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顔杲卿이 起兵纔八日하야 守備未完이러니 史思明, 蔡希德이 引兵하야 皆至城下라
杲卿
이 告急於王承業
注+[頭註]大京尹이라한대 承業
이 欲竊其功
하야 利於城陷
하야 遂
擁兵不救라
杲卿이 晝夜拒戰호되 糧盡矢竭하야 城陷하니 賊이 縱兵殺萬餘人하고 執杲卿及袁履謙等하야 送洛陽하다
祿山이 數之曰 汝自范陽戶曹어늘 我奏汝爲判官하야 不數年에 超至太守하니 何負於汝而反耶아
杲卿
이 瞋目
注+[原註]瞋은 昌人反이니 張目也라 罵曰 汝本營州牧羊羯奴
注+[釋義]羯은 居謁反이니 營州柳城雜胡라[頭註] 羯은 地名이니 晉匈奴別部人居之러니 後因號匈奴爲羯하니라 러니 天子擢汝爲三道節度使
하시니 恩幸無比
어늘 何負於汝而反
고
祿山
이 大怒
하야 幷袁履謙等
하야 縛於中橋
注+[頭註]天津中橋也라之柱而
之
注+[頭註]咼는 音寡니 剔也라 하니 杲卿, 履謙
이 比死
토록 罵不虛口하니라
○ 上
이 命郭子儀
하야 進取東京
할새 選良將一人
하야 分兵先出井
하야 定河北
이러니
子儀薦李光弼하야 爲河東節度使하야 分朔方兵萬人하야 與之하다
二月에 光弼이 至常山하니 常山兵이 執安思義出降이라
史思明이 失勢하야 退入九門하니 時에 常山九縣에 七附官軍하고 惟九門, 藁城이 爲賊所據러라
○ 先是에 譙郡太守楊萬石이 以郡降安祿山하고 逼眞源令張巡하야 使爲長史하야 西迎賊이어늘
巡
이 至眞源
하야 帥吏民
하고 哭於玄元皇帝
注+[頭註]高宗進號老子曰太上玄元皇帝라하니 하니라 廟
하고 起兵討賊하니 吏民樂從者數千人
이라
巡
이 選精兵千人
하야 至雍丘
하야 與賈
注+[頭註]賁는 波義反이라 河南都知兵馬使니 前至雍丘하야 有衆二千하니라 合
하다
令狐潮
注+[頭註]令狐는 複姓이니 雍丘令이라 引賊精兵
하야 攻雍丘
注+[附註]潮以縣降賊이어늘 賊이 使擊淮陽이러니 俘百餘人하야 拘於雍丘하고 將殺之한대 淮陽兵이 作亂하니 潮棄妻子走라 賁得乘其間하야 入據雍丘하니라 하니
賁出戰敗死어늘 張巡이 力戰却賊하고 因兼領賁衆하다
乃使千人乘城
하고 自帥千人
하야 分數隊
하야 開門突出할새 巡
이 身先士卒하야 直衝賊陳(
陣)
하니人馬注+[釋義]辟易은 驚郤貌라 漢書註云 謂開張而易其本處也라 이라
賊遂退
라가 明日
에 復進攻城
하고 設百礟(砲)環城
하니 樓堞皆盡注+[釋義]礟는 披敎反이니 機石也라 環은 音患이니 繞也라 堞은 達叶反이니 城上女垣也라[通鑑要解] 礟는 俗作砲하니 戰石也라 機石也니 唐李密傳에 以機發石하야 爲攻城具라하니라 이라
巡이 於城上에 立木柵以拒之러니 賊이 蟻附而登이어늘
時伺賊隙
하야 出兵擊之
하고 或夜縋
營
注+[釋義]縋는 直爲反이니 垂繩也라[通鑑要解] 縋는 說文에 以繩有所懸也라하니라 斫營은 斫賊營壘니라 하야
