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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2)

통감절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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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亥]五年이라
冬十月 漢王 追項羽至固陵注+[釋義]縣名이라 括地志 在陳州宛丘西北四十二里 一云卽光州固始是하야 與齊王信 魏相國越注+[頭註] 越收魏地十餘城하고 將兵歸漢하야 請立魏後漢王曰 西魏豹 眞魏後라하니 乃以越爲魏相하야 使將兵略定魏地하니라 魏人이라 期會擊楚러니 信, 越 不至
楚擊漢軍大破之하니 漢王 堅壁自守하고 謂張良曰 諸侯不從하니 奈何
對曰 楚兵且破 二人하니 其不至固宜
君王 能與共天下하시면 可立致也리니 今能取睢陽以北至穀城 皆以王彭越하고 從陳以東傅海 與齊王信하소서
能出捐此地하야 以許兩人하야 使各自爲戰이면 則楚 易破也리이다 漢王 從之하니
於是 韓信, 彭越 皆引兵來하다
〈出漢本紀〉
十二月 項王注+[釋義]聚邑名이니 在沛之이요 又堤名이라 正義云 垓是高岡絶巖이니 今猶高三四丈이라 其聚邑及堤 在垓之側일새 因名垓下하니 今在亳州眞源東十里하니 兵少食盡이라
與漢戰不勝하야 入壁이어늘 漢軍及諸侯兵 圍之數重하다
項羽夜聞漢軍四面 皆楚歌하고 乃大驚曰 漢 皆已得楚乎
是何楚人之多也注+[釋義]楚人之歌 猶言吳謳越吟也 九江兵歸漢이라 多楚聲이라 乃夜起하야 飮帳中하고
〈史記羽本紀曰 有美人하니 名虞 駿馬名騅
乃悲歌慷慨하야 自爲歌詩하니 曰 力拔山兮氣蓋世로다
時不利兮騅不逝로다
騅不逝兮可奈何
虞兮虞兮奈若何
因泣下하니 左右皆泣하야 莫能仰視러라
於是 項王 乘其駿馬하니 麾下壯士騎從者八百餘人이라
直(値)夜注+[釋義] 當也 古字例以直爲値하야 潰圍南出馳走러니 平明 漢軍 乃覺之하고 令騎將灌嬰으로 以五千騎追之하다
項王 渡淮 騎能屬者 纔百餘人이라
至陰陵注+[釋義]地志 九江郡陰陵縣 今無爲州是 方輿勝覽 和州烏江縣西北四十五里 有陰陵山하니 卽項羽迷失道處 括地志 陰陵故城 在濠州定遠西北六十里하야 迷失道하야 問一田父한대 田父紿曰 左注+[釋義]王氏曰 紿曰左句絶이라 紿 欺言也 欺令向左去하라
라가 乃陷大澤中하니 以故 漢追及之하다
項王 乃復引兵至東城注+[釋義]地志 九江(卽)[郡]東城縣이라 括地志 故城 在濠州定遠東南五十里하니 乃有二十八騎
項王不得脫하고 謂其騎曰 吾起兵至今八歲矣
身七十餘戰 未嘗敗北러니 今卒困 如此하니 天之亡我 非戰之罪也
今日 固決死로니 願斬將刈旗三勝之하야 令諸君으로 知天亡我 非戰之罪호리라하고
斬漢一將, 一都尉하고 殺數十百人하니 諸騎皆伏이러라
於是 項王 欲東渡烏江이러니 烏江亭長注+[釋義]括地志 卽和州烏江縣이라 方輿勝覽 烏江縣東四里 有烏江浦하니 卽亭長檥船待項王處 檥船注+[原註] 音蟻 附也 整船向岸曰檥라가 謂項王曰 江東 雖小 地方千里
亦足王也 願大王急渡하소서
項王 笑曰 天之亡我어늘 我何渡爲리오
且籍 與江東子弟八千人으로 渡江而西러니 今無一人還하니
縱江東父兄 憐而王我인들 我何面目見之 縱彼不言이나 籍獨不愧於心乎아하고
乃令騎 皆下馬步行하야 持短兵接戰하니 獨籍 所殺漢軍 數百人이요 身亦數十餘創이라
乃曰 吾聞漢購我頭千金, 邑萬戶라하니이라하고 乃自刎而死하다
〈出史記項羽紀〉
○ 楚地悉定호되 獨魯不下
漢王 欲屠之하야 至其城下러니 猶聞弦誦之聲이어늘
謂其守禮義之國 爲主死節注+[通鑑要解]懷王 初封羽爲魯公故也 葬項王穀城東하니 去縣十五里 有塚이라이라하고 乃持項王頭示之하니 魯乃降하다
〈出漢書本紀及儒林傳〉 漢以魯公禮 葬項王하고 封項伯하야 爲列侯注+[頭註]項伯 羽之季父 名纏이요 字伯陵이라 項氏支屬 皆不誅하고 封項伯等四人하야 爲列侯하니라하다
太史公曰
羽起隴畮(畝)之中하야 三年 遂將五諸侯兵하고 滅秦하야 分裂天下而封王侯하고 政由羽出하니 位雖不終이나 近古以來 未嘗有也
及羽背關懷楚하고 放逐義帝而自立하야 怨王侯叛己 難矣
自矜功伐하고 奮其私智而不師古하야 謂霸王之業 欲以力征하야 經營天下五年 卒亡其國하고 身死東城이로되
尙不覺悟而自責하고 乃引天亡我, 非用兵之罪也하니 豈不謬哉
揚子法言曰
或問楚敗垓下하야 方死曰 天也라하니 諒乎注+[原註]信如羽之言否 曰漢屈群策注+[釋義]王氏曰 按揚子註解 漢能屈己以用群臣之策이라하니 謂群策 無能出漢之右者하야 群策屈群力注+[釋義]王氏曰 群力 皆爲群策所制 故曰屈群力이라하니라하고 楚憞群策하야 而自屈其力注+[釋義] 廢也 言楚旣廢群策而不能用하니 是自屈其力也 宋咸曰 憞 惡也 項羽有一范增이로되 而不能用하니 其惡群策 可知矣니라이라
屈人者克하고 自屈者負하나니 天曷故焉注+[釋義]言天豈故爲之哉리오 亦人事也이리오
〈出揚子重藜篇〉
黃公度曰
智可以來天下로되 不可以留天下 力可以得天下로되 不可以有天下하니 有天下者 忘天下者也
嬴秦 取天下於六國分裂之餘하야 百戰百勝하야 僅能得之하니 得之艱難일새 惟恐去之或速하야 凡可以制民之死命者 無不可爲而彊擧之하야 雖翦滅屠戮이라도 有所不恤하니 天下不勝嬴秦之猜疑하야 相率而跳於刑法之外
項氏見民之易叛하고 恐今日之於吾 猶昔日之於秦也하야 擧一城則坑之하고 攻一邑則屠之하니 嗟乎
羽亦人耳 好生惡殺 誰無是心哉리오
所以斬伐而無一寸愛惜者 亦疑之深矣일새라
