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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4)

통감절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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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卯]三年注+[釋義]按綱目攷異曰 當依提要及紫陽書院本하야 大書三年하고 分註帝禪建興元年이니 今綱目 蓋傳寫鈔錄之誤耳이라 〈帝禪建興元年이요 魏黃初四年이요 吳黃武二年이라
魏主丕問賈詡曰 吾欲伐不從命하야 以一天下하노니 吳, 蜀 何先 對曰 攻取者 先兵權하고 建本者 尙德化하나니
陛下應期受禪하사 撫臨率土하시니 若綏之以文德하야 而俟其變이면 則平之不難矣리이다
吳, 蜀注+[頭註] 小貌小國이나 依山阻水하며 劉備 有雄才하고 諸葛亮 善治國하고 孫權 識虛實하고 陸遜 見兵勢하야 據險守要하고 汎舟江湖注+[頭註]守要 謂蜀이요 江湖 謂吳하니 皆難卒(猝)謀也니이다
用兵之道 先勝後戰하고 量敵論將이라
擧無遺策하나니
竊料群臣 無備, 權對注+[頭註] 當也 言無劉備孫權之對也하니 雖以天威臨之 未見萬全之勢也니이다
丕不納이러니 軍竟無功하니라
○ 帝病篤하야 命丞相亮하야 輔太子하고 以尙書令李嚴爲副하다
帝謂亮曰 君才十倍曹丕하니 必能安國이요 終定大事하리니
若嗣子 可輔어든 輔之하고 如其不才어든 君可自取하라
亮涕泣曰 臣 敢不竭股肱之力하야 效忠貞之節하고 繼之以死리잇고
帝又爲詔하야 勅太子曰 人五十이면 不稱夭注+[通鑑要解]短折曰夭라하니 吾年 已六十有餘 何所復恨이리오마는
但以卿兄弟爲念耳 勉之勉之하야 勿以惡小而爲之하고 勿以善小而不爲하라
惟賢惟德이라야 可以服人이니 汝父 德薄이라 不足效也어니와
汝與丞相從事하야 事之如父하라하고 四月 帝崩於永安注+[釋義]漢魚腹縣이니 屬巴郡이라 公孫述更名白帝城하고 有永安宮일새 昭烈 改永安縣하니라하니 諡曰 昭烈이라하다
丞相亮 奉喪還成都하고 留李嚴하야 鎭永安하다
[史略 史評]愚按 昭烈 以帝室之冑 傑出之才 起兵涿郡하야 志存匡復하야 受天子之密詔하고 討擅命之姦臣이라
旁求群賢하야 不辭三顧하니 伏龍 以之而奮躍하고 鳳雛以之而飛翔하야 雖顚沛險難而信義愈明하고 勢迫事危而言不失道하야 追景升之顧則情動三軍하고 戀赴義之士則甘與同敗
能合吳軍而大破曹瞞於赤壁하고 仗義兵而薄伐劉璋於成都하며 用趙雲而取漢中하고 遣關羽而攻樊許하야 威震華夏하야 幾復舊都러니
惜乎 因爭荊州而孫權離心하고 致吳違盟而關羽喪首하야 卒不能削平僭僞하고 混一中原하니 可勝歎哉
이나 能君臨蜀都하야 使赤帝子之祀 不至墜絶 又數十年이라
與光武卽位鄗南 晉元卽位江左 先後一轍하니 謂非中興賢君 可乎
五月 太子禪 卽位하니 時年 十七이라
尊皇后曰 皇太后라하고 封丞相亮하야 爲武鄕侯하야 領益州牧하고 政事 無巨細 咸決於亮하니 乃約官職하고 修法制하다
嘗自校簿書러니 主簿楊 直入諫曰 爲治有體하니 上下不可相侵이라
是故 古人坐而論道 謂之王公이요 作而行之 謂之士大夫
今明公爲治 乃躬自校簿書하야 流汗終日하니 不亦勞乎아하니 謝之러니
及顒卒 垂泣三日하니라
○ 八月 遣尙書鄧芝하야 修好於吳하다
吳王 猶未與魏絶이라
不時見芝어늘 芝乃自表請見曰 臣 今來 亦欲爲吳 非但爲蜀也니이다
吳王 見之하고 曰 孤誠願與蜀和親이나 然恐蜀主幼弱하고 國小勢偪하야 爲魏所乘하야 不自保全耳로라
芝對曰 吳, 蜀二國 四州注+[頭註]荊, 揚, 梁, 益이라之地 大王 命世之英이요 諸葛亮 亦一時之傑也
