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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4)

통감절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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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未]二年이라
孫堅 進屯陽人注+[頭註]聚名이니하야 與董卓戰하야 大破之하다
進至雒陽하야 하니 奔還長安이어늘 遂軍魯陽하다
○ 劉表時爲荊州刺史
袁術 使孫堅擊表어늘 表遣黃祖逆戰하야 射堅殺之注+[頭註]袁術 與袁紹有隙하야 各立黨援以相圖 結公孫瓚하고 連劉表한대 術使堅擊表하다
○ 公孫瓚注+[頭註]渤海校尉 大破靑州黃巾하니 威名 大震이러라
○ 初 郡劉備注+[原註] 後爲昭烈帝하니라 中山靖王注+[頭註]名勝이니 景帝賈夫人之所生이라之後也
垂手下膝하고 顧自見其耳하며 有大志, 少語言하고 喜怒 不形於色이러라
嘗與公孫瓚으로 同師事盧植이라 由是 往見瓚한대 瓚以爲平原相하다
備少與河東關羽 涿郡張飛 相友善이러니 以羽, 飛 爲別部司馬하야 分統하다
備與二人으로 寢則同牀하야 恩若兄弟하며 而稠人廣坐 侍立終日하야 隨備周旋하고 不避艱險이러라
○ 公孫度注+[附註]遼東人이라 董卓 薦爲遼東太守한대 爲遼東郡所輕이어늘 度皆以法誅之하니 郡中震慄하며 東伐高句麗하고 西擊烏丸하야 威行海外하니라威行海外하니 中國人士避亂者 多歸之
北海管寧注+[頭註]字幼安이라 邴原, 王烈 皆往依焉하다
少時 與華歆爲友러니 嘗與歆共鋤菜라가 見地有金하고 揮鋤不顧하야 與瓦石無異로되 捉而擲之하니 以是 知其優劣이러라
王烈 器業注+[頭註]器局功業이라 過人하야 少時 名聞 在原, 寧之右하고 善於敎誘
鄕里 有盜牛者하야 主得之러니 盜請罪曰 刑戮 是甘이어니와 乞不使王彦方注+[頭註]烈字라하니라
聞而使人謝之하고 遺布一端注+[頭註]六丈曰端이니 一曰八丈也 又古以二丈爲端이라하다 問其故한대
烈曰 盜懼吾聞其過하니 有恥惡之心이라
旣知恥惡이면 則善心將生이라
與布하야 以勸爲善也로라
後有老父 遺劍於路러니 行道一人 見而守之
至暮 老父還尋得劍하고 怪之하야 以事告烈한대
使推求하니 乃先盜牛者也러라
諸有爭訟曲直 將質之於烈이라가 或至塗而反하며 或望廬而還하야 皆相推注+[通鑑要解] 朱子綱目 移也라하니라以直하야 不敢使烈聞之러라