疑民之叛하야 而求以殺戮止之하니 乃所以速其叛也
帝之入關 約法三章하고 羽之入關 烽火三月하며 帝之所過 秋毫無犯하고 羽之所過 噍類不遺하니 嗟乎
民之歸於君者 求以生我耶
殺我耶
相率而歸之어늘 從而殺之 何苦歸之하야 以求殺哉
帝不取天下於秦項之手하고 而取於吾民之心하야 信其自來하고 聽其自至하니 非寬仁大度者 有所不能也니라
○ 漢王 還至定陶하야 馳入齊王信壁하야 奪其軍하다
春正月 更立齊王信하야 爲楚王하고 王淮北하야 都下하고 封魏相國彭越하야 爲梁王하고 王魏故地하야 都定陶하다
〈出漢書本紀〉
○ 韓信 至楚하야 召漂母하야 賜千金하고 召辱己少年하야 以爲中尉하고 告諸將相曰 此 壯士也
方辱我時 寧不能殺之耶리오마는 殺之無名이라 忍而就此注+[通鑑要解] 成也 成今日之功也로라
〈出漢書本傳〉
○ 諸侯王 皆上疏하야 請漢王爲皇帝어늘
二月甲午 卽皇帝位于하다
〈出漢書本紀〉
○ 夏五月 帝置酒洛陽南宮注+[釋義]括地志 南宮 在洛州洛陽縣東北二十六里洛陽故城中이라하다
上曰 徹侯注+[原註]舊曰徹侯러니 避武帝諱하야 曰通侯[釋義] 徹 通也 言其上通王室也諸將 毋敢隱朕하고 皆言其情하라
吾所以有天下者 項氏之所以失天下者王陵 對曰 陛下 嫚而侮人하시고 項羽 仁而愛人이나
然陛下 使人攻城略地 因以與之하사 與天下同其利하시고
項羽 妬賢嫉能하야 有功者 害之하고 賢者 疑之하니 此其所以失天下也니이다
上曰 公知其一이요 未知其二로다
夫運籌帷幄之中하야 決勝千里之外 吾不如子房이요 鎭國家, 撫百姓하고 給餉餽注+[釋義] 通作饟이요 通作饋하야 不絶糧道 吾不如蕭何 連百萬之衆하야 戰必勝, 攻必取 吾不如韓信이니
三者 皆人傑이어늘 吾能用之하니 此所以取天下者也
項羽 有一范增이로되 而不能用하니 此所以爲我禽(擒)也니라 群臣 悅服이러라
〈出史本紀〉
龜山楊氏曰
高祖謂項羽有一范增而不能用故 爲我禽이라하니 初以爲信然이러니 及觀增之所以佐羽者然後 知羽雖用增이나 無益於敗亡也로라
項籍 以閭閻匹夫之資 首天下諸侯하야 西向而幷爭이러니 視秦車之覆이로되 曾不知戒하고 猶蹈其故轍하야 欲以力制天下하야 屠咸陽하고 殺子嬰하고 燒秦宮室하며 所過 無不殘滅하니 以秦攻秦也
范增 曾無一言及此하고 乃汲汲於殺沛公하니 假令沛公死라도 天下 其無沛公乎
況增已知沛公有天子氣어늘 又可殺乎
[新增] 陳氏曰
吾觀不如之論 固帝之誠이나 然不如 亦足以見帝於君臣之間 無復有猜忌之謀하야 而有以安慰臣下之心也
嗚呼
風雲霜露 無一氣而非天이요 芽甲根荄 無一物而非地 天下之善 誰非人主之善乎
小夫窶人 借隙光以自飾하고 竊勺水以自多로되 要不出範圍之內
地載 豈與是瑣瑣者爭衡哉
吾差有取於高帝로라
○ 項羽已滅 田橫注+[原註]齊王儋死 橫自立爲齊王하다 懼誅注+[頭註]齊王田榮死 子廣立하고 田橫相之러니 韓信 虜齊王田廣한대 橫收散兵하야 自立爲王하고 與灌嬰戰敗而走彭越하다 及羽滅 而越爲漢梁王하니 橫懼誅하니라하야 與其徒五百餘人으로 入居海島中이러니
帝恐其爲亂하야 乃使人赦橫罪하고 而召之曰 橫하라
大者이요 小者어니와 不來 且擧兵加誅호리라
乃與其客二人으로 乘傳詣洛陽注+[釋義]蘇鶚〈演義〉曰 傳 以木爲之하니 長尺五寸이니 書符其上하고 又以一板으로 偕封以御史印章하니 所以爲信이라 乘傳者 依乘符傳而行이니 若今使者持節耳 師古曰 傳者 若今之驛也 古者 以車謂之傳車러니 其後 又置單馬하고 謂之驛騎 洛陽 注見前하니라이러니 未至三十里하야 自殺이어늘
帝拜其二客하야 爲都尉하고 以王禮葬之하다
橫旣葬 二客 穿其冢旁하고 皆自剄下從之
帝聞之大驚하야 聞其餘尙五百人 在海中하고 使使召之러니 至則聞橫死하고 亦皆自殺하다
〈出史田儋傳〉
○ 季布爲項籍將하야窘辱帝러니
項籍滅 帝購求布千金호되 敢舍匿이면 罪三族호리라
布乃注+[釋義] 髮也 以鐵束頸也爲奴하야 自賣於魯朱家注+[釋義]朱家 魯人也 季布先匿濮陽周氏러니 周氏曰 漢求將軍急하야 (邇)[迹]且至臣家하리니 臣敢獻計라하고 乃髡鉗布하야하고 置廣柳車中하고 幷與其家僮數十人으로 至朱家賣之하니라 案廣柳車 喪車也[頭註] 朱家 所藏活豪士以百數 其餘庸人 不可勝數로되 終不伐功하고 諸所賞施 猶恐人見之하니라러니
朱家心知其季布也하고 買置田舍하고 身之洛陽하야 見滕公하고 說曰 季布何罪
臣各爲其主用職耳注+[釋義]
今上 始得天下하야 而以私怨으로 求一人하시니 何示不廣也
且以季布之賢으로 求之急하니 此不北走胡 南走越耳
何不從容爲上言之 滕公 待間(閒)하야 言於上호되 如朱家指한대
乃赦布하고 召拜郞中하다
〈出史本傳〉
○ 布 母弟丁公注+[釋義]薛人也 名固[通鑑要解] 名固 與布 異父同母弟 亦爲項羽將하야 逐窘帝彭城西하야 短兵接注+[釋義]王氏曰 短兵接爲句 楚辭九歌篇 車錯轂兮短兵接이라한대 朱子註云 短兵 刀劍也 言戎車相迫 輪轂相錯하야 長兵不施 故用刀劍以相接擊也이러니
帝急하야 顧謂丁公曰 兩賢 豈相戹(厄)哉아하니 丁公 引兵而還하다
及項王滅 丁公 謁見이어늘 帝以丁公으로 徇軍中曰 丁公 爲項王臣不忠하야 使項王失天下라하고
遂斬之曰 使後爲人臣으로 無傚丁公也하노라
溫公曰
高祖起豐沛以來 罔(網)羅豪傑하야 招亡納叛 亦已多矣러니
及卽帝位하야 而丁公 獨以不忠受戮 何哉
夫進取之與守成 其勢不同일새라
當群雄角逐之際하야 民無定主하니 來者受之 固其宜也어니와
及貴爲天子하야는 四海之內 無不爲臣하니 苟不明禮義以示之하야 使爲臣者 人懷貳心하야大利 則國家其能久安乎
是故 斷以大義하야 使天下曉然皆知爲臣不忠者無所自容하야 而懷私結恩者 雖至於活己라도 猶以義不與也
戮一人而千萬人懼하니 其慮事 豈不深且遠哉
