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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9)

통감절요(9)

범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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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절요(9)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丁巳]〈周顯德四年이라
○ 北漢天會元年이라
○ 是歲 凡五國, 三鎭이라
周兵 圍壽春注+[頭註]縣名이니 屬壽州하니라 하야 連年未下어늘
議者以唐援兵尙强이라하야 多請罷兵하니 世宗疑之
李穀 寢疾在第러니 二月 世宗 使范質, 王溥注+[頭註]中書侍郞同平章事 就與之謀한대
上疏하야 以爲壽春危困하야 破在旦夕하니 若鑾駕注+[附註]和鑾 皆鈴也 金口木舌이요 金口金舌이니 所以節車之行이라 乘車則馬動하고 馬動則鑾鳴하고 鑾鳴則和應하야 自然有箇節奏로되 車駕大(太)速則不相應이요 大(太)遲則不響하며 若雜然響이면 則不合節奏也 乘車 和在軾하고 鑾在衡하며 戎車 鑾(輿)[在]하니 駟馬 八鑾也 親征하시면 則將士爭奮하고 援兵震恐하리니
城中知亡이면 必可下矣리이다
世宗하다
○ 二月乙亥 周主世宗 發大梁하다
先是 周與唐戰할새 唐水軍銳敏하야 周人 無以敵之
世宗 每以爲恨이러니 返自壽春으로 於大梁城西汴水側 造戰艦數百하고 命唐降卒하야 敎北人水戰하니 數月之後 縱橫出沒 殆勝唐兵이라
至是 命右驍衛大將軍王環하야 將水軍數千하고 自閔河 沿潁入淮하니 唐人 見之하고 大驚하니라
壬辰旦 世宗 軍于趙步하니 諸將 擊唐紫金山寨하야 大破之하고 殺獲萬餘人하다
甲辰 世宗 耀兵于壽春城北이라
唐淸淮節度使劉仁 病甚하야 不知人하니 監軍使周廷構等 作仁贍表하야 仁贍하야 出城降하다
夏四月 周世宗 還大梁하다
○ 冬十月 周世宗 發大梁하야 十一月 至濠州하야 大破唐兵於洞口하니 斬首五千餘級이요 降卒二千餘人이라
因鼓行而東하니 所至皆下하다
唐兵 退保淸口러니 戊午旦 世宗 自將親軍하고 自淮北進하야 命宋太祖皇帝하야 將步騎하야 自淮南進하고 諸將 以水軍으로 自中流進하야 共追唐兵하니
所獲戰船 燒沈之餘 得三百餘艘하고 士卒殺溺之餘 得七千餘人이라
唐之戰船在淮上者 於是盡矣하니라


정사(957) - 나라 현덕顯德 4년이다.
북한北漢 천회天會 원년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이다. -
나라 군대가 수춘현壽春縣注+[頭註]수춘壽春의 이름이니, 수주壽州에 속하였다. 포위하였으나 여러 해가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의논하는 자들이 남당南唐의 구원병이 아직도 강성하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군대를 철수할 것을 청하니, 세종世宗이 의심하였다.
이때 이곡李穀이 병이 들어 집에 있었는데, 2월에 세종世宗범질范質왕부王溥로 하여금注+[頭註]왕부王溥중서시랑中書侍郞 동평장사同平章事이다. 찾아가서 그와 상의하게 하니,
이곡李穀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수춘현壽春縣이 위태롭고 곤궁하여 아침저녁 사이에 격파당할 터인데, 만약 황상皇上注+[附註]은 모두 방울이니, 는 쇠로 된 입에 나무로 된 혀이고, 은 쇠로 된 입에 쇠로 된 혀이니, 수레가 가는 것을 절제하는 것이다. 수레를 타면 말이 움직이고 말이 움직이면 이 울리고 이 울리면 가 응하여 자연히 절주節奏(리듬)가 있게 되는데, 거가車駕가 너무 빠르면 서로 응하지 못하고 너무 느리면 소리가 나지 않으며, 만약 뒤섞여 소리가 나면 절주節奏에 합하지 않는다. 승거乘車에 있고 에 있으며, 융거戎車이 재갈에 있으니, 사마駟馬이 여덟 개이다. 친히 정벌하신다면 장병들이 다투어 분발하고 남당南唐의 구원병이 두려워할 것이니,
성 안에 있는 군사들이 자기 나라가 망할 줄을 알게 되면 우리가 틀림없이 함락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세종世宗이 기뻐하였다.
2월 을해일乙亥日(17일)에 주주周主 세종世宗대량大梁을 출발하였다.
이보다 앞서 나라가 남당南唐과 싸울 적에 남당南唐의 수군이 예리하고 민첩해서 나라 사람들이 상대할 수가 없었다.
세종世宗은 매번 이것을 통한으로 여겼는데, 수춘壽春에서 돌아온 뒤로 대량성大梁城 서쪽 변수汴水 가에 전함 수백 척을 건조建造하고 남당南唐의 항복한 병졸들에게 명하여 북쪽 사람들에게 수전水戰을 가르치게 하니, 몇 달 뒤에 나라 수군이 종횡으로 출몰함에 자못 남당南唐의 수군보다도 나았다.
이때에 이르러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 왕환王環에게 명하여 수군 수천 명을 거느리고 민하閔河로부터 영수潁水를 따라 회수淮水로 들어가게 하니, 남당南唐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는 크게 놀랐다.
임진일壬辰日(3월 5일) 아침에 세종世宗조보趙步에 군대를 주둔하니, 제장諸將들이 남당南唐자금산紫金山 성채城寨를 공격하여 대파하고 만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갑진일甲辰日(17일)에 세종世宗수춘성壽春城 북쪽에서 군용을 과시하였다.
나라 청회절도사淸淮節度使 유인섬劉仁贍이 질병이 심하여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니, 감군사監軍使 주정구周廷構 등이 유인섬劉仁贍의 이름으로 표문을 지어 유인섬劉仁贍을 가마로 메고서 성을 나와 항복하였다.
여름 4월에 세종世宗대량大梁으로 돌아왔다.
겨울 10월에 나라 세종世宗대량大梁을 출발하여 11월에 호주濠州에 이르러 남당南唐의 군대를 동구洞口에서 대파하니, 머리를 벤 것이 5천여 수급이고 항복한 병사가 2천여 명이었다.
이어서 승세를 타고 북을 치면서 행군하여 동쪽으로 가니, 이르는 곳마다 모두 항복하였다.
남당南唐의 군대가 후퇴하여 청구淸口를 지키자, 무오일戊午日(12월 6일) 아침에 세종世宗은 스스로 친위군을 거느리고 회수淮水 북쪽으로부터 전진하고, 나라 태조황제太祖皇帝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회수淮水 남쪽으로부터 전진하게 하고, 제장諸將들은 수군을 거느리고 중류中流로부터 전진하게 하여 함께 남당南唐의 군대를 추격하였다.
그리하여 노획한 전선은 불타고 침몰한 것 이외에 3백여 척을 얻었으며, 사졸은 죽임을 당하고 물에 빠져 죽은 자 이외에 7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회수淮水 가에 있던 남당南唐전선戰船이 이때에 다 없어졌다.


역주
역주1 : 표
역주2 : 소
역주3 : 섬
역주4 : 여

통감절요(9)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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