積六十餘日에 大小三百餘戰할새 帶甲而食하고 裹瘡復戰하니 賊이 遂敗走라
巡이 乘勝追之하야 獲胡兵二千人而還하니 軍聲이 大振이러라
潮與張巡有舊
라 於城下
에 相勞苦如平生注+[釋義]勞는 郞到反이니 慰勞也라 釋云 恤其勤苦也라 하고 潮因說巡曰 天下事去矣
라
巡曰 足下平生에 以忠義自許러니 今日之擧는 忠義何在오하니 潮慚而退하니라
○ 郭子儀, 李光弼
이 還常山
하니 史思明
注+[頭註]賊將이라 이 收散卒數萬
하야 踵其後
라
子儀深溝高壘以待之할새 賊이 來則守하고 去則追之하며 晝則耀兵하고 夜斫其營하니 賊이 不得休息이라
數日에 子儀, 光弼이 議曰 賊倦矣니 可以出戰이라하고 戰于嘉山하야 大破之하야 斬首四萬級하고 捕虜千餘人하다
思明이 墜馬하야 奔于博陵이어늘 光弼이 就圍之하니 軍聲이 大振이라
於是에 河北十餘郡이 皆殺賊守將而降하야 漁陽路再絶하니 賊將士家在漁陽者 無不搖心이라
會
에 有告崔乾祐
注+[頭註]賊將이라 在陝
에 兵不滿四千
이요 皆
弱無備
라하야늘
上
이 遣使趣(促)哥舒翰
注+[頭註]趣는 讀曰促이라 楊國忠이 疑翰謀己하야 言 翰逗留不進하야 將失機會라한대 上遣中使促之하야 項背相望하니라 하야 進兵復陝洛
하니 翰
이 不得已
撫膺注+[頭註]擊胸也라 慟哭하고 引兵出關
이라가 遇崔乾祐之軍於靈寶西原
하야 翰
이 大敗
하니 囂聲
이 振天地
라
賊이 乘勝蹙之하니 後軍이 亦潰하고 河北軍이 望之亦潰하야 瞬息間에 兩岸이 皆空이라
翰
이 獨與麾下百餘騎
로 入關
이러니 乾祐進攻潼關克之
하고 蕃將火拔歸仁
注+[頭註]火拔은 虜複姓이라 이 執翰降賊
注+[通鑑要解]翰降이어늘 祿山問翰曰 汝常輕我러니 今日如何오한대 翰伏地對曰 臣은 이라 不識聖人이니이다하니 祿山大悅하니라 하니 祿山
이 以翰爲司空同平章事
하다
○ 上
이 懼
注+[通鑑要解]哥舒翰麾下來告急이러니 及日暮에 平安火不至라 故로 上始懼也하니라 하야 召宰相謀之
한대 楊國忠
이 首唱幸蜀
注+[附註]上이 命陳玄禮하야 整比六軍하야 厚賜錢帛하고 選廐馬九百餘匹하니 外人은 莫之知라 乙未黎明에 帝與貴妃姊妹皇子妃(王)[主]皇孫, 楊國忠, 韋見素等及親近宦官宮人으로 出去할새 上이 遣宦者王洛卿前行하야 告諭郡縣置頓이러니 洛卿이 與縣令俱逃하고 徵召吏民호되 莫有應者하니 小利故也라 之策
하니 上
이 然之
하다
乙未에 出延秋門하야 至咸陽하니 日이 向中이로되 上猶未食이러니
國忠
이 自市胡餠
注+[頭註]卽蒸餠이니 以胡麻着之也라 一云爐餠이니 胡人所㗖이라 故로 曰胡餠이라하니라 以獻
하니 於是
에 民爭獻糲飯
注+[頭註]一斛粟舂七斗米爲糲也라 十斗爲斛이라 이라
有老父郭從謹이 進言曰 祿山이 包藏禍心은 固非一日이라
亦有詣闕
하야 告其謀者
면 陛下往往誅之
하야 使得逞其姦逆
注+[頭註]逞은 恣肆快意라 하야 致陛下播越
注+[頭註]播遷顚越也라 하시니
是以로 先王이 務延訪忠良하야 以廣聰明은 蓋爲此也니이다