子孫享有天祿四百餘年 宜矣로다
齊人婁敬 戍隴西할새 過洛陽이라가注+[釋義]輅者 一木橫遮車前하야 二人輓之하고 一人推之 所謂輓輅, 衣羊裘하고 因虞將軍하야 見上曰 陛下都洛陽하시니 豈欲與周室比隆哉잇가 上曰 然하다
婁敬曰 洛邑 天下之中이라 有德則易以王이요 無德則易以亡이어니와
夫秦地 被山帶河하야 四塞以爲固하고 卒然有急이면 百萬之衆 可具하니 此亦扼天下之吭而拊其背也注+[釋義] 音厄이니 捉持也 音剛이니 咽喉也 以喩關中이라 擊也 以背脊으로 喩天下니이다
帝問群臣한대 群臣 皆山東人이라 爭言 周 王數百年하고 二世卽亡하니이다
洛陽 東有成皐하고 西有殽, 하고 倍(背)河向洛하니 其固 足恃也니이다
上問張良한대 良曰 洛陽 雖有此固 四面受敵하니 非用武之國也
關中 左殽, 函注+[釋義] 與崤字通이라 括地志 殽山 一名嶔岑山이니 在洛州永寧縣西北하니 卽古之殽道也 謂函谷이니 在陝西桃林縣南十二里하니 有洪溜澗水하고 山形如函이라 故稱函이요 關路在谷口 故名函谷이라이요 右隴, 蜀이요 沃野千里注+[釋義] 灌沃也 言其土壤廣遠하고 有灌漑之利 阻三面而固守하고 獨以一面으로 東制諸侯하니
所謂金城千里 天府之國注+[釋義]財物所聚曰府 關中物産饒多하야 可備贍給이라 故稱天府하니 天所造也이니 婁敬說 是也니이다
卽日注+[頭註]蓋其日卽定計 非卽日遂行也 車駕注+[頭註]謂天子乘車而行이니 不敢指斥也西都長安하고 號婁敬하야 爲奉春君注+[頭註] 歲之始也 以婁敬首謀都關中故 號奉春君이라하고 賜姓劉氏하다
〈出史張良, 婁敬傳〉
[史略 史評] 胡氏曰
高帝起兵八年 歲無寧居러니 至是 天下平定하니 當亦少思安逸之時也어늘 而敏於用言하야 不自遑暇如此하니 其成帝業 宜哉인저
光武下隴하고 歸才(纔)六日 潁川盜起而往征之하니 可謂能繩祖武矣로다
張良 素多病이러니 從上入關하야 卽道(導)引하야 不食穀注+[釋義]服辟穀藥而不食하고 靜居行氣以學道 莊子刻意篇 道(導)引之士라한대 導氣令其和하고 引體令其柔 華陀傳曰 古僊(仙)人道引之事 熊經, 鴟顧하야 引接要(腰)體하고 動諸關節하야 以求難老하고
家世相韓이러니 及韓滅 不愛萬金之資하고 爲韓報讐彊秦하야 天下振動이라
今以三寸舌 爲帝者師하야 封萬戶侯하니 布衣之極이라
於良 足矣 願棄人間事하고 欲從赤松子遊耳라하더라
〈出留侯世家〉
溫公曰
夫生之有死 譬猶夜旦之必然이니 自古及今 固未嘗有超然而獨存者也
以子房之明辨達理 足以知神仙之爲虛僞矣리라
이나 其欲從赤松子游者 其智 可知也
夫功名之際 人臣之所難處
如高帝所稱者 三傑而已로되 淮陰誅夷하고 蕭何繫獄 非以履盛滿而不止耶
子房 託於神仙하고 遺棄人間하야 等功名於外物하고 置榮利而不顧하니 所謂明哲保身者 子房 有焉이로다
[新增] 愚按 尹氏曰 神仙詭誕之說 先儒論之詳矣 有如張良欲從赤松子遊 司馬公亦旣及之矣
綱目 前書張良謝病辟穀하야 疑若眞有導引長年之事러니
至壬子六年하야 書留侯張良卒하니 則知子房託於神仙之意 昭然可見이니 而詭誕之說 不攻自破矣로다


5년(기해 B.C.202)
겨울 10월에 한왕漢王항우項羽를 추격하여 고릉固陵注+[釋義]고릉固陵 : 고릉固陵의 이름이다. 《괄지지括地志》에 “진주陳州완구현宛丘縣 서북쪽 42리 지점에 있다.” 하였고, 일본一本(《漢書》 진작晉灼)에는 “광주光州고시현固始縣이 이곳이다.” 하였다. 이르러서 제왕齊王한신韓信나라 상국相國팽월彭越注+[頭註]처음에 팽월彭越나라 땅의 10여 개 성을 수복한 다음 군대를 거느리고 나라로 돌아와 한왕漢王에게 나라 후손을 세워줄 것을 청하며 말하기를 “서위西魏는 참으로 나라 후손입니다.” 하니, 마침내 팽월彭越나라 정승으로 삼아 군대를 거느리고 나라 땅을 공략하게 하였다. 팽월彭越나라 사람이다. 함께 모여 나라를 공격하기로 약속하였는데, 한신韓信팽월彭越이 오지 않았다.
나라가 한군漢軍을 공격하여 대파하니, 한왕漢王이 성벽을 굳게 하여 스스로 지키고 장량張良에게 이르기를 “제후들이 따르지 않으니, 어찌한단 말인가?” 하였다.
이에 장량張良이 대답하기를 “나라 군대가 장차 격파될 터인데 이 두 사람에게 땅을 나누어 준 것이 있지 않으니, 그들이 오지 않는 것은 진실로 당연합니다.
군왕께서 이들과 천하를 함께 하시면 당장 오게 할 수가 있으니, 이제 수양睢陽이북以北으로부터 곡성穀城까지는 모두 팽월彭越에게 왕 노릇 하게 하시고, 으로부터 이동以東으로 동해東海까지는 제왕齊王한신韓信에게 주소서.
능히 이 땅을 출연出捐하여 두 사람에게 허락해서 각각 따로 전투하게 하시면 나라를 쉽게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한왕漢王이 그의 말을 따랐다.
이에 한신韓信팽월彭越이 모두 병력을 인솔하고 왔다.
- 《한서漢書고제기高帝紀》에 나옴 -
12월에 항왕項王해하垓下注+[釋義]해하垓下취읍聚邑(작은 고을) 이름이니 패주沛州효현洨縣에 있고, 또 제방의 이름이기도 하다. 《사기정의史記正義》에 이르기를 “는 높은 산등성이의 가파른 바위이니, 지금도 높이가 서너 길이나 된다. 취읍聚邑과 제방이 의 곁에 있기 때문에 인하여 해하垓下라고 이름하였으니, 지금 박주亳州진원眞源의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하였다. 이르니, 병력이 적고 식량이 다하였다.
나라와 싸워 이기지 못하고 성벽으로 들어가자, 한군漢軍과 제후의 군사들이 몇 겹으로 포위하였다.
