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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4)

통감절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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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寅]二年이라 〈魏黃初三年이요 吳大帝黃武元年이라
舊國一이요 新國一이니 凡二僭國이라
五月 帝自巫峽, 建平注+[釋義]巫峽 在夔州巫山縣西하니 首尾百六十里 圖經云 巫山十二峯上 有神女廟, 陽雲臺하니 在縣西北五十步 建平 縣名이라 屬南郡이러니 吳置建平郡於巫縣하니 今歸州是也으로 連營至夷陵界하야 立數十屯하고 自正月 與吳相拒하야 至六月不決이라
帝遣吳班하야 將數千人하고 於平地 立營하니 吳將卒 皆欲擊之어늘 陸遜曰 此必有이니 且觀之하라
帝知其計不行하고 乃引伏兵八千하야 從谷中出한대 遜曰 所以不聽諸君擊之者 之必有巧故也로라
○ 閏月 將進攻漢軍한대 諸將 竝曰
攻備 當在初어늘 今乃令入五六百里하야 相守經七八月하야 其諸要害 皆已固守하니 擊之 必無利矣리이다
遜曰 備是猾虜
事嘗多하고 其軍始集 思慮精專하야 未可干也어니와 今住已久 不得我便하야 兵疲意沮하니
計不復生이라 注+[釋義]左傳襄十四年 譬如捕鹿하야 晉人角之하고 諸戎掎之라한대 註云 角 謂禦其上이니 猶執鹿之角이요 謂亢其下 猶戾鹿之足이라此寇 正在今日이라하고 乃先攻一營이러니 不利
諸將皆曰 空殺兵耳라한대 遜曰 吾已曉破之之術이라하고
乃勅人하야 各持一把注+[通鑑要解] 掌握也하고 以火攻拔之하야 斬張南, 馮習等하고 破其四十餘營하니 漢將杜路, 劉寧等 窮逼請降이라
帝升馬鞍山注+[釋義]馬鞍山 在今峽州夷陵縣이라하야 陳兵自繞어늘 督促諸軍하야 四面蹙之하니 土崩瓦解하야 死者萬數
帝夜遁하야 僅得入白帝城하니 其舟船器械 水步軍資 一時略盡하고 尸骸塞江而下러라
帝大慙恚曰 吾乃爲陸遜所折辱하니 豈非天耶
○ 初 諸葛亮 與尙書令法正으로 好尙不同이나 而以公義相取하야 每奇正智術이러니 及帝伐吳而敗하얀 正已卒이라
亮歎曰 孝直注+[釋義]法正字也 若在 必能制主上東行이요 就使東行이라도 必不傾危矣라하더라
○ 初 魏主丕 聞漢兵樹連營七百餘里하고 謂群臣曰 備不曉兵이로다
豈有七百里營으로 可以拒敵者乎
包原濕險阻而爲軍者 爲敵所禽하나니 兵忌也
孫權上事 今至矣注+[頭註]謂封上破漢之事 今將到來也라하더니 後七日 吳破漢書到러라
○ 吳王侍子注+[通鑑要解]送子入侍하니 質子也 不至어늘 魏主丕怒하야 遂伐之하다
○ 吳王 使使聘于帝어늘 帝遣使報之하니 吳, 漢 復通하다