蜀有重險之固注+[通鑑要解]重險 謂外有斜谷, 駱谷, 子午谷之險也 內有劍閣之險也하고 吳有三江注+[頭註]松江, 錢塘江, 浦陽江이라之阻하니 合此二長하야 共爲脣齒 進可幷兼天下 退可鼎足而立하리이다
大王 今若委質於魏 魏必上望大王之入朝하고 下求太子之內侍
若不從命이면 則奉辭伐叛하고 蜀亦順流하야 見可而進하리니 如此 江南之地 非復大王之有也리이다
吳遂絶魏하고 專與漢連和하다
○ 立張氏하야 爲皇后하니 飛之女也러라


장무章武 3년(계묘 223)注+[釋義]살펴보건대 《통감강목고이通鑑綱目攷異》에 이르기를 “마땅히 《강목제요綱目提要》와 자양서원간본紫陽書院刊本강목綱目》을 따라 삼년三年이라고 크게 쓰고 제선帝禪 건흥建興 원년元年이라고 분주分註해야 하는데, 지금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은 전사傳寫할 때에 기록을 잘못한 것이다.” 하였다. - 제선帝禪 건흥建興 원년元年, 나라 황초黃初 4년, 나라 황무黃武 2년이다. -
처음에 위주魏主 조비曹丕가후賈詡에게 묻기를 “내가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정벌하여 천하를 통일하고자 하니, 촉한蜀漢 중에 어느 쪽을 먼저 해야 하는가?” 하니, 가후賈詡가 대답하기를 “공격해서 취하는 자는 병략兵略과 권모술수를 먼저 하고 근본을 세우는 자는 덕화德化를 숭상합니다.
폐하께서는 천시天時에 응하여 선양禪讓을 받아 온 천하에 군림君臨하시니, 만약 문덕文德으로써 민심을 편안하게 하면서 적의 변란이 있기를 기다린다면 천하를 평정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촉한蜀漢은 비록 매우 작은注+[頭註]는 작은 모양이다. 약소국이지만 산과 물의 험고함에 의지하여 지키고 있으며, 유비劉備는 뛰어난 재주가 있고 제갈량諸葛亮은 나라를 잘 다스리며 손권孫權허실虛實을 알고 육손陸遜은 군대의 형세에 정통하여, 촉한蜀漢은 험한 곳을 점거하고 요해처를 지키며 나라는 강호江湖에 배를 띄우고 있으니,注+[頭註]據險守要 범주강호汎舟江湖:요해처를 지킨다는 것은 촉한蜀漢을 이르고, 강호江湖에 배를 띄운다는 것은 나라를 이른다. 모두 갑자기 도모하기가 어렵습니다.
용병用兵하는 방법은 먼저 승산을 따져 본 뒤에 싸우고, 적을 헤아리며 장수를 논합니다.
그러므로 거행함에 잘못된 계책이 없는 것입니다.
신이 엎드려 헤아려보건대 여러 신하 중에 유비劉備손권孫權의 적수가 없으니,注+[頭註]無備 권대權對:는 대적함이니, 유비劉備손권孫權의 상대가 없음을 말한다. 비록 황제의 위엄으로 직접 정벌한다 하시더라도 만전萬全의 형세를 볼 수 없습니다.” 하였다.
조비曹丕가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군대가 끝내 전공戰功을 세우지 못하였다.
소열제昭烈帝가 병이 위독하자, 승상 제갈량諸葛亮에게 명하여 태자太子를 보필하게 하고 상서령尙書令 이엄李嚴로 삼았다.
소열제昭烈帝제갈량諸葛亮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재주가 조비曹丕보다 열 배이니 반드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끝내 천하통일의 대업大業을 정할 것이다.
만일 사자嗣子(太子)가 보필할 만하거든 그를 보필하고, 만일 재주가 없거든 그대가 스스로 황제의 자리를 취하라.” 하였다.