항우項羽는 밤에 한군漢軍이 사면에서 모두 나라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마침내 크게 놀라 말하기를 “나라가 이미 나라를 모두 얻었는가?
어찌하여 나라 사람이 이토록 많은가?”注+[釋義]項羽夜聞……楚人之多也 : 초가楚歌나라 사람의 노래이니 ‘나라의 노래’, ‘나라의 시’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구강九江의 병사들이 나라에 귀순하였기 때문에 나라 노랫소리가 많은 것이다. 하고, 마침내 밤에 일어나 장중帳中에서 술을 마셨다.
-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이르기를 “미인美人이 있으니 이름이 요, 준마가 있으니 이름이 였다.
마침내 슬피 노래하고 강개慷慨하여 스스로 시가詩歌를 지으니, 이르기를 ‘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온 세상을 뒤덮도다.
때가 불리하니 추마騅馬도 가지 않는구나.
추마騅馬가 가지 않으니 어찌한단 말인가.
우미인虞美人이여, 우미인虞美人이여, 어찌한단 말인가.’ 했다.” 하였다.
- 인하여 눈물을 흘리니, 좌우가 모두 울어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이에 항왕項王이 준마를 타니 휘하의 장사로서 말을 타고 따르는 자가 8백여 명이었다.
밤을 당하여注+[釋義]는 당함이니, 고자古字에는 으레 로 썼다.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나가 도망하였는데, 평명平明(새벽)에야 나라 군대에서 비로소 이를 깨닫고 기병장 관영灌嬰으로 하여금 5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게 하였다.
항왕項王회수淮水를 건널 적에 기병으로서 소속된 자가 겨우 백여 명이었다.
음릉陰陵注+[釋義]음릉陰陵은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구강군九江郡음릉현陰陵縣은 지금의 무위주無爲州가 바로 이곳이다.” 하였고, 《방여승람方輿勝覽》에 “화주和州오강현烏江縣 서북쪽 45리 지점에 음릉산陰陵山이 있으니, 곧 항우項羽가 길을 잃었던 곳이다.” 하였고, 《괄지지括地志》에 “음릉陰陵의 옛 호주濠州정원현定遠縣 서북쪽 60리 지점에 있다.” 하였다. 이르러 혼미하여 길을 잃고 한 농부에게 물으니, 농부가 속여 말하기를 “왼쪽으로 가라.”注+[釋義]田父紿曰 : 왕씨王氏가 말하였다. “태왈좌紿曰左에서 를 떼어야 한다. 紿는 속여서 말하는 것이니, 속여서 왼쪽으로 향하여 가게 한 것이다.” 하였다.
왼쪽으로 갔다가 마침내 큰 늪 가운데에 빠지니, 나라 군사들이 이 때문에 추격하여 따라잡았다.
항왕項王이 이에 다시 병력을 이끌고 동성東城注+[釋義]동성東城은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구강군九江郡동성현東城縣이다.” 하였고, 《괄지지括地志》에 “옛 호주濠州정원현定遠縣 동남쪽 50리 지점에 있다.” 하였다. 이르니, 마침내 28명의 기병만 있었다.
항왕項王이 스스로 탈출할 수 없음을 헤아리고는 그 기병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군사를 일으킨 지 지금 8년이 되었다.
몸소 70여 차례를 싸웠으나 일찍이 패배한 적이 없었는데, 이제 마침내 곤궁함이 이와 같으니, 이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전투를 잘못한 죄가 아니다.
오늘 진실로 결사전을 하겠으니, 적장을 목 베고 적의 깃발을 베어 세 번 이겨서 제군諸君들로 하여금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전투를 잘못한 죄가 아님을 알게 하겠다.” 하고는
나라의 장수 한 명과 도위都尉 한 명을 목 베고 수십 명에서 백 명을 죽이니, 모든 기병이 모두 탄복하였다.
이에 항왕項王이 동쪽으로 오강烏江을 건너려 하니, 오강烏江정장亭長注+[釋義]오강정烏江亭은 《괄지지括地志》에 “바로 화주和州오강현烏江縣이다.” 하였고, 《방여승람方輿勝覽》에 “오강현烏江縣 동쪽 4리 지점에 오강포烏江浦가 있으니, 바로 정장亭長이 배를 대고 항왕項王을 기다렸던 곳이다.” 하였다. 배를 대고注+[原註]는 음이 의이니, 붙이는 것이다. 배를 정돈하여 강안江岸으로 향하는 것을 라고 한다. 기다리다가 항왕項王에게 이르기를 “강동江東이 비록 작으나 땅의 넓이가 천 리입니다.
또한 충분히 왕 노릇 할 수 있으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급히 건너소서.” 하였다.
이에 항왕項王이 웃으며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데 내 어찌 이 강을 건너겠는가?
또 내가 강동江東자제子弟 8천 명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왔는데 이제 한 사람도 돌아가는 자가 없으니,
비록 강동江東부형父兄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 왕 노릇 하게 한다 한들 내 무슨 면목으로 이들을 볼 것이며, 비록 저들이 말하지 않으나 내가 홀로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항우項羽가 마침내 기병들로 하여금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가면서 단병短兵을 잡고 접전하게 하였는데, 항적項籍이 홀로 죽인 한군漢軍이 수백 명이고 자신도 또한 수십 군데에 상처를 입었다.
이에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나라에서 내 머리에 천금千金만호萬戶의 고을을 현상하였다 하니, 내가 너에게 은덕을 베풀겠다.” 하고는 마침내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 《사기史記항우본기項羽本紀》에 나옴 -
나라 땅이 모두 평정되었으나 지방만이 항복하지 않았다.
한왕漢王 지방을 도륙하고자 하였는데, 그 성 아래에 이르니 아직도 현악기를 타고 를 외는 소리가 들렸다.
한왕漢王이 이르기를 “예의禮義를 지키는 나라가 군주를 위하여 죽음으로 충절을 지키는 것이다.”注+[通鑑要解]회왕懷王이 처음에 항우項羽노공魯公으로 봉하였기 때문에 군주를 위하여 충절을 지켰다고 한 것이다. 항왕項王곡성穀城 동쪽에 장사 지내니, 에서 15리 떨어진 곳에 무덤이 있다. 하고 마침내 항왕項王의 머리를 가지고 가서 보여주니, 지방이 그제서야 항복하였다.
- 《한서漢書》 〈고제기高帝紀〉와 〈유림전儒林傳〉에 나옴 - 나라가 항왕項王노공魯公로 장례하고 항백項伯을 봉하여 열후列侯로 삼았다.注+[頭註]封項伯 위열후爲列侯 : 항백項伯항우項羽계부季父이니, 이름이 이고 백릉伯陵이다. 항씨項氏의 친족들을 모두 죽이지 않고, 항백項伯 등 네 사람을 봉하여 열후列侯로 삼았다.
태사공太史公(司馬遷)이 말하였다.
항우項羽가 밭두둑 가운데서 일어나 3년 만에 마침내 다섯 제후의 군대를 거느리고 나라를 멸망시킨 다음 천하를 나누어 왕후王侯를 봉하고 정사政事를 자기 뜻대로 하였으니, 지위가 비록 끝까지 가지 못하였으나 근고近古 이래에 일찍이 있지 않았던 일이다.