臣
이 猶記宋璟爲相
에 進直言
하야 天下賴以安平
이러니 自頃以來
로 在廷之臣
이 以言爲諱하고 惟
阿諛取容이라
是以로 闕門之外를 陛下皆不得知하시니 草野之臣은 必知有今日이 久矣로이다
但九重嚴邃
하야 區區之心
注+[頭註]區區는 猶勤勤이라 을 無路上達하니 事不至此
면 臣
이 何由得睹陛下之面而訴之乎
잇가
上曰 此는 朕之不明이니 悔無所及이라하고 慰諭而遣之하니라
○ 至馬嵬驛
注+[釋義]馬嵬는 地名也니 在咸陽西라 今安西路興平縣正西三十五里에 有馬嵬坡하니라 하니 將士飢疲
하야 皆憤怒
라
陳玄禮
注+[頭註]龍武大將軍이라 以禍由楊國忠
이라하야 欲誅之
러니 會
에 吐蕃使者二十餘人
이 遮國忠馬
하고 訴以無食
이어늘
國忠이 未及對에 軍士呼曰 國忠이 與胡虜謀反이라하고 追殺之하야 以槍揭其首하다
上이 杖屨出驛門하야 慰勞軍士하고 令收隊호되 軍士不應이라
上이 使高力士로 問之한대 玄禮對曰 國忠이 謀反하니 貴妃를 不宜供奉이라
高力士曰 貴妃誠無罪나 然將士已殺國忠이어늘 而貴妃在陛下左右면 豈敢自安이리잇고
上
이 乃命力士
하야 引貴妃於佛堂
하야 殺之
하고 輿屍寘驛庭
하고 召玄禮等入視之
하니 於是
에 始整部伍
하야 爲行計
하니라
○ 上
이 將發馬嵬
할새 父老皆遮道請留曰
宮闕은 陛下家居요 陵寢注+[頭註]古者에 宗廟는 前廟後寢이러니 至秦始하야 出寢起於廟側이라 故로 陵上을 稱寢殿하니 有衣冠几杖象生之具하니라 은 陛下墳墓시니 今捨此欲何之
시니잇고
上이 爲之按轡久之라가 乃命太子하야 於後에 宣慰父老하니
父老因曰 至尊이 旣不肯留하시니 某等이 願帥子弟하고 從殿下하야 東破賊하고 取長安하리이다
若殿下與至尊으로 皆入蜀하시면 使中原百姓으로 誰爲之主리잇고
太子不可曰 至尊이 遠冒險阻하시니 吾豈忍朝夕離左右리오
且吾尙未面辭
호니 當還白至尊
하야 更禀進止
호리라하고 涕泣跋馬
注+[釋義]跋은 回也라欲西
한대
建寧王
이 與李輔國
으로 執
注+[釋義]鞚은 苦貢反이니 馬勒也라 諫曰 逆胡犯闕
에 四海分崩하니 不因人情이면 何以興復이릿고
今殿下從至尊入蜀이라가 若賊兵이 燒絶棧道면 則中原之地를 拱手授賊矣리니
不如收西北守邊之兵
하고 召郭李於河北
注+[頭註]郭李는 郭子儀, 李光弼이라 하야 與之倂力
이니 東討逆賊
하야 克復二京
하고 削平四海
하야 以迎至尊
이 豈非孝之大者乎
잇가
廣平王俶이 亦勸太子留하고 父老共擁太子馬하야 不得行이라
上
이 摠轡待太子
호되 久不至
어늘 使人偵之
注+[釋義]偵은 丑正反이니 問也라 한대 還白狀
이라
上曰 天也
라하고 乃命分後軍二千人及飛龍廐馬
注+[頭註]飛龍은 廐名이니 에 飛龍爲最上하니라 하야 從太子
하고 且諭將士曰 太子仁孝
하야 可奉宗廟
하니 汝曹
는 善輔佐之
하라하고
又諭太子曰 西北諸胡
를 吾撫之素厚
하니 汝必得其用
하리라 太子南向號泣