제갈량諸葛亮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신이 감히 고굉股肱의 힘을 다하여 충정忠貞의 절개를 바치고 죽음으로써 잇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소열제昭烈帝가 또다시 조칙을 내려 태자太子에게 경계하기를 “사람이 50에 죽으면 요절注+[通鑑要解]단절短折(젊은 나이에 죽음)을 라 한다.했다고 칭하지 않는데, 내 나이가 이미 60이 넘었으니, 어찌 다시 한하는 바가 있겠는가.
다만 의 형제 때문에 염려할 뿐이니, 힘쓰고 힘써서 이 작다 하여 하지 말고 이 작다 하여 하지 않지 말라.
오직 어질고 덕이 있어야만 남을 복종시킬 수 있으니, 너의 아비는 덕이 적어 본받을 것이 못 된다.
너는 승상과 함께 국정國政에 종사하여 승상을 섬기기를 이 아비와 같이 하라.” 하고, 4월에 소열제昭烈帝영안永安注+[釋義]영안永安나라의 어복현魚腹縣이니 파군巴郡에 속하였다. 공손술公孫述이 이름을 백제성白帝城이라 바꾸었으며, 영안궁永安宮이 있으므로 소열제昭烈帝영안현永安縣으로 이름을 고쳤다. 에서 별세하니, 시호를 소열昭烈이라 하였다.
승상 제갈량諸葛亮을 받들어 성도成都로 돌아오고, 이엄李嚴을 남겨 두어 영안永安을 진무하게 하였다.
[史略 사평史評]내 살펴보건대 소열昭烈은 황실의 후손이요 걸출傑出한 재주로 탁군涿郡에서 군대를 일으켜 뜻이 나라를 광복함에 있어서, 천자天子밀조密詔를 받고 명령을 제멋대로 내리는 간신姦臣을 토벌하였다.
사방으로 여러 현자賢者들을 구하여 삼고초려三顧草廬를 사양하지 않으니, 복룡伏龍(諸葛亮)이 이 때문에 분발하여 뛰어나왔고 봉추鳳雛(龐統)가 이 때문에 날아올라서, 비록 전복되고 험난하였으나 신의信義가 더욱 드러나고, 형세가 급박하고 사정이 위태로웠으나 말이 도리를 잃지 않아서, 경승景升(劉表)이 어린 자식을 돌보고 부탁한 것을 추념追念하여 진정眞情삼군三軍을 감동시켰고, 를 따르는 선비들을 생각하여 그들과 함께 패함을 달게 여겼다.
이 때문에 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조만曹瞞적벽강赤壁江에서 대파하고 의병義兵을 내세워 유장劉璋성도成都에서 잠깐 정벌하였으며, 조운趙雲을 등용하여 한중漢中을 점령하고 관우關羽를 보내어 번성樊城허도許都를 공격해서 위엄이 화하華夏에 진동하여 거의 옛 도읍을 수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형주荊州를 다툼으로 인하여 손권孫權이 반심을 품었고, 나라가 맹약을 어기도록 하여 관우關羽가 머리를 잃어서 끝내 참람하고 거짓된 조비曹丕를 평정하고 중원中原을 통일하지 못하였으니, 탄식함을 이루 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촉도蜀都에 군림하여 적제자赤帝子의 제사를 끊어짐에 이르지 않게 한 것이 또한 수십 년이었다.
이는 광무제光武帝호읍鄗邑의 남쪽에서 즉위한 것과 나라 원제元帝강동江東에서 즉위한 것과 앞뒤로 똑같으니, 중흥中興의 어진 군주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5월에 태자太子 이 제위에 오르니, 이때 나이가 17세였다.
황후皇后를 높여 황태후皇太后라 하고, 승상 제갈량諸葛亮을 봉하여 무향후武鄕侯로 삼아 익주목益州牧을 겸하게 하고, 정사를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고 모두 제갈량諸葛亮에게서 결정하니, 제갈량諸葛亮이 마침내 관직을 단속하고 법제를 닦았다.
제갈량諸葛亮이 일찍이 직접 문서를 대조하였는데, 주부主簿 양옹楊顒이 곧바로 들어와 간하기를 “국가를 다스리는 데에는 체통이 있으니, 상하上下가 서로 침범해서는 안 됩니다.