항우項羽관중關中의 약속을 저버리고 나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였으며 의제義帝를 추방하고 스스로 왕위에 서고는 왕후王侯들이 자신을 배반한 것을 원망한다면 곤란하다.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고 사사로운 지혜를 뽐내어 옛 도리를 본받지 않고서 패왕霸王을 힘으로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천하를 경영한 지 5년 만에 마침내 나라를 잃고 자신은 동쪽 에서 죽었다.
그런데도 깨달아 자책하지 못하고, 마침내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용병을 잘못한 죄가 아니라고 말하였으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양자법언揚子法言》에 말하였다.
혹자或者가 묻기를 나라 항우項羽해하垓下에서 패전하여 막 죽을 때에 말하기를 ‘하늘(天運)이다.’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항우項羽의 말과 같이 하늘이 있습니까? 注+[原註]‘진실로 항우項羽의 말과 같은가?’라고 물은 것이다.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나라는 여러 계책을 다 받아들여서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양자법언揚子法言》의 주해註解에 ‘나라는 자기 몸을 굽혀 여러 신하의 계책을 썼다.’고 하였으니, 여러 사람의 계책을 쓴 것은 나라보다 뛰어난 자가 없는 것이다.” 여러 계책이 여러 힘을 굴복시켰고,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여러 힘이 모두 여러 계책에 제어를 받았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여러 힘을 굴복시켰다.’고 한 것이다.”나라는 여러 계책을 폐하여 스스로 그 힘을 굽혔다.注+[釋義]는 폐함이다. 나라가 이미 여러 계책을 폐하여 쓰지 못하였으니, 이는 스스로 그 힘을 굽힌 것이다. 송함宋咸이 말하기를 “는 미워함이다. 항우項羽범증范增 한 사람이 있었으나 그의 말을 쓰지 못하였으니, 여러 계책을 미워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남에게 굽히는 자는 이기고 스스로 굽히는 자는 지니, 하늘이 무슨 연고가 있겠는가.”注+[釋義]하늘이 무슨 연고가 되겠는가. 또한 사람의 일임을 말한 것이다.
- 《양자법언揚子法言중려편重藜篇》에 나옴 -
황공도黃公度가 말하였다.
“지혜는 천하 사람을 오게 할 수 있으나 천하 사람을 머물게 할 수는 없으며, 힘은 천하를 얻을 수 있으나 천하를 소유할 수는 없으니, 천하를 소유하는 자는 천하를 잊는 자이다.
영진嬴秦육국六國이 분열된 뒤에 천하를 취하여 백 번 싸워 백 번 이겨서 겨우 얻었으니, 얻기를 어렵게 하였기 때문에 행여 떠나감이 혹 빠를까 염려하여, 백성의 목숨을 제재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할 만하다고 여겨 억지로 들지 않음이 없어서 비록 백성들을 베어 죽이고 도륙하는 것도 돌아보지 않는 바가 있었으니, 천하 사람들이 영진嬴秦의 시기와 의심을 이기지 못하여 서로 거느리고 형법刑法의 밖에서 날뛰었다.
항씨項氏는 백성들이 쉽게 배반하는 것을 보고는 오늘날 자신에게 있어서도 옛날 나라에 있어서와 같을까 염려하여 한 을 함락하면 백성들을 구덩이에 묻어 죽이고 한 을 공격하면 백성들을 도륙하였으니, 아!
항우項羽도 또한 사람이니 살려주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함이 누군들 이런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런데도 백성들을 베어 죽이고 한 치의 애석함도 없었던 까닭은 또한 의심이 깊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배반할까 의심하여 살륙으로써 저지하려고 하였으니, 이는 반란을 재촉한 것이다.
고제高帝관중關中에 들어갔을 때에는 삼장三章을 약속하였고 항우項羽관중關中에 들어갔을 때에는 봉화가 3개월 동안 이어졌으며, 고제高帝가 지나간 곳에는 추호秋毫도 범함이 없었고 항우項羽가 지나간 곳에는 백성의 무리가 살아남지 못하였으니, 아!
백성들이 군주에게 돌아가는 것은 자신을 살려주기를 바라서이겠는가.
자신을 죽이기를 바라서이겠는가.
서로 이끌고서 돌아갔는데 따라서 죽인다면 어찌 괴롭게 그에게 돌아가서 자기를 죽이기를 바라겠는가.
고제高帝는 천하를 나라와 항우項羽의 손에서 취하지 않고 우리 백성들의 마음에서 취하여, 스스로 오도록 내버려 두고 스스로 이르도록 하였으니, 관대하고 인자하고 도량이 큰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한왕漢王이 돌아와 정도定陶에 이르러서 제왕齊王한신韓信의 성벽으로 달려 들어가 그의 병력을 빼앗았다.
봄 정월에 제왕齊王한신韓信을 바꾸어 세워 초왕楚王으로 삼고 회북淮北에 왕 노릇 하여 하비下邳에 도읍하게 하였으며, 나라 상국相國팽월彭越을 봉하여 양왕梁王을 삼고 나라의 옛 땅에 왕 노릇 하여 정도定陶에 도읍하게 하였다.
- 《한서漢書고제기高帝紀》에 나옴 -
한신韓信나라에 이르러 표모漂母를 불러 천금千金을 주고, 자기를 욕보였던 소년을 불러 중위中尉로 삼고, 여러 장상將相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장사壯士이다.
막 나를 욕보일 때에 내 어찌 이 사람을 죽일 수 없었겠는가마는 죽이는 것이 명분이 없기 때문에 참아서 이를 이루었다.”注+[通鑑要解]는 이룸이니, 금일今日을 이룬 것이다. 하였다.
- 《한서漢書한신전韓信傳》에 나옴 -
제후왕들이 모두 글을 올려 한왕漢王에게 황제皇帝가 될 것을 청하였다.
2월 갑오甲午에 왕이 사수汜水의 북쪽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 《한서漢書고제기高帝紀》에 나옴 -
여름 5월에 황제가 낙양洛陽남궁南宮에서注+[釋義]낙양洛陽남궁南宮은 《괄지지括地志》에 “남궁南宮낙주洛州낙양현洛陽縣 동북쪽 26리 되는 낙양洛陽의 옛 가운데에 있다.” 하였다. 술자리를 베풀었다.
이 말하기를 “철후徹侯注+[原註] 옛날에는 철후徹侯라고 하였는데, 무제武帝를 피하여 통후通侯라고 하였다. [釋義]함이니 위로 왕실王室과 통함을 말한다. 여러 장수들은 감히 에게 숨기지 말고, 모두 각기 그 실정을 말하라.
내가 천하를 소유하게 된 까닭은 무엇이며, 항씨項氏가 천하를 잃은 까닭은 무엇인가?” 하니, 고기高起왕릉王陵이 대답하기를 “폐하는 거만하여 사람을 업신여기시고 항우項羽는 인자하여 사람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폐하는 사람을 시켜 성을 공격하고 땅을 공략하면 인하여 그들에게 주어서 천하와 그 이익을 함께 하셨고,
항우項羽는 현자를 투기하고 재능이 있는 자를 미워하여 공이 있는 자를 해치고 어진 자를 의심하였으니, 이 때문에 천하를 잃은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이 말하기를 “공은 하나만 알고 둘은 알지 못하는구나.
