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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5)

통감절요(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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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절요(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己丑]四年이라 〈趙光初十二年이요 後趙太和二年이라
○ 是歲 趙亡하니
正月 趙太子熙 帥百官하야 奔上하니 關中 大亂이라
將軍蔣英, 辛恕 據長安하고 遣使降于後趙하다
○ 二月 諸軍 攻石頭할새 西軍注+[通鑑要解]侃等諸軍이라 獲蘇逸斬之하다
○ 群臣 見帝하고 頓首號泣請罪하다
한대 陶侃 笑曰 似不如是라하니 導有慚色이러라
○ 是時 宮闕灰燼하야 以建平園爲宮이라
溫嶠 欲遷都豫章하고 三吳之豪 欲都會稽하야 二論 紛紜未決이어늘
司徒導曰 孫仲謀, 劉玄德 俱言建康 王者之宅이라하니 古之帝王 不以豐儉注+[通鑑要解] 大也 小也移都
務本節用이면 何憂彫(凋)敝리오
若農事不修 則樂土爲墟矣 且北寇游魂注+[通鑑要解]言其遊散이라 伺我之隙하니 一旦示弱하야 竄於蠻越하야 求之望實注+[通鑑要解] 聞望也 實事也이면 懼非良計
今特宜鎭之以靜이면 群情自安이리이다 由是 不復徙都하다


함화咸和 4년(기축 329) - 나라 광초光初 12년이고, 후조後趙 태화太和 2년이다.
○ 이해에 나라가 망하였다.
대국大國이 하나이고 소국小國이 둘이니, 참국僭國이 모두 셋이다. -
정월에 나라 태자太子 유희劉熙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상규上邽로 도망가니, 관중關中이 크게 혼란하였다.
장군 장영蔣英신서辛恕장안長安을 점거하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후조後趙에 항복하였다.
○ 2월에 제군諸軍석두성石頭城을 공격할 때에 서군西軍注+[通鑑要解]서군西軍도간陶侃 등의 제군諸軍이다. 소일蘇逸을 사로잡아 목을 베었다.
○ 여러 신하들이 황제를 뵙고 머리를 조아리며 울부짖고 벌줄 것을 청하였다.
사도司徒 왕도王導석두성石頭城에 들어가서 옛 (깃발)을 가져오게 하자, 도간陶侃이 웃으며 말하기를 “소무蘇武은 이와 같지 않을 듯하다.” 하니, 왕도王導가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 이때에 궁궐이 다 불타서 건평원建平園을 궁궐로 삼았다.
온교溫嶠예장豫章으로 천도하고자 하고 삼오三吳의 호걸들은 회계會稽에 도읍하고자 해서 두 가지 의론이 분분하여 결정하지 못하였는데,
사도司徒 왕도王導가 말하기를 “손중모孫仲謀유현덕劉玄德이 모두 말하기를 ‘건강建康왕자王者가 살 곳이다.’ 하였으니, 옛날 제왕帝王들은 부유하고 곤궁함注+[通鑑要解]은 큼이요, 은 작음이다. 에 따라 도읍을 옮기지 않았다.
만일 본업本業(농사)에 힘쓰고 재용財用을 절약한다면 어찌 피폐함을 걱정하겠는가.
만약 농사가 닦여지지 않으면 낙토樂土가 빈 터가 될 것이요, 또 북쪽 오랑캐의 떠돌아다니는 注+[通鑑要解]유혼游魂은 떠돌아다니고 흩어진 무리를 이른다. 이 우리의 틈을 엿볼 것이니, 하루아침에 약함을 보이고 도망하여 , (豫章과 회계會稽)에 이르러서 저들로 하여금 우리를 중하게 여겨 주기注+[通鑑要解]은 명망이요, 실사實事(實際)이다. 를 구한다면 좋은 계책이 아닐 듯하다.
이제 다만 마땅히 고요함으로써 진정하면 민심이 저절로 편안해질 것이다.” 하니, 이로 말미암아 다시는 도읍을 옮기지 않았다.


역주
역주1 大一小二 凡三僭國 : 大國 하나는 石勒의 後趙이고, 小國 둘은 李雄의 成과 張駿의 前涼이다.
역주2 : 규
역주3 司徒導入石頭 令取故節 : 王導는 직접 王敦을 토벌할 때 假節이었는데, 石頭城에서 달아나면서 이 節을 버렸었다.
역주4 蘇武節 : 蘇武는 前漢 武帝 때의 장수로 匈奴에 使臣 갔다가 억류되었으나 끝내 항복하지 않고 항상 漢나라의 깃발을 잡고 忠節을 지키다가 19년 만에 귀국하였는 바, 앞의 11권에 보인다.
역주5 望實 : 이름과 실상이 부합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통감절요(5)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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