注+[頭註]上已南邁로되 而太子留在後라 故로 南向號泣하니라 而已
러라
○ 安祿山이 不意上遽西幸하니 遣使하야 止崔乾祐兵하야 留潼關凡十日에 乃遣孫孝哲하야 將兵入長安하다
然賊將이 皆麤猛無遠略하야 旣克長安에 自以爲得志라하야 日夜縱酒하고 專以聲色寶賄爲事하고 無復西出之意라
故로 上이 得安行入蜀하고 太子北行에 亦無追迫之患이러라
○ 太子至平凉
注+[釋義]平凉은 舊屬隴右라 今平凉府에 有平凉縣하니 在陝西하니라數日
에 朔方留後杜鴻漸
이 迎太子於平凉北境
하고 說太子曰 朔方
은 天下勁兵處也
라
今
에 吐蕃請和
하고 回紇
注+[頭註]其先匈奴라 內附
하고 四方郡縣
이 大抵堅守拒賊
하야 以俟興復
하니
殿下今理兵靈武하야 按轡長驅하고 移檄四方하야 收攬忠義하시면 則逆賊을 不足屠也리이다
秋七月
에 太子至靈武
注+[釋義]靈武는 漢朔方郡也니 今夏州是라 括地志云 靈武는 卽蕭關也라하니 裴冕
注+[頭註]河西行軍參軍이라 , 杜鴻漸等
이 上太子牋
注+[釋義]牋은 表書也니 於書中에 有所表記之也라 하야 請遵馬嵬之命
하야 卽皇帝位
한대 太子不許
라
冕等
이 言曰 將士
는 皆關中人
이라 日夜思歸호되 所以崎嶇從殿下
注+[頭註]崎嶇는 山路也요 又謂艱險也라 하야 遠涉沙塞者
는 冀尺寸之功
이니 若一朝離散
이면 不可復集
이라
是日에 肅宗이 卽位於靈武하야 尊玄宗曰上皇天帝라하고 赦天下하고 改元至德하다
睿宗
이 因其子之功
注+[頭註]見三十九卷庚戌年하니라 而在位不久
하니 固無可稱者
라
自高祖
로 至于中宗
히 數十年間
에 再罹女禍
注+[頭註]則天武氏와 及中宗韋后라 하야 唐祚旣絶而復續
하며 中宗
은 不免其身注+[頭註]中宗爲韋后所殺하니라 하고 韋氏
는 遂以滅族
이라
玄宗
이 親平其亂
하니 可以鑑矣
어늘 而又敗以女子
注+[頭註]謂楊貴妃成天寶之亂하니라 로다
方其勵精政事하야 開元之際에 幾致太平하니 何其盛也오
及侈心一動에 窮天下之欲호되 不足爲其樂하야 而溺其所甚愛하고 忘其所可戒하야
肅宗이 以太子討賊이라가 遂自稱帝하니 此乃太子叛父니 何以討祿山也리오
唐有天下 幾三百年이니 由漢以來로 享國이 最爲長久라
然이나 三綱不立하야 無父子君臣之義하야 見利而動하고 不顧其親이라
古之王者는 必正身齊家하야 以率天下하니 其身不正이면 未有能正人者也라
唐之父子不正이어늘 而欲以正萬事면 難矣니 其享國長久도 亦曰幸哉인저
其失은 在玄宗命不亟行하고 而裴冕諸人이 急於榮貴라
使肅宗著於父子君臣之義면 豈(於)[爲]諸人所移리오
唐高祖睿玄之過는 不見幾故也요 而太宗明肅之惡은 欲速見小利故也라
時에 塞上精兵은 皆選入討賊하고 惟餘老弱이 守邊하니 文武官이 不滿三十人이라
披草萊하고 立朝廷하니 制度草創하야 武人驕慢이라
大將管崇嗣在朝堂
에 背闕而坐
하야 言笑自若이어늘 監察御史李勉
注+[通鑑要解]高祖之子요 鄭王元懿之曾孫也라 이 奏彈之
하야 繫於有司
한대
上
이 特原之