유악帷幄의 가운데에서 궁리하고 계획하여 천 리의 밖에서 승리를 결단함은 내가 자방子房(張良)만 못하고, 국가를 진정시키고 백성을 어루만지며 군량을 공급하여注+[釋義]과 통용되고, 와 통용된다.양도糧道를 끊어지지 않게 함은 내가 소하蕭何만 못하고, 백만百萬의 무리를 연합하여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고 공격하면 반드시 점령함은 내가 한신韓信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인걸인데, 내가 이들을 등용하였으니 이 때문에 내가 천하를 취한 것이요,
항우項羽범증范增 한 사람이 있었으나 쓰지 못하였으니 이 때문에 나에게 사로잡힌 것이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기뻐하여 복종하였다.
- 《사기史記고조본기高祖本紀》에 나옴 -
구산양씨龜山楊氏(楊時)가 말하였다.
고조高祖가 이르기를 ‘항우項羽범증范增 한 사람이 있었으나 쓰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에게 사로잡혔다.’ 하였으니, 내가 처음에는 그 말을 옳게 여겼는데, 범증范增항우項羽를 보좌한 것을 살펴본 뒤에야 항우項羽가 비록 범증范增의 말을 따랐더라도 패망함에 유익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항적項籍여염閭閻필부匹夫의 자질로 천하 제후들 중에 으뜸이 되어서 서쪽을 향하여 함께 다투었는데, 나라 수레가 전복된 것을 보고도 일찍이 경계할 줄 모르고 오히려 그 전철前轍을 밟아서 힘으로써 천하를 제압하고자 하여, 함양咸陽을 도륙하고 자영子嬰을 죽이고 나라 궁실을 불태웠으며 지나가는 곳마다 해치고 멸망시키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는 나라로써 나라를 공격한 것이다.
범증范增은 일찍이 한 마디도 이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고 도리어 패공沛公을 죽이는 데에 급급하였으니, 가령 패공沛公이 죽었더라도 천하에 어찌 또 다른 패공沛公이 없겠는가.
더구나 범증范增패공沛公이 천자의 기운이 있음을 알았는데 또 그를 죽일 수 있었겠는가.”
진씨陳氏가 말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그만 못하다’는 의논은 진실로 나라 고조高祖의 성심이었으나 ‘그만 못하다’는 것에서 또한 고제高帝군신간君臣間에 다시는 시기하는 계책이 있지 아니하여 신하들의 마음을 위안할 수 있었음을 충분히 볼 수 있다.
아!
바람과 구름과 서리와 이슬이 한 기운도 하늘 아님이 없으며 싹과 껍질과 뿌리가 한 물건도 땅 아님이 없으니, 천하의 이 어느 것인들 인주人主이 아니겠는가.
작은 지아비와 가난한 사람들이 틈 사이의 빛을 빌려 스스로 꾸미고 한 잔의 물을 도둑질하여 스스로 많은 체하나 요컨대 천지天地일월日月의 범위 안을 벗어나지 않는다.
만물을 덮어주는 하늘과 만물을 실어주는 땅이 어찌 이 자질구레한 것들과 다투겠는가.
고제高帝에게서 크게 취함이 있노라.”
항우項羽가 이미 멸망하자, 전횡田橫注+[原註]제왕齊王전담田儋이 죽자 전횡田橫이 스스로 서서 제왕齊王이 되었다. 주벌을 두려워하여注+[頭註]제왕齊王전영田榮이 죽자 아들 이 즉위하고 전횡田橫이 정승이 되어 그를 도왔는데, 한신韓信제왕齊王전광田廣을 사로잡자 전횡田橫이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여 스스로 서서 왕이 되었고, 관영灌嬰과 싸워 패전하고 팽월彭越에게 달려가 귀의하였다. 항우項羽가 멸망하자 팽월彭越나라의 양왕梁王이 되니, 전횡田橫이 주벌을 두려워한 것이다. 그 무리 5백여 명과 해도海島 가운데로 들어가 거주하였다.
황제는 이들이 난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사람을 보내 전횡田橫의 죄를 사면하고 부르기를 “전횡田橫아, 오너라.
크게는 을 시킬 것이고 작게는 를 시킬 것이며, 오지 않으면 장차 군대를 일으켜 주벌을 가하겠다.” 하였다.
전횡田橫이 마침내 그 문객 두 사람과 역말을 타고 낙양에 왔는데,注+[釋義]소악연의蘇鶚演義》에 이르기를 “은 나무로 만드니 길이가 1 5이다. 그 위에 (신표)를 쓰고 또 한 판자를 어사御史인장印章과 함께 봉하니, 이를 신표信標로 삼는 것이다. 승전乘傳은 신표에 따라 역마를 타고 가는 것이니, 지금 사자使者가 부절을 가지고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였다. 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은 지금의 역마驛馬(파발마)와 같은 것이다. 옛날에 수레를 일러 전거傳車라고 하였는데, 그 뒤에 또 필마匹馬를 두고 이를 일러 역기驛騎라고 했다.” 하였다. 낙양洛陽가 앞에 보인다. 30리 못 미친 곳에서 자살하였다.
황제가 두 문객을 임명하여 도위都尉로 삼고 전횡田橫을 장례 하였다.
전횡田橫을 장례 지내자, 두 문객이 그 무덤 옆을 뚫고 모두 스스로 목을 찔러 따라 죽었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그 나머지 5백 명이 아직도 해중海中에 있다는 말을 듣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불렀는데, 이들이 와서는 전횡田橫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또한 모두 자살하였다.
- 《사기史記전담전田儋傳》에 나옴 -
계포季布항적項籍의 장수가 되어 여러 번 황제를 곤궁하게 하고 욕보였다.
항적項籍이 멸망하자 황제가 계포季布를 찾되 천금을 현상으로 걸고 ‘감히 집에 숨겨주면 삼족三族을 멸하겠다.’고 하였다.
계포季布가 마침내 머리를 깎고 목에 항쇄項鎖를 차고 노예가 되어서注+[釋義]은 머리를 깎는 것이고, 은 쇠로 목을 묶는 것이다. 스스로 땅의 주가朱家注+[釋義]주가朱家나라 사람이다. 계포季布가 먼저 복양濮陽주씨周氏 집에 숨었는데, 주씨周氏가 말하기를 “나라에서 장군을 급히 찾아 추적하는 자가 장차 신의 집에 이를 것이니, 신이 감히 계책을 바치겠습니다.” 하고, 마침내 계포季布의 머리를 깎고 목에 항쇄項鎖를 채워 창의裮衣를 입히고 광류거廣柳車 속에 넣은 다음, 그 집의 종 수십 명과 함께 주가朱家에 이르러서 팔았다. 살펴보건대 광류거廣柳車상거喪車이다. [頭註]주가朱家는 호걸스러운 선비들을 숨겨 살려준 것이 백 명으로 헤아릴 정도이고 그 나머지 용렬한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나, 끝내 자신의 공을 자랑하지 않았으며 모든 상을 주고 은혜를 베푼 것을 행여 남들이 알까 두려워하였다. 팔려갔다.
주가朱家는 마음속으로 이 사람이 계포季布임을 알고 밭과 집을 사서 주고는 몸소 낙양洛陽에 가서 등공滕公(夏侯嬰)을 만나보고 말하기를 “계포季布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신하가 각각 군주를 위하여 쓰여지는 것이 당연한 직분입니다.注+[釋義]용직用職은 신하의 직분에 당연한 것일 뿐임을 이른다.