이 때문에 옛사람이 ‘앉아서 를 논하는 것을 왕공王公이라 이르고 일어서서 시행하는 것을 사대부士大夫라 이른다.’고 칭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길丙吉이 죽은 사람이 길에 가로누워 있는 것은 묻지 않고 소가 헐떡거리는 것을 걱정하였으며, 진평陳平이 돈과 곡식의 숫자를 알려고 하지 않고 따로 주관하는 자가 있다고 말하였으니, 저들은 진실로 지위와 분수의 체통에 통달한 것입니다.
이제 명공明公께서 정치를 함에는 도리어 직접 문서를 따져서 종일토록 땀을 흘리고 있으니, 수고롭지 않습니까.” 하니, 제갈량諸葛亮이 사례하였다.
양옹楊顒이 죽자, 제갈량諸葛亮은 사흘 동안 눈물을 흘렸다.
○ 8월에 상서尙書 등지鄧芝를 보내어 나라에 수호修好(우호를 닦음)하였다.
이때 오왕吳王이 아직도 나라와 단절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하여 오왕吳王이 제때에 등지鄧芝를 만나 주지 않자, 등지鄧芝가 마침내 스스로 표문表文을 올려 만나 볼 것을 청하며 이르기를 “신이 이번에 온 것은 또한 나라를 위하고자 해서이고, 단지 촉한蜀漢을 위해서일 뿐만이 아닙니다.” 하였다.
오왕吳王이 그를 만나 보고 말하기를 “내가 진실로 촉한蜀漢과 화친하고자 하나 촉한蜀漢의 군주가 유약하며 나라가 작고 세력이 강하지 못해서, 나라에게 제압당하여 스스로 보전하지 못할까 두렵다.” 하니,
등지鄧芝가 대답하기를 “촉한蜀漢 두 나라는 네 注+[頭註]사주四州형주荊州양주揚州양주梁州익주益州이다. 의 땅을 보유하고 대왕大王은 재주가 세상에 뛰어난 영웅이요 제갈량諸葛亮 또한 한때의 영걸입니다.
촉한蜀漢은 지형이 겹겹이 험한 견고함注+[通鑑要解]중험重險은 밖으로는 사곡斜谷낙곡駱谷자오곡子午谷의 험함이 있고, 안으로는 검각劍閣의 험함이 있음을 이른다. 이 있고 나라는 삼강三江注+[頭註]삼강三江송강松江전당강錢塘江포양강浦陽江이다. 의 막힘이 있으니, 이 두 가지 장점을 합하여 함께 입술과 이처럼 밀접하게 돕는다면, 전진하면 천하天下를 겸병할 수 있고 물러서면 솥발처럼 벌여 설 수 있습니다.
대왕大王이 이제 만약 나라에 폐백을 바쳐 신하가 되시면 나라는 반드시 위로는 대왕大王이 들어와 조회하기를 바라고 아래로는 태자太子가 들어와 모시기를 요구할 것이요,
만약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황제의 토벌하라는 명을 받들어 배반한 자를 정벌할 것이고 촉한蜀漢 또한 강물을 따라 내려와 가능한 기회를 보고 전진할 것이니, 이와 같다면 강남江南의 땅은 다시 대왕大王의 소유가 아닐 것입니다.” 하였다.
나라는 마침내 나라와 단절하고 오로지 촉한蜀漢과 연합하였다.
장씨張氏를 세워서 황후皇后로 삼으니, 장비張飛의 딸이었다.