注+[頭註]赦罪曰原이라 하고 歎曰 吾有李勉
하야 朝廷
이 始尊
이라하니라
玄宗이 使與太子로 爲布衣交하니 太子常謂之先生이러니 後에 隱居潁陽이라
上이 自馬嵬北行할새 遣使召之하니 謁見於靈武어늘
上이 大喜하야 出則聯轡하고 寢則對榻하야 如爲太子時하고 事無大小히 皆咨之하야 言無不從하고
上이 欲以泌爲右相한대 泌이 固辭曰 陛下待以賓友하시면 則貴於宰相矣니 何必屈其志리잇고 上이 乃止하다
○ 庚辰에 上皇이 至成都하니 從官及六軍至者 千三百人而已러라
○ 令狐潮圍張巡於雍丘하야 相守四十餘日에 朝廷聲問이 不通이라
有大將六人이 官皆開府特進이라 白巡호되 以兵勢不敵이요 且上存亡을 不可知하니 不如降賊이라하야늘
巡이 陽許諾하고 明日에 堂上設天子畫像하고 帥將士朝之하니 人人皆泣이라
巡이 引六將於前하야 責以大義斬之하니 士心益勸이라
城中矢盡
이어늘 巡
이 縛藁爲人千餘
하야 被以黑衣
하고 夜縋城下
注+[頭註]縋는 垂繩也라 하니 潮兵
이 爭射之
라가 久
에 乃知其藁人
이라
乃以死士五百으로 斫潮營하니 潮軍이 大亂하야 焚壘而遯이라
巡이 使郞將雷萬春으로 於城上에 與潮相聞할새 語未絶에 賊이 弩射之하야 面中六矢而不動이라
潮疑其木人하야 使諜問之하고 乃大驚하야 遙謂巡曰 向見雷將軍하니 方知足下軍令矣로다
巡謂之曰 君
未識人倫하니 焉知天道注+[通鑑要解]叛君附賊하야 不識君臣之倫也라 리오
未幾에 出戰하야 擒賊將十四人하고 斬首百餘級하니 賊乃夜遯하야 收兵入陳留하야 不敢復出하니라
秦漢以後로 學者不能知也어늘 而巡之言及此하니 則巡之才識이 豈特能馭軍守城而已乎아
郭子儀等이 將兵五萬하고 自河北으로 至靈武하니 靈武軍威始盛이라
○ 北海太守 賀蘭進明
注+[頭註]賀蘭은 複姓也라 이 遣錄事參軍第五琦
注+[頭註]第五亦複姓也니 齊田氏之後라 漢初에 田氏徙園陵者多라 故로 以次第爲氏하니라 하야 入蜀奏事
러니 琦言於上皇
하야 以爲方今用兵
에 財賦爲急
이라
財賦所産은 江淮居多하니 乞假臣一職하시면 可使軍無乏用호리이다
○ 靈武使者至蜀하니 上皇이 喜曰 吾兒應天順人하니 吾復何憂리오
乃制
호되 自今
으로 改制勅爲誥
注+[通鑑要解]誥는 告也니 告上曰이요 發下曰誥라 하고 表疏
에 稱太上皇
하며 四海軍國重事
를 皆先取皇帝進止
하고 仍奏朕知
하라
仍命韋見素, 房琯, 崔渙하야 奉傳國寶玉冊하야 詣靈武傳位하다
○ 初
에 上皇
이 每酺宴
注+[附註]酺는 音蒲니 王德布飮酒也라 漢律에 三人已上會飮이면 罰金四兩이로되 면 得聚飮이라 唐無此禁이나 亦賜酺者는 聚作伎樂하고 高年賜酒麵이니라 에 先設太常雅樂坐部立部
注+[釋義]明皇이 分樂爲二部하야 堂下立奏를 謂之立部伎요 堂上坐奏를 謂之坐部伎라하니라하고 繼以鼓吹
注+[釋義]吹는 去聲이니 北狄馬上之聲이라 自漢以後로 以爲鼓吹라하니 亦軍中樂을 馬上奏之라 故로 唐以隷鼓吹部하니라 胡樂
과 敎坊府縣散樂雜戲