초평初平 2년(신미 191)
손견孫堅이 전진하여 양인취陽人聚注+[頭註]양인陽人취락聚落의 이름이니, 양인취陽人聚는 3권 𢠸狐聚의 에 보인다. 에 주둔해서 동탁董卓과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손견孫堅이 전진하여 낙양雒陽에 이르러서 능묘陵墓를 청소하니 동탁董卓이 달아나 장안長安으로 돌아가자, 손견孫堅이 마침내 노양魯陽에 군대를 주둔하였다.
유표劉表가 이때 형주자사荊州刺史로 있었다.
원술袁術손견孫堅으로 하여금 유표劉表를 공격하게 하자, 유표劉表황조黃祖를 보내어 맞이해 싸워서 손견孫堅을 쏘아 죽였다.注+[頭註]원술袁術원소袁紹와 틈이 있자, 각각 지원하는 당여黨與를 세워서 서로 도모하였다. 원술袁術공손찬公孫瓚과 동맹을 맺고 원소袁紹유표劉表와 연합하였는데, 원술袁術손견孫堅으로 하여금 유표劉表를 공격하게 하였다.
공손찬公孫瓚注+[頭註]공손찬公孫瓚발해渤海교위校尉였다. 청주靑州황건적黃巾賊을 크게 격파하니, 위엄과 명성이 크게 떨쳐졌다.
○ 처음에 탁군涿郡유비劉備注+[原註]유비劉備는 뒤에 촉한蜀漢소열제昭烈帝가 되었다. 중산정왕中山靖王注+[頭註]중산정왕中山靖王은 이름이 이니, 경제景帝 가부인賈夫人의 소생이다. 의 후손이었다.
팔을 늘어뜨리면 무릎까지 내려오고 돌아보면 스스로 자신의 귀를 볼 수 있었으며 큰 뜻이 있고 말수가 적으며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감정을 얼굴빛에 드러내지 않았다.
일찍이 공손찬公孫瓚과 함께 노식盧植사사師事하였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공손찬公孫瓚을 찾아가 만났는데, 공손찬公孫瓚이 그를 평원상平原相으로 삼았다.
유비劉備는 젊어서 하동河東관우關羽, 탁군涿郡장비張飛와 서로 친했는데, 관우關羽장비張飛별부사마別部司馬로 삼아서 부곡部曲을 나누어 통솔하게 하였다.
유비劉備는 두 사람과 함께 잘 때에는 한 침상에서 자서 은혜가 형제와 같았으며, 여러 사람들이 많이 모여 앉아 있을 때에 관우關羽장비張飛유비劉備를 모시고 서서 날을 마쳐 유비劉備를 따라 주선周旋하고 어려움과 험함을 피하지 않았다.
공손탁公孫度注+[附註]공손탁公孫度요동遼東 사람이다. 동탁董卓이 천거하여 요동태수遼東太守를 삼으니 요동군遼東郡에서 경멸하였다. 공손탁公孫度가 모두 법대로 이들을 주벌하니 고을 안이 두려워하였으며, 동쪽으로 고구려高句麗를 정벌하고 서쪽으로 오환烏丸(烏桓)을 공격하여 위엄이 해외海外에 행해졌다. 해외海外에 위엄이 행해지니, 중국中國인사人士로서 피난하는 자들이 그에게 많이 귀의하였다.
북해北海관녕管寧注+[頭註]관녕管寧유안幼安이다. 병원邴原왕렬王烈이 모두 가서 그에게 귀의하였다.
관녕管寧은 젊었을 때에 화흠華歆과 친한 벗이 되었는데, 일찍이 화흠華歆과 함께 채소밭을 김매다가 땅속에 금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관녕管寧은 호미만 휘두를 뿐 금을 쳐다보지 아니하여 기와나 자갈과 다름없이 여겼으나 화흠華歆은 금을 주웠다가 던지니, 사람들이 이 일로써 그 우열優劣을 알았다.
왕렬王烈기국器局공업功業注+[頭註]기업器業기국器局공업功業이다.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서 젊었을 때의 명성이 병원邴原관녕管寧보다 위에 있었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유도하기를 잘하였다.
향리鄕里에 소를 훔친 자가 있었는데 소 주인이 이를 잡자, 도둑이 죄를 받기를 청하며 말하기를 “형벌은 달게 받겠으나 왕언방王彦方(王烈)注+[頭註]언방彦方왕렬王烈이다. 으로 하여금 알게 하지 말라.” 하였다.
왕렬王烈이 이를 듣고 사람을 시켜 사례하고 베 한 필注+[頭註]포백布帛의 길이가〉 6인 것을 이라 하니, 어떤 에는 8이라 하였고, 또 옛날에는 2이라 하였다. 을 주니, 혹자가 그 이유를 물었다.
왕렬王烈이 말하기를 “도둑이 자기 잘못을 내가 들을까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이미 을 부끄러워할 줄 알았으면 한 마음이 장차 생겨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삼베를 주어서 을 행하기를 권장한 것이다.” 하였다.
뒤에 노인이 길에서 을 잃어버렸는데, 길 가던 어떤 사람이 이것을 보고는 지키고 있었다.
저녁때가 되어서 노인이 다시 돌아와서 을 찾고는 기이하게 여겨 이 사실을 왕렬王烈에게 고하였다.
왕렬王烈이 사람을 시켜서 사실을 캐어 보니, 바로 예전에 소를 훔쳤던 자였다.
여러 사람들이 서로 곡직曲直을 쟁송할 때에 장차 왕렬王烈에게 질정하려고 하다가 혹은 중간에 되돌아오기도 하고, 혹은 왕렬王烈의 집을 바라보고는 돌아와서 모두 정직함으로써 서로 미루어注+[通鑑要解]주자朱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옮겨 주는 것이다” 하였다. 감히 왕렬王烈로 하여금 이 말을 듣지 못하게 하였다.


역주
역주1 三卷𢠸狐聚注 : 徐廣이 말하였다. “𢠸狐聚는 陽人聚에 가까우니, 洛陽 남쪽 150리에 있다.” 《括地志》에 “汝州 밖의 옛 梁城이 곧 𢠸狐聚이다.” 하였다. 秦나라 제도에 큰 고을을 鄕이라 하고, 작은 고을을 聚라 하였다.
역주2 掃除陵廟 : 전란에 적병에게 서울을 빼앗겼다가 다시 수복하면 王陵과 宗廟에 먼저 참배하고 소제한다.
역주3 涿 : 탁
역주4 部曲 : 古代의 군대 編制에, 大將軍의 진영에는 5部에 部마다 校尉 한 사람이 있었고, 部에는 曲이 있으며 曲에는 軍候 한 사람이 있었다.

통감절요(4)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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