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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9)

통감절요(9)

범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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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절요(9)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戊辰]〈晉, 岐, 淮南 稱唐天祐五年하고 梁開平二年이라
○ 蜀高祖王建武成元年이라
○ 是歲 西川稱蜀하니 凡五國, 五鎭이라
正月 晉王克用하니 其子存勖 嗣爲晉王하다
晉王 與諸將謀曰
上黨, 潞州 河東之藩蔽 無上黨이면 是無河東也
且朱溫所憚者 獨先王耳러니 聞吾新立하고 以爲童子未閑軍旅라하야 必有驕怠之心하리니 若簡精兵하야 倍道趣(趨)之하야 出其不意하면 破之必矣
取威定霸在此一擧하니 不可失也라하다
晉王 大閱士卒하야 帥周德威注+[頭註]都指揮使 하고 發晉陽하야 進兵直抵夾寨하야 塡塹燒寨하고 鼓譟而入하니 梁兵 大潰南走
失亡將校士卒 以萬計 委棄資糧器械 山積이러라
梁主聞夾寨不守하고 大驚이러니 旣而 歎曰 生子 當如李亞子注+[釋義]存勖小名이라 克用 爲不亡矣로다
至如吾兒하야는 豚犬耳라하니라
[史略 史評]史斷曰
克用 雖沙陀微種이나 奄有河東하야 巢寇之平 功爲第一이어늘 訴于朝廷而不獲伸하고 遂與賊梁相攻하야 積年不解
이나 安於爵列하야 爲唐純臣하야 每有除吏 恥行하야 必表聞朝廷이라
觀其答蜀主書컨대 曰 誓此一生 靡敢失節이라하니 此其忠義 上通於天이니 賢於一時方伯 遠矣
先儒稱其得人臣之體하야 述其忠義功烈하야 爲唐末第一流 蓋以此也니라
[史略 史評]胡氏曰
喪不二事 春秋於背喪而卽戎者 皆深譏之로되
惟其門庭之寇 存亡繫焉일새 然後 從權制而無避하니
若李存勖夾寨之戰 君子深有取者 與是類耳
蓋夾寨 距晉陽不百里하니 可謂危急之秋也
使存勖 於是時 執哀戚之常情하고 忽國家之大計하야 上黨淪陷이면 則晉陽不存하리니 又豈所以爲孝乎
是以 審緩急하고 量輕重하야 出奇制勝하야 以走梁師然後 霸基復安이라
君子美之하니 垂訓 大矣로다
○ 晉王 歸晉陽하야 休兵行賞하고 命州縣하야 擧賢才, 黜貪殘하고 寬租賦, 撫孤窮하고 伸寃濫, 禁姦盜하니 境內大治러라
○ 淮南張顥注+[頭註]左牙指揮使 弑弘農威王注+[頭註] 楊偓諡也 하고 立其弟隆演하야 爲留後注+[頭註]顥與徐溫으로 弑偓이러니 溫復攻顥하야 殺之하니라 하다
〈楊行密 據淮南이러니 其子偓 嗣爲弘農郡王하고 國號吳
後爲徐知誥所簒하야 遂爲南唐하니라
○ 契丹 〈耶律阿保機改名億이라
二年이라