注+[釋義]散은 上聲이라 明皇爲平王에 有散樂一部러니 定韋后之難에 頗有預謀者하다 及卽位에 命寧王하야 主蕃邸樂하야 以充太常하고 分兩朋하야 以角優劣하며 置內敎坊於蓬萊宮側하고 居新聲散樂倡優之伎하니라 하며 又以山車陸船
注+[頭註]山車는 車上施棚閣하고 加綵繒하야 爲山林之狀이라 陸船은 縛竹木爲船形하고 餙以繒綵하야 列人於中하고 舁之以行하니라 으로 載樂器往來
하고
又出宮人
하야 舞
裳羽衣
注+[釋義]明皇〈時〉에 河西節度使楊欽忠이 獻霓裳羽衣曲十二遍하니 凡曲終必遽로되 唯此曲은 將畢에 引聲益緩하니라 하고 又敎舞馬百匹
注+[通鑑要解]帝以馬百匹盛飾하고 分左右하야 施三重榻하고 舞傾盃數十曲하며 壯士擧榻에 馬不動하니라 로 啣盃上壽
하고 又引犀象入場
하야 或拜或舞
하니
安祿山이 見而悅之러니 旣克長安에 命搜捕樂工하고 運載樂器舞衣하고 驅舞馬犀象하야 詣洛陽하다
聖人
은 以道德爲麗
注+[通鑑要解]麗音离니 之麗也요 又本音戾也라하고 仁義爲樂
注+[釋義]樂은 力洛反이니 娛也라 이라
故
로 雖茅茨土階
注+[釋義]茨는 疾玆反이니 茅茨는 以草屋也라 茅茨不剪하고 라하고 惡衣菲食
注+[釋義]菲는 撫尾反이니 薄也라 惡衣服, 菲飮食은 謂禹也라 이라도 不恥其陋
하고 唯恐奉養之過
하야 以勞民費財
라
明皇
이 恃其承平
注+[頭註]承一作升하니 民有三年之儲曰升平이라 하고 不思後患
하야 殫耳目之玩
注+[釋義]殫은 多寒反이니 極也라 하고 窮聲技之巧
하야 自謂帝王富貴 皆不我如
라하야
欲使前莫能及
하고 後無以踰
하야 非徒娛己
라 亦以誇人
하니 豈知大盜在旁
에 已有窺窬之心
注+[釋義]窬는 容朱反이니 私視也라 하야 卒使鑾輿播越
하고 生民塗炭
이리오
祿山
이 宴其群臣於凝碧池
注+[頭註]在洛陽禁苑하니라 할새 盛奏衆樂
하니 梨園子弟
注+[頭註]泣餘聲이라 泣下라
賊
이 皆露刃
之
러니 樂工雷海淸
이 不勝悲憤하야 擲樂器於地
하고 西向慟哭
하니 祿山
이 怒
하야 縛於試馬殿前
하고 支解之
하다
○ 祿山
이 聞嚮日
에 百姓乘亂
하야 多盜庫物
하고 旣得長安
에 命大索三日
하야 幷其私財
하야 盡掠之
하며 又令府縣推按
하야 銖兩之物
注+[頭註]十黍爲요 十絫爲銖요 八銖爲錙요 二十四銖爲兩이라 를 無不窮治
하니 連引搜捕하야 枝蔓無窮이라
自上離馬嵬北行으로 民間相傳호되 太子北收兵하야 來取長安이라하니
長安民이 日夜望之하야 或時相驚曰 太子大軍至矣라하면 則皆走하야 市里爲空이라
賊이 望見北方塵起하면 輒驚欲走어늘 京畿豪傑이 往往殺賊官吏하고 遙應官軍하야 誅而復起하야 相繼不絶하니 賊不能制라
其始
에 自京畿
坊
注+[頭註]二州名이라 鄜는 音浮라으로 至于岐隴
히 皆附之
러니 至是
에 西門之外
注+[頭註]西門은 長安城西門이라 率爲敵壘로되 賊兵力所及者
는 南不出武關
이요 北不過雲陽
이요 西不過武功
이라
江淮奏請貢獻
