도의 넓이뿐이다. 그렇다고 발로 밟는 곳만 남겨두고 〈나머지를〉 황천에 이를 만큼 깊이 파내어버린다면, 그래도 사람이 쓸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무용한 것이 유용하다는 것도 분명해진다.”라 하였는데, 顔之推의 글은 바로 莊子의 뜻을 취한 것이다.[劉盼遂]
여기서 故는 ‘까닭, 이유’의 뜻이다.[역자]
역주6 抑亦 : 어쩌면 …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일지도 모른다.[역자]
역주7 方軌之路 : 《戰國策》 〈齊策〉에서 “蘇秦이 齊 宣王에게 ‘秦나라가 齊나라를 공격하게 되면 亢父의 험한 지역을 지나가게 되는데, 수레는 두 대가 나란히[方軌] 갈 수가 없고 말은 두 필이 함께 지나갈 수 없어서, 백 명이 험한 곳을 막으면 천 명이 지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유세하였다.”라 하였다.[趙曦明]
수레 두 대가 나란히 지나갈 수 있는 넓은 길, 즉 大路를 뜻한다.[역자]
역주8 造舟之航 : 《詩經》 〈大雅 大明〉에서 “배를 잇대어[造舟] 다리로 삼는다.”라 하였고, 傳에서 “천자는 배를 잇대고[造舟], 제후는 배 네 척을 매고, 대부는 배 두 척을 나란히 하고, 士는 배 한 대로 한다.”라 하였다. 《正義》에서는 “모두 《爾雅》 〈釋水〉에 나오는 글이다. 李巡은 ‘배를 나란히 이어서 건너가는 것을 造舟라 하였다.’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造舟란 강에다가 배를 나란히 이어놓고 그 위에 널판을 올린 것으로, 오늘날의 浮橋와 같다. 杜預는 ‘黃河의 다리를 말한 것이다.’라고 했다.”라 하였다. 《方言》 9에서는 “舟를 關東 지역에서는 航이라 하기도 한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9 仲由之言信 : 《春秋左氏傳》 哀公 14년에서 “小邾의 射이 句繹의 땅을 가지고 〈魯나라로〉 망명해 와서 말하기를 ‘만일 子路로 나와 약속한다면 나는 맹약 같은 것은 하지 않겠소.’라 하였다. 子路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하였으나 子路는 거절하였다. 季康子는 冉有를 시켜 그에게 말하기를 ‘〈우리 魯나라가〉 千乘의 나라인데도 맹약을 믿지 않고 그대의 말을 믿겠다는데, 그대에게 욕될 일이 무엇이겠소?’라 하였다. 子路가 이에 대답하기를 ‘魯나라가 小邾와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저는 그 이유를 묻지 않고 그 성 아래에서 싸우다 죽어도 좋습니다. 射은 불충한 신하인데 그의 말을 들어준다면 이는 그를 옳다고 하는 것이 되므로, 저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10 登壇之盟 : 《春秋公羊傳》 莊公 13년의 何休 注에서 “흙 기초를 석 자 쌓고, 흙 계단을 3층으로 한 것을 壇이라 한다. 會同에는 반드시 壇이 있어야 하고, 오르거나 내려올 때 揖讓을 하면서 어르신이라고 칭하며 상대를 접대하는 것은, 그 공경하는 마음을 기르기 위해서이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11 趙熹之降城 : 《後漢書》 〈趙熹傳〉에서 “舞陰의 大姓인 李氏가 성을 지키며 굴복하지 않자, 更始는 柱天將軍 李寶를 보내어 항복시키려 했지만 따르려 하지 않고서 ‘宛 지방 趙氏네 외로운 손자 熹가 신의가 있기로 유명한데, 그에게 항복하고 싶소.’라 하였다. 이에 趙熹를 舞陰으로 보내자 마침내 李氏가 항복하였다.”라 하였다.[沈揆]
역주12 折衝之將 : 衝은 衝車이다. 《晏子》 〈雜上〉에서 “孔子께서 ‘의전 행사장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천리 바깥을 안다고 한 것은 晏子를 두고 한 말이다. 적의 예봉을 꺾었다[折衝]고 할 만한다.’라고 말씀하셨다.”라 하였다.[盧文弨]

안씨가훈(1)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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