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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1)

통감절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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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酉]三年이라
燕人 共立太子平하니 是爲昭王이라
昭王 於破燕之後 卽位하야 弔死問孤하고 與百姓同甘苦하며 卑身厚幣하야 以招賢者할새 謂郭隗曰 齊因孤注+[頭註]與臣民言則稱孤하니 孤者 特立无德之稱이라之國亂하야 而襲破燕하니
孤極知燕小力少하야 不足以報 然誠得賢士하야 與共國하야 以雪先王之恥 孤之願也 先生 視可者하라
得身事之호리라
郭隗曰
古之人君 有以千金으로 使涓人注+[釋義]韋昭曰 涓人 今中涓也 漢儀註 天子有中涓이라한대 〈顔〉師古曰 涓 潔也 主居中而潔除之人이라하야 求千里馬者러니
馬已死 買其骨五百金而返이어늘 君大怒한대
涓人曰 死馬 且買之 況生者乎잇가
馬今至矣리이다하더니 不期年 千里之馬至者三이라하니이다
今王 必欲致士인댄 先從隗始하시면 況賢於隗者 豈遠千里哉리잇고
於是 昭王 爲隗하야 改築宮而師事之하니 於是 士爭趣(趨)燕이라
樂毅 自魏往하고 劇辛 自趙往하니 昭王 以樂毅爲亞卿하야 任以國政하다
[史略 史評]愚按 燕昭遭家不造하야 破滅之餘 爲衆所立하니 卽欲爲君父報仇라도 宜若衰微而不能濟也
이나 弔死問生하고 親賢下士하며 委任樂毅하야 使之伐齊하야 六月之間 下齊七十餘城하니 其治效 猶若是之速이온 而況强大之國 聖明之君 能用天下之賢才者乎
詩曰 無競維人이면 四方其訓之라하니 豈不信哉


3년(기유 B.C.312)
나라 사람들이 함께 태자太子 을 세우니 이가 소왕昭王이다.
소왕昭王나라가 격파된 뒤에 즉위하여 죽은 사람을 조문하고 고아들을 위문하며, 백성들과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 하며, 몸을 낮추고 폐백을 후하게 하여 현자賢者를 부를 적에 곽외郭隗에게 말하기를 “나라는 (과인)의注+[頭註]군주가 신하와 백성들을 상대하여 말할 때에 라고 칭하니, 는 외로이 서서 이 없는 칭호이다.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우리 나라를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과인은 나라가 작고 힘이 부족하여 보복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으나 진실로 어진 선비를 얻어 나라를 함께 다스려서 선왕의 치욕을 씻는 것이 과인의 소원이니, 선생은 합당한 자를 살펴보라.
몸소 그를 섬기겠다.” 하였다.
이에 곽외郭隗가 말하였다.
“옛날 인군人君 중에 천금千金을 가지고 연인涓人注+[釋義]위소韋昭가 말하였다. “연인涓人은 지금의 중연中涓이다.” 《한의漢儀》의 에 “천자天子중연中涓이 있다.” 하였는데, 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은 깨끗함이니, 궁중에 있으면서 깨끗이 소제하는 것을 맡은 사람이다.” 하였다. 시켜 천리마千里馬를 구하게 한 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천리마千里馬가 이미 죽었으므로 그 뼈를 오백금五百金에 사 가지고 돌아오니, 군주가 크게 노하였습니다.
이에 연인涓人이 아뢰기를 ‘죽은 말도 샀으니 하물며 산 놈이겠습니까?
천리마千里馬가 이제 이를 것입니다.’ 하였는데, 1년이 못되어 천리마千里馬가 이른 것이 세 필이었습니다.
지금 왕께서 반드시 어진 선비를 초치하려고 하신다면 먼저 이 곽외郭隗부터 시작하신다면 하물며 곽외郭隗보다 어진 자가 어찌 천리千里를 멀다고 여기겠습니까?”
이에 소왕昭王곽외郭隗를 위하여 궁궐을 개축하고 스승으로 섬기니, 이에 선비들이 다투어 나라로 달려왔다.
그리하여 악의樂毅나라에서 가고 극신劇辛나라에서 가니, 소왕昭王악의樂毅아경亞卿으로 삼아 국정을 맡겼다.
[史略 사평史評]내가 살펴보건대 나라 소왕昭王은 국가의 불행함을 만나서 국가가 파멸된 뒤에 민중에 의해 옹립되었으니, 만일 군부君父를 위하여 원수를 갚고자 해도 마땅히 미약하여 이루지 못했을 듯하다.
그러나 나라가 죽은 사람을 조문하고 산 사람을 위문하며, 어진 이를 친히 하고 선비들에게 자기 몸을 낮추며, 악의樂毅에게 국정國政을 맡겨서 그로 하여금 나라를 정벌하게 하여 6개월 만에 나라 70여 개의 을 함락하였으니, 그 다스림의 효과가 오히려 이와 같이 신속하였는데, 하물며 강대한 나라와 성명聖明한 군주가 천하의 어진 이와 재주 있는 이를 등용함에 있어서랴.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이보다 더 강함이 없는 사람(훌륭한 인재)을 등용하면 사방四方에서 그를 법으로 삼는다.” 하였으니, 어찌 진실이 아니겠는가.


역주
역주1 : 春秋時代에 諸侯가 자신을 칭하여 寡人이라고 하였는데, 凶事가 있으면 孤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후대에는 점점 구별이 없어져 혼용하였다.
역주2 : 春秋時代에 諸侯가 자신을 칭하여 寡人이라고 하였는데, 凶事가 있으면 孤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후대에는 점점 구별이 없어져 혼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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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유] 3년 491

통감절요(1)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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