하야 之蜀之靈武者 皆自襄陽
으로 取上津路
注+[通鑑要解]上津은 漢中長利縣地라 하야 抵扶風
하야 道路無壅
은 皆薛景仙之功
注+[釋義]時에 景仙이 爲陳倉令하야 殺賊守將하고 克扶風而守之하니라也
러라
○ 九月
에 以廣平王俶
注+[頭註]是爲代宗이라 으로 爲天下兵馬元帥
하야 諸將
을 皆以屬焉
하다
○ 上
이 與李泌出行軍
注+[頭註]去聲이니 巡視也라 할새 軍士指之
하고 竊言曰 衣黃者
는 聖人也
注+[釋義]衣는 去聲이니 着也라 下同이라[通鑑要解] 聖人은 謂上也니 唐之臣子率稱君父謂聖也하니라 요 衣白者
는 山人也
라한대
上聞之하고 以告泌曰 艱難之際에 不敢相屈以官이나 且衣紫袍하야 以絶群疑하라
泌不得已受之
하야 服之
하고 入謝
어늘 上笑曰 旣服此
하니 豈可無名稱
이리오하고 出懷中勅
하야 以泌爲侍謀軍國元帥府行軍長史
注+[頭註]創侍謀之官하야 以處泌하니라 하다
泌固辭어늘 上曰 朕이 非敢相臣이요 以濟艱難耳니 俟賊平하야 任行高志하라한대 泌乃受之하니라
琯
이 見上
하고 言時事
에 辭情慷慨注+[釋義]慷慨는 竭誠也라 어늘 上
이 爲之改容
이라
由是로 軍國事를 多謀於琯하고 琯亦以天下爲己任하야 知無不爲하야
○ 十月
에 上
이 至彭原
하니 第五琦見上
하고 請作
鹽法
하야 用以饒
하다
○ 房琯이 喜賓客, 好談論하야 多引拔知名之士로되 而輕鄙庸俗하니 人多怨之라
北海太守賀蘭進明
이 詣行在
하야 言於上曰 晉用王衍爲三公
이러니 祖尙浮虛하야 致中原板蕩
注+[釋義]中原板蕩은 謂中華喪亂也니 板, 蕩은 竝詩篇名이라하니이다
今房琯이 專爲迂闊大言하야 以立虛名하고 所引用이 皆浮華之黨이니 眞王衍之比也니이다
○ 琯이 上疏하야 請自將兵하야 復兩京이어늘 上許之하다
琯
이 悉以戎務
로 委李揖, 劉秩
하니 二人
이 皆書生
이라 不閑軍旅注+[頭註]閑은 習也라 로되 琯謂人曰 賊
落河
注+[釋義]初에 安祿山이 養同羅, 奚, 契丹降者八千餘人하고 號曰曳落河라 胡語曳落河는 華言壯士也라 曳은 羊列反이다. 雖多
나 安能敵我劉秩
이리오하니라
琯軍
이 遇賊將安守忠於咸陽之陳濤斜
注+[釋義]陳濤斜는 咸陽地名이라[通鑑要解] 陳燾澤在咸陽縣東하니 其路斜出故로 曰陳燾斜라하니라 하야
琯이 效古法, 用車戰하야 以牛車二千乘으로 馬步夾之러니 賊이 順風鼓譟하니 牛皆震駭라
賊이 縱火焚之하니 人畜大亂하야 官軍死者四萬餘人이요 存者數千而已러라
房琯이 有高志虛名而無實才어늘 肅宗이 旣疏之로되 而猶以爲將帥하니 是不知其臣也요 琯以讒見疏로되 而猶以討賊爲己任하니 是不量其君也라
君不知其臣하고 臣不量其君하고 而欲成天下之務는 未之聞也라
且肅宗任琯而琯任劉秩하야 君臣不知人이 如此하니 夫安得不敗乎아
천보天寶 15년年(丙申 756) - 숙종황제肅宗皇帝 지덕至德 원년元年 -
정월에 안녹산安祿山이 스스로 대연황제大燕皇帝라 칭하고 성무聖武로 개원改元하였다.