장무章武 2년(임인 222) - 나라 황초黃初 3년이고, 나라 대제大帝 황무黃武 원년元年이다.
오래된 나라가 하나이고 새로운 나라가 하나이니, 참람한 나라가 모두 둘이다. -
5월에 소열제昭烈帝무협巫峽건평建平注+[釋義]무협巫峽기주夔州 무산현巫山縣의 서쪽에 있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160리이다. 《도경圖經》에 이르기를 “무산巫山 열두 봉우리 위에 신녀神女의 사당과 양운대陽雲臺가 있으니, 이 산은 의 서북쪽 50보 지점에 있다. 건평建平의 이름이다. 남군南郡에 속하였는데 나라가 건평군建平郡무현巫縣에 두었으니, 지금의 귀주歸州가 이곳이다.” 하였다. 으로부터 진영을 연결하여 이릉夷陵의 경계에 이르러서 수십 개의 주둔지를 세우고 정월부터 나라와 서로 대치하여 6월에 이르도록 결판이 나지 않았다.
소열제昭烈帝오반吳班을 보내어 수천 명을 거느리고 평지에 진영을 세우게 하니, 나라의 장졸將卒들이 모두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육손陸遜은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속임수가 있을 것이니 우선 두고 보자.” 하였다.
소열제昭烈帝가 이 계책이 시행되지 못할 줄을 알고 마침내 복병伏兵 8천 명을 이끌고 골짜기 가운데에서 나오자, 육손陸遜이 말하기를 “내가 제군諸君들의 공격하자는 소청을 따르지 않은 까닭은 저들에게 반드시 계교計巧가 있음을 헤아렸기 때문이다.” 하였다.
○ 윤달에 육손陸遜이 장차 진군하여 촉한蜀漢의 군대를 공격하려 하자, 제장諸將들이 모두 말하기를
유비劉備를 공격하려면 마땅히 초기에 했어야 하는데, 이제 저들로 하여금 국경을 5, 6백 리나 들어오게 하여 서로 대치한 지 7, 8개월이 지나서 여러 요해처를 모두 이미 굳게 지키고 있으니, 저들을 공격하면 반드시 승리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육손陸遜이 말하기를 “유비劉備는 교활한 놈이다.
일찍이 싸우는 일을 경험한 것이 많고, 그 군사들이 처음 집결함에 생각이 정밀하고 전일하여 범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주둔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우리에게서 유리한 곳을 얻지 못하여 병사들이 지치고 의욕이 저상되었으니, 계책을 다시 내지 못할 것이다.
이 적을 기각掎角(앞뒤에서 몰아침)注+[釋義]춘추좌전春秋左傳양공襄公 14년조에 “비유하면 사슴을 잡는 것과 같아서 나라 사람들은 뿔을 잡고 여러 융족戎族들은 발을 잡는다.” 하였는데, 에 이르기를 “은 그 위를 막음을 이르니 사슴의 뿔을 잡는 것과 같고, 는 그 아래를 옥죔을 이르니 사슴의 발을 비트는 것과 같다.” 하였다. 하는 것이 바로 오늘에 달려 있다.” 하고는 마침내 먼저 한 진영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제장諸將들이 모두 말하기를 “부질없이 병사만 죽일 뿐입니다.”라고 하자, 육손陸遜이 말하기를 “내 이미 격파할 방법을 깨달았다.” 하고는
마침내 사람들에게 명하여 각각 한 줌注+[通鑑要解]는 손아귀로 쥐는 것이다. 의 띠풀을 잡게 하고 화공火攻으로 함락시켜 장남張南풍습馮習 등을 목 베고 40여 개의 진영을 격파하니, 촉한蜀漢의 장수 두로杜路유녕劉寧 등이 궁색하여 항복을 청하였다.
소열제昭烈帝마안산馬鞍山注+[釋義]마안산馬鞍山은 지금의 협주峽州 이릉현夷陵縣에 있다. 에 올라가서 군대를 진열하여 자기 주위를 둘러싸게 하였는데, 육손陸遜제군諸軍들을 독촉하여 사면으로 압박하니, 촉한蜀漢의 군대가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부서지듯 무너져서 죽은 자가 만 명으로 헤아려졌다.
소열제昭烈帝가 밤중에 도망하여 겨우 백제성白帝城으로 들어가니, 선박과 병장기와 수군水軍보병步兵의 군수물자를 삽시간에 모두 잃어버리고 시체가 강을 가득히 메우고 떠내려갔다.
소열제昭烈帝가 크게 부끄러워하고 분해 하며 말하기를 “내가 마침내 육손陸遜에게 꺾이고 모욕을 당하였으니, 일찍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 처음에 제갈량諸葛亮상서령尙書令 법정法正과는 좋아하고 숭상함이 똑같지 않았으나 공적인 의리로 서로 취하여(존중하여) 제갈량諸葛亮이 언제나 법정法正의 지혜와 술책을 기이하게 여겼는데, 소열제昭烈帝나라를 정벌하다가 실패함에 이르러서는 이때 법정法正이 이미 죽은 후였다.
제갈량諸葛亮이 한탄하기를 “효직孝直(法正)注+[釋義]효직孝直법정法正이다. 이 만약 살아 있었더라면 주상主上이 동쪽으로 출정하는 것을 반드시 제재했을 것이요, 가령 동쪽으로 출정했다 하더라도 반드시 위태롭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 처음에 위주魏主 조비曹丕촉한蜀漢의 군대가 700여 리에 목책木柵을 세워 진영을 연결했다는 말을 듣고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유비劉備병법兵法을 알지 못하는구나.
어찌 700리의 진영을 가지고 적을 막을 수 있는 자가 있겠는가?
언덕과 습지와 험조한 지형을 포괄하여 군대를 주둔시키는 자는 적에게 사로잡히기 마련이니, 이는 병가兵家에서 꺼리는 것이다.
손권孫權승전勝戰을 보고하는 글이 이제 이를 것이다.注+[頭註]일을 보고하는 것이 이제 이를 것이라는 것은 손권孫權촉한蜀漢을 격파한 일을 봉함하여 올리는 글이 이제 장차 도착할 것임을 이른다.”라고 하였는데, 7일 후에 나라가 촉한蜀漢을 격파했다는 글이 도착하였다.
오왕吳王시자侍子注+[通鑑要解]시자侍子는 아들을 보내 입시入侍하게 하는 것이니, 질자質子(볼모)이다. 가 이르지 않자, 위주魏主 조비曹丕가 노하여 마침내 나라를 정벌하였다.
오왕吳王사자使者를 보내어 소열제昭烈帝에게 빙문하자 소열제昭烈帝가 사자를 보내어 답하니, 나라와 촉한蜀漢이 다시 교통하였다.


역주
역주1 : 휼
역주2 : 췌
역주3 : 경
역주4 : 기
역주5 : 책

통감절요(4)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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