지금 께서 처음으로 천하를 얻고서 사사로운 원한 때문에 한 사람을 찾으시니, 어찌 도량이 넓지 못함을 보이신단 말입니까.
계포季布의 어짊으로 나라가 그를 급하게 찾으니, 이 사람이 북쪽으로 로 달아나지 않으면 남쪽으로 나라로 달아날 뿐입니다.
께서는 어찌하여 조용히 께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하니, 등공滕公이 한가한 틈을 기다려 에게 아뢰기를 주가朱家가 지시한 대로 하였다.
은 마침내 계포季布를 사면하고 불러 낭중郎中을 제수하였다.
- 《사기史記계포전季布傳》에 나옴 -
계포季布동모제同母弟정공丁公注+[釋義]정공丁公 땅 사람이니, 이름이 이다. [通鑑要解]정공丁公은 이름이 이니, 계포季布와 아버지가 다르고 어머니가 같은 아우이다. 또한 항우項羽의 장수가 되어서 황제를 팽성彭城의 서쪽에서 추격하여 곤궁하게 하여 단병短兵으로 접전하였다.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단병접短兵接에서 를 뗀다. 《초사楚辭》 〈구가편九歌篇〉에 ‘거착곡혜단병접車錯轂兮短兵接’이라 하였는데, 주자朱子에 ‘단병短兵도검刀劍이다. 전거戰車가 바싹 서로 붙어있어 수레바퀴가 서로 부딪쳐서 긴 병기를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에 도검刀劍을 사용해서 서로 접근하여 공격함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황제가 다급하여 정공丁公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두 현자가 어찌 서로 곤궁하게 하는가?” 하니, 정공丁公이 군대를 이끌고 그대로 돌아갔다.
항왕項王이 멸망하자 정공丁公이 찾아와 뵈니, 황제가 정공丁公을 군중에 돌려 보이며 말하기를 “정공丁公항왕項王의 신하가 되어 불충해서 항왕項王으로 하여금 천하를 잃게 했다.” 하고는
마침내 그의 목을 베고 말하기를 “후세의 인신人臣이 된 자로 하여금 정공丁公을 본받지 말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온공溫公이 말하였다.
고조高祖풍패豐沛에서 기병起兵한 이래로 호걸들을 망라하여 도망한 자들을 불러오고 배반한 자들을 받아들인 것이 또한 이미 많았다.
그런데 제위帝位에 오르자 정공丁公이 홀로 불충하다고 하여 죽임을 당함은 어째서인가?
진취進取수성守成은 그 형세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영웅들이 각축角逐할 때를 당해서는 백성들이 정해진 군주가 없었으니, 오는 자를 받아주는 것이 진실로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귀함이 천자가 되어서는 사해四海의 안이 신하가 되지 않음이 없으니, 만일 예의禮義를 밝혀 보여주지 않아서 신하된 자로 하여금 사람마다 두 마음을 품어 큰 이익을 바라게 한다면 국가가 어찌 오랫동안 편안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큰 의리로 결단하여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신하가 되어 불충한 자는 스스로 용납될 곳이 없어서, 사심을 품고 은혜를 맺은 자는 비록 자기를 살려주었다 해도 오히려 의리로 허여하지 않음을 분명히 모두 알게 한 것이다.
한 사람을 죽여 천만 사람이 두려워하였으니, 일을 생각함이 어찌 깊고 원대하지 않은가.
자손들이 천록天祿을 누리기를 4백여 년 동안 한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나라 사람 누경婁敬농서隴西로 수자리 살러 갈 적에 낙양洛陽을 지나다가 수레의 끈을 벗겨 놓고는注+[釋義]는 한 나무를 수레 앞에 가로대어 두 사람이 끌고 한 사람이 미는 것이니, 이른바 만로輓輅라는 것이다. 양가죽 옷을 입고 우장군虞將軍을 통하여 을 뵙고 말하기를 “폐하께서 낙양洛陽에 도읍하시니, 어찌 나라 왕실과 높음을 나란히 하고자 하심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왕이 “그렇다.” 하고 대답하였다.
누경婁敬이 말하기를 “낙양洛陽은 천하의 중앙이라서 이 있으면 왕 노릇 하기가 쉽고, 이 없으면 망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나라 지역은 산으로 덮여 있고 황하黃河가 띠처럼 둘러 있어서 사방이 요새지로 막혀 있어 견고하고, 별안간 급한 일이 있더라도 백만 명의 군대를 갖출 수 있는 바, 이는 또한 천하의 목을 잡고 그 등을 치는 것과 같은 곳입니다.”注+[釋義]은 음이 액이니, 잡는 것이다. 은 음이 강으로 목이니, 관중關中을 비유한 것이다. 는 침이니, 등뼈로써 천하天下를 비유한 것이다. 하였다.
황제가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산동山東 사람이었으므로 다투어 말하기를 “나라는 수백 년 동안 왕 노릇 하였고, 나라는 2세에 곧바로 망하였습니다.
낙양洛陽은 동쪽에는 성고成皐가 있고 서쪽에는 효산殽山민지澠池가 있으며 황하黃河를 등지고 낙수洛水를 향하고 있으니, 그 견고함을 충분히 믿을 만합니다.” 하였다.
장량張良에게 물으니, 장량張良이 대답하기를 “낙양洛陽이 비록 이러한 견고함이 있으나 사면으로 적의 침공을 받으니, 무력을 쓸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관중關中은 왼쪽에는 효산殽山함곡관函谷關注+[釋義]효자崤字와 통한다. 《괄지지括地志》에 “효산殽山일명一名금잠산嶔岑山으로 낙주洛州영녕현永寧縣 서북쪽에 있다.” 하였으니, 바로 옛날의 효도殽道이다. 함곡函谷을 이르는 바, 섬서陝西도림현桃林縣 남쪽 12리 지점에 있으니, 크게 모여 흐르는 간수澗水가 있고 산 모양이 과 같으므로 이라고 칭하고, 관문關門의 길이 골짝 어귀에 있으므로 함곡函谷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있고 오른쪽에는 이 있고 비옥한 들이 천 리이며,注+[釋義]은 물을 대는 것이니, 토양土壤(土地)이 광활하고 물을 대는 이로움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삼면三面이 막혀서 굳게 지키고 오직 한 면을 가지고 동쪽으로 제후를 제압하니,
이는 이른바 금성金城(철옹성)이 천 리이고 천부天府(천연적인 부고府庫)의 나라라는 것이니,注+[釋義]재물財物을 모아놓은 곳을 라고 한다. 관중關中물산物産이 풍부하여 넉넉히 대비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천부天府라고 칭하니 하늘이 만든 것이다.누경婁敬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이 당일로注+[頭註]그날 즉시 계책을 결정한 것이요, 그날로 마침내 관중關中으로 간 것은 아니다. 수레를 타고注+[頭註]거가車駕천자天子가 수레를 타고 감을 이르니, 감히 천자天子라고 지척하지 못한 것이다. 서쪽으로 가서 장안長安에 도읍하기로 하고, 누경婁敬을 이름하여 봉춘군奉春君이라注+[頭註]봄은 한 해의 시작이니, 누경婁敬이 첫 번째로 관중關中에 도읍할 것을 계획하였기 때문에 봉춘군奉春君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하고 유씨성劉氏姓을 하사하였다.