역주
역주1 三年 : 《御批歷代通鑑輯覽》에 “汪克寬의 《資治通鑑考異》에 ‘《綱目提要》와 紫陽書院刋本에 모두 章武三年과 後主 建興元年이라고 크게 써 있다. 《通鑑綱目》의 名號의 例를 보면 秦漢 이후의 모든 正統의 군주에는 帝라 칭하고 正統이 아니면서 帝를 칭한 자에게는 某主라고 칭하였다. 지금 紫陽書院刋本의 《通鑑綱目》에는 〈蜀志〉의 先主에 昭烈皇帝라고 크게 썼으나 後主에는 옛 역사책(司馬光의 《資治通鑑》)의 잘못을 고치지 못하고 그대로 後主라고 썼으니, 당시에 기록하는 자가 《資治通鑑》의 옛글을 그대로 썼는데, 朱子가 우연히 미처 고치지 못한 것이다. 마땅히 晉帝의 變例를 따라 帝禪이라고 써야 할 것이다. 또 改元하는 例를 보면 모두 中年에 改元한 경우에는 앞의 年號를 正式으로 삼고 바꾼 연호를 아래에 달았다. 이해 5월에 後主가 卽位하여 建興으로 改元하였는데, 지금 《綱目提要》와 紫陽書院刋本에는 이해 첫머리에 곧바로 建興元年이라고 쓰고 章武三年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이 또한 鈔錄의 잘못이다. 마땅히 《綱目提要》와 紫陽書院刋本을 따라 三年을 크게 쓰고 帝禪 建興元年을 分註한 다음 다음 해에 建興二年을 크게 써야 한다.’ 하였다. 汪氏의 말이 이와 같으므로 이제 그 말을 따랐다.[汪克寬考異曰 提要及紫陽書院刋本 竝大書三年後主建興元年 按綱目名號例 秦漢以下 凡正統之君曰帝 無統稱帝者曰某主 今刋本綱目 于蜀志先主 大書昭烈皇帝 而後主未革舊史 仍書後主 蓋當時錄者 因史舊文 而朱子偶未及改也 當依晉帝變例 書曰帝禪 又按改元例 凡中歲而改元者 以前爲正 而注所改于下 是年五月 後主卽位 改元建興 今綱目刋本 于是年歲首 卽書建興元年 而不著章武三年 蓋亦鈔錄之誤 當從提要及紫陽本 大書三年 分注帝禪建興元年 而明年大書建興二 汪氏之說如此 今依之]”라고 보인다.
역주2 : 최
역주3 : 옹
역주4 丙吉不問橫道死人而憂牛喘 : 漢나라 宣帝의 재상인 丙吉이 일찍이 외출했다가 여러 사람들이 싸워 죽고 부상한 자가 길에 가로누워 있는 것을 보고도 丙吉이 그대로 지나치고 묻지 않더니, 앞길을 가다가 소를 몰고 오는 사람을 만났는데 소가 헐떡거리며 혀를 빼문 것을 보자, 丙吉이 騎吏를 시켜 가서 “소를 몇 리나 몰고 왔느냐?”고 묻게 하였다. 아전이 “丞相이 묻지 않을 것을 물었다.”고 비판하자, 丙吉은 말하기를 “백성들이 서로 싸워서 죽고 상함을 다스리는 것은 長安令과 京兆尹의 직분이니, 재상이 직접 간섭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봄철이어서 날씨가 아직 더울 때가 아닌데, 소가 가까운 거리를 왔는데도 헐떡거리니, 이는 四時의 기후가 절도를 잃어 조화를 잃은 것이다. 三公은 직분이 陰陽을 고르게 해야 하니, 직책상 마땅히 걱정해야 한다. 이 때문에 물은 것이다.” 하였다. 이에 아전은 복종하고 丙吉이 大體를 안다고 칭찬하였다.
역주5 陳平……云自有主者 : 이 일은 漢나라 文帝 元年條(B.C. 179)에 보이는 바, 내용은 다음과 같다. “漢나라 文帝는 국가의 일에 더욱 밝고 숙달하였다. 조회 볼 때에 右丞相 周勃에게 ‘천하에 한 해 동안 옥사를 결단함이 몇 건이나 되는가?’ 하고 묻자, 周勃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또다시 ‘한 해 동안 돈과 곡식의 출입이 얼마나 되는가?’ 하고 묻자, 周勃은 또다시 대답하지 못하고 땀이 흘러 등을 적셨다. 文帝가 左丞相 陳平에게 묻자, 陳平이 대답하기를 ‘주관하는 자가 따로 있으니, 폐하께서 만일 옥사를 결단함을 물으시려면 廷尉에게 요구하시고, 돈과 곡식의 출입을 물으시려면 治粟內史에게 물으소서.’ 하였다. 文帝가 말하기를 ‘그대가 주관하는 것은 무슨 일인가?’ 하자, 陳平이 대답하기를 ‘재상은 위로는 天子를 보좌하여 陰陽을 다스리고 四時를 순조롭게 하며 아래로는 만물의 마땅함을 이루어서, 밖으로는 사방 오랑캐와 諸侯들을 鎭撫하고 안으로는 백성들을 친히 하여 따르게 하며 卿大夫로 하여금 각각 그 직책을 맡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하니, 文帝가 옳다고 칭찬하였다.”

통감절요(4)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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