무진(908) - 회남淮南나라 천우天祐 5년을 칭하였고, 나라는 개평開平 2년이다.
나라 고조高祖 왕건王建무성武成 원년元年이다.
○ 이해에 서천西川을 칭하니,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이다. -
정월에 진왕晉王 이극용李克用이 죽으니, 그의 아들 존욱存勖이 뒤를 이어 진왕晉王이 되었다.
진왕晉王이 여러 장수들과 다음과 같이 모의하였다.
상당上黨노주潞州하동河東의 울타리이니, 상당上黨이 없으면 하동河東도 없게 될 것이다.
주온朱溫(朱晃)이 꺼리는 것은 다만 선왕先王(李克用)뿐인데, 내가 새로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는 동자가 군대의 일에 익숙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서 반드시 교만하고 태만한 마음이 있을 것이니, 우리가 만약 정예병을 선발하여 행군 속도를 배가해서 달려가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나오면 틀림없이 적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엄을 취하고 패업霸業을 정하는 것이 이 한 번의 거사擧事에 달려있으니,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진왕晉王이 사졸들을 크게 사열하여 주덕위周德威注+[頭註]주덕위周德威도지휘사都指揮使이다. 등을 거느리고 진양晉陽을 출발해서 진군하여 곧바로 협채夾寨에 이르러 참호를 메우고 성채城寨를 불태우며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들어가니, 나라 군대가 크게 궤멸되어 남쪽으로 도망하였다.
그리하여 도망하고 사망한 장교將校사졸士卒이 만 명으로 헤아려졌고, 물자와 식량과 병기를 버리고 간 것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양주梁主(朱溫)는 협채夾寨가 지켜지지 못했단 말을 듣고 크게 놀랐는데, 이윽고 탄식하기를 “자식을 낳으려면 마땅히 이아자李亞子(李存勖)와 같아야 하니,注+[釋義]이아자李亞子이존욱李存勖의 어렸을 적 이름이다. 이극용李克用이 아직 죽지 않았도다.
내 자식으로 말하면 돼지나 개와 같을 뿐이다.” 하였다.
[史略 사평史評]史斷에 말하였다.
이극용李克用은 비록 사타沙陀의 미천한 종족이었으나 하루아침에 하동河東 지방을 소유하여 도적인 황소黃巢를 평정함에 이 제일이었는데, 상원역上源驛의 변고를 조정에 하소연하였으나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는 마침내 적국인 나라와 서로 공격하여 여러 해 동안 화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신하의 작렬爵列(爵位)을 편안히 여겨 당나라에 충순忠純한 신하가 되어 매번 관리를 임명할 때마다 묵칙墨勅을 행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반드시 표문表文을 올려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가 촉주蜀主에게 답한 편지를 살펴보건대 ‘맹세코 이생에서는 감히 신하의 절개를 잃지 않겠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그의 충의忠義가 위로 하늘에 통한 것이니, 당시의 방백方伯들보다 월등하게 낫다.
그러므로 선유先儒들이 인신人臣의 체통을 얻었다고 칭찬하여 그 충의忠義공렬功烈을 기술하여 나라 말기의 제일류第一流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史略 사평史評]胡氏(胡寅)가 말하였다.
상중喪中에는 상사喪事 이외의 다른 일을 하지 않으므로 《춘추春秋》에서 상사喪事를 저버리고 전쟁에 나간 자들을 모두 심히 비판하였다.
그러나 문정門庭 안에 있는 도둑은 국가의 존망存亡이 달려있기 때문에 이러한 경우에는 권제權制(權道)를 따르고 피함이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서경書經》의 〈비서費誓〉가 의 뒤에 나열된 이유이다.
이존욱李存勖협채夾寨의 전투 같은 것을 군자君子가 깊이 인정하는 것도 이와 같은 종류이다.
협채夾寨진양晉陽과 거리가 100리가 못 되었으니, 국가의 위태로운 시기라고 이를 만하였다.
만약 이존욱李存勖이 이때에 을 슬퍼하는 상정常情을 고집하고 국가의 큰 계책을 소홀히 하여 상당上黨이 함락당했다면 진양晉陽이 보존되지 못하였을 것이니, 또 어찌 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완급緩急을 살피고 경중輕重을 헤아려서 기이한 계책을 내어 승리함으로써 나라 군대를 패주敗走시킨 뒤에야 패업霸業의 기반이 다시 편안해졌다.
군자君子가 이것을 아름답게 여겼으니, 후세에 훈계를 남김이 크다.”
진왕晉王진양晉陽으로 돌아와서 군대를 휴식시키고 을 내리며 주현州縣에 명해서 어진 이와 인재를 천거하고 탐욕스러운 자와 백성을 해치는 자들을 내치며, 백성들의 조세와 부역을 경감시키고 고아와 곤궁한 자들을 어루만지며, 억울한 자들을 풀어주고 간사한 자와 도둑을 금지하니, 경내가 크게 다스려졌다.
회남淮南장호張顥注+[頭註]장호張顥좌아지휘사左牙指揮使이다. 홍농弘農 위왕威王(楊偓)을 시해하고注+[頭註]양악楊偓의 시호이다. 그 아우 양륭연楊隆演을 세워 유후留後로 삼았다.注+[頭註]장호張顥서온徐溫과 함께 양악楊偓을 시해하였는데, 서온徐溫이 다시 장호張顥를 공격하여 죽였다.
- 양행밀楊行密회남淮南을 점거하였는데, 그 아들 이 뒤를 이어 홍농군왕弘農郡王이 되고 국호를 라 하였다.
뒤에 서지고徐知誥에게 찬탈당하여 마침내 남당南唐이 되었다. -
거란契丹 -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이름을 으로 고쳤다.
2년이다. -


역주
역주1 上源之變 : 上源은 驛名이다. 節度使 朱全忠이 李克用을 上源驛에 머물게 하고 잘 대우하였으나 李克用이 취중에 “당신은 黃巢의 무리가 아니었소?” 하고 자신의 약점을 말하자, 朱全忠은 李克用을 공격하여 죽이려 하였다. 이 사건은 앞의 48권 中和 4년(884)의 附註에 보인다.
역주2 墨勅 : 外廷의 청을 거치지 않고 임금이 사사로이 관리를 임명하는 것을 이른다.
역주3 費誓所以得列於典謨命誥之後也 : 〈費誓〉는 《書經》의 편명이니, 周公의 아들인 伯禽이 魯나라를 다스릴 적에 淮北 지역의 오랑캐가 반란을 일으키자 정벌하였는데, 이때 군사들을 費땅에 모아놓고 맹세한 내용이다. 典은 〈堯典〉‧〈舜典〉을, 謨는 〈大禹謨〉‧〈皐陶謨〉등을, 命은 〈說命〉‧〈微子之命〉등을, 誥는 〈仲虺之誥〉‧〈湯誥〉등을 이른다. 〈費誓〉는 이러한 편의 뒤에 있으므로 말한 것이다.

통감절요(9)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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