- 《사기史記》 〈장량전張良傳〉과 〈누경전婁敬傳〉에 나옴 -
호씨胡氏가 말하였다.
고제高帝가 군대를 일으킨 8년 동안 편안히 거처한 해가 없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천하가 평정되었으니, 마땅히 다소 안일安逸을 생각해야 할 때인데, 남의 말을 따름에 민첩해서 스스로 편안할 겨를이 없음이 이와 같았으니, 제업帝業을 이룬 것이 당연하다.
광무제光武帝을 함락하고 돌아온 지 겨우 6일 만에 영천潁川의 도둑떼가 일어나자 직접 가서 정벌하였으니, 선조先祖의 발자취를 이었다고 이를 만하다.”
장량張良이 평소 병이 많았는데, 상을 따라 관중關中에 들어와서는 즉시 도인導引하여 곡식을 먹지 않으며注+[釋義]도인道引벽곡辟穀하는 약을 먹고 곡식은 먹지 않으며 고요히 거하여 기운을 운행하게 해서 를 배우는 것이다. 《장자莊子》 〈각의편刻意篇〉에 도인지사導引之士라고 하였는데, 에 “기운을 유도하여 하게 하고 몸을 인도하여 유연하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화타전華陀傳〉에 이르기를 “옛날에 신선이 도인導引하는 일은 곰이 나뭇가지를 잡고 매달려 있는 것 같고 올빼미가 몸은 움직이지 않고 머리를 돌리는 것처럼 하여, 허리와 몸을 끌어당기고 관절關節을 움직여서 장수하기를 구하는 것이다.” 하였다. 말하기를
“집안이 대대로 나라의 정승이 되었는데, 나라가 멸망하자 만금萬金의 재물을 아끼지 않고 나라를 위하여 강한 나라에 원수를 갚으려 하여 천하가 진동하였다.
이제 세 치의 혀로 황제의 스승이 되어 만호후萬戶侯에 봉해졌으니, 이는 포의布衣(평민)로서 최고의 지위이다.
나(良)에게 충분하니 인간人間의 일을 버리고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놀고자 한다.” 하였다.
- 《사기史記유후세가留侯世家》에 나옴 -
온공溫公이 말하였다.
가 있음은 비유하면 밤과 아침이 필연적인 것과 같으니,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진실로 초연히 홀로 생존한 자가 있지 않다.
자방子房과 같이 밝게 분변하고 이치를 통달한 자는 신선술이 허망한 거짓임을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놀고자 하였으니, 그 지혜를 알 수 있다.
공명功名의 사이는 신하가 처하기 어려운 바이다.
고제高帝가 칭찬한 사람은 삼걸三傑(張良‧한신韓信소하蕭何)뿐이었는데, 회음후淮陰侯(韓信)는 죽임을 당하여 멸하였고 소하蕭何는 옥에 갇혔으니, 이는 성하고 가득참을 누리고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자방子房(張良)이 신선神仙에 의탁하고 인간人間의 일을 버려서 공명功名외물外物과 똑같이 여기고 영화와 이익을 버리고 돌아보지 않은 것이니, 이른바 명철明哲하여 몸을 보존했다는 것을 자방子房이 가지고 있다 할 것이다.”
내가 살펴보건대 윤씨尹氏(尹起莘)가 말하기를 “신선神仙의 허탄한 말은 선유先儒들이 자세히 논하였고, 장량張良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놀고자 하였음은 사마온공司馬溫公도 이미 언급하였다.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는 예전에 장량張良이 병으로 사절하고 벽곡辟穀을 하였다고 써서 참으로 도인법導引法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일이 있는 듯하였는데,
임자 6년에 이르러 유후留侯장량張良이 죽었다고 썼으니, 그렇다면 장량張良이 신선에 가탁한 뜻을 분명히 알 수 있으니, 허탄한 말을 공격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진 것이다.” 하였다.


역주
역주1 [譯註]未有分地 : 이때에 韓信이 비록 齊王이 되었으나 漢王이 경계를 확실히 정해주지 않았고, 彭越은 겨우 相國이 되었을 뿐 땅을 봉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張良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2 : 해
역주3 : 효
역주4 田父紿曰 左 : 張良이 미리 농부에게 거짓말하도록 시킨 것이라 한다.
역주5 : 치
역주6 : 탁
역주7 亭長 : 秦漢의 제도에 10리마다 1亭이 있고 亭에는 長이 있어 도적을 잡는 일을 맡았다.
역주8 [譯註]吾爲若德 : 若은 2인칭 대명사로 너라는 뜻인 바, 이때 漢나라 騎司馬로 있던 呂馬童을 가리킨다. 呂馬童은 이전에 項羽와 알던 사이로 項羽가 “내 너를 위하여 죽어 너에게 은덕을 베풀겠다.”고 말한 것이다. 頭註에는 若德을 呂馬童의 字라고 하였다.
역주9 列侯 : 漢나라 제도에 王子가 봉해져 王이나 侯가 된 경우는 諸侯라 이르고, 성씨가 다른 여러 신하가 공을 세워 봉해진 경우는 列侯라 하고 또한 徹侯라 하였다. 高祖 초년에는 韓信을 楚王으로, 彭越을 梁王으로 봉하여 異姓을 왕으로 봉하였으나 이들을 다 죽인 뒤에는 오직 劉氏만이 王이 될 수 있었다.
역주10 漢屈群策 : 《揚子法言》의 註에는 이외에도 ‘屈盡也’라 하여 屈을 다함으로 풀이한 것이 보인다. 이 경우 “漢나라는 여러 사람의 계책을 다 써서 여러 사람의 힘을 다하였고, 楚나라는 여러 사람의 계책을 쓰지 않아서 자신의 힘을 다하였다. 남의 힘을 다하는 자는 이기고 자신의 힘을 다하는 자는 지니, 하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로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역주11 : 비
역주12 [譯註]汜水之陽 : 山의 남쪽과 물의 북쪽을 陽이라고 한다.
역주13 徹侯 : 秦나라는 20등급의 작위를 두고 공로에 따라 상을 주었는데, 그중 가장 높은 것이 徹侯이다. 漢나라는 秦나라 제도를 그대로 따랐다.
역주14 [譯註]高起 : 頭註에는 “高起를 人名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으나 혹은 動詞로 해석하기도 하고, 혹은 衍文으로 보기도 한다.
역주15 : 부
역주16 : 삭
역주17 髡鉗 : 곤겸
역주18 裮衣 : 옷에 띠를 매지 않음을 이른다. 옛날에는 옷에 띠를 매지 않아 펄럭이는 것을 큰 수치로 여기고 이것을 裮衣라 하였는 바, ‘창피(裮披)하다’는 말의 어원이 여기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역주19 臣職當然 : 項氏의 신하로 있던 季布가 高祖를 곤궁하게 하고 욕보인 것은 신하의 직분에 당연한 일일 뿐임을 말한 것이다.
역주20 : 요
역주21 輓輅 : 만로
역주22 脫輓輅 : 輓은 輅 위에 끈을 묶어서 수레를 끌 때에 사용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이것을 벗겼다는 것은 수레를 정지하였음을 이른다.
역주23 :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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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절요(2) 책은 2022.01.1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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