안고경顔杲卿이 군대를 일으킨 지 겨우 8일이어서 수비가 아직 완전하지 못했는데, 사사명史思明과 채희덕蔡希德이 군대를 이끌고 범양성范陽城 아래에 이르렀다.
안고경顔杲卿이
왕승업王承業에게 위급함을 고하였으나
왕승업王承業은
注+[頭註]왕승업王承業은 대경大京의 윤尹이었다. 그의 공을 가로채고자 하여 성이 함락되는 것을 이롭게 여겨 마침내 군대를 보유하고(출동시키지 않고) 구원하지 않았다.
안고경顔杲卿이 밤낮으로 적에게 항거하여 싸웠으나 양식이 다하고 화살이 떨어져 성이 함락되니, 적이 군대를 풀어 만여 명을 죽이고 안고경顔杲卿과 원이겸袁履謙 등을 사로잡아 낙양洛陽으로 압송하였다.
안녹산安祿山이 〈안고경顔杲卿에게〉數罪하기를 “너는 본래 범양范陽의 호조戶曹의 자리에 있었는데 내가 황제께 아뢰어 너를 판관判官으로 삼고 몇 년이 안 되어 크게 승진해서 태수太守에 이르렀으니, 내가 너에게 무엇을 저버렸기에 나를 배반하였는가.” 하였다.
안고경顔杲卿이 눈을 부릅뜨고
注+[原註]진瞋은 창인반昌人反(진)이니, 눈을 부릅뜨는 것이다. 꾸짖기를 “너는 본래
영주營州의 양을 치던
갈족羯族의 종이었는데
注+[釋義]갈羯은 거알반居謁反(갈)이니, 영주營州 유성柳城의 잡호雜胡이다. [頭註]갈羯은 지명地名이니, 진晉(東晉)나라 때 흉노匈奴의 별부別部 사람들이 거주하였는데, 뒤에 인하여 흉노匈奴를 갈羯이라고 칭하였다. 천자가 너를 발탁하여
삼도三道의
절도사節度使를 삼으셨으니, 은혜와 총애가 견줄 사람이 없는데 천자가 너에게 무엇을 저버렸기에 천자를 배반하였는가.
나는 대대로 당唐나라의 신하이니, 녹과 지위가 모두 당唐나라의 소유이다.
내 비록 너의 주청奏請으로 등용되었으나 어찌 너를 따라 배반하겠는가.
내가 나라를 위하여 역적을 토벌함에 너를 목 베지 못하는 것이 통한이니, 어찌 나더러 배반했다고 하는가.
누린내 나는 개 같은
갈족羯族아!
注+[原註]조臊은 소조반蘇曹反(소)이니 누린내가 나는 것이다.
안녹산安祿山이 크게 노하여
원이겸袁履謙 등과 함께
중교中橋의
注+[頭註]중교中橋는 천진天津의 중교中橋이다. 기둥에 묶어 찢어 죽이니,
注+[頭註]과咼는 음이 과이니, 쪼개는(능지처참하는) 것이다. 안고경顔杲卿,
원이겸袁履謙이 죽을 때까지 꾸짖는 말을 입에서 그치지 않았다.
상上이 곽자의郭子儀에게 명하여 나아가 동경東京을 점령하게 할 적에 훌륭한 장수 한 사람을 뽑아 병력을 나누어 먼저 정형井陘으로 나가서 하북河北을 평정하게 하였다.
곽자의郭子儀가 이광필李光弼을 천거하여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로 삼고 삭방朔方의 병력 만 명을 나누어 그에게 주었다.
2월에 이광필李光弼이 상산常山에 이르니, 상산常山의 병사들이 안사의安思義를 사로잡아 성문을 나와 항복하였다.
사사명史思明이 세력을 잃고는 후퇴하여 구문九門으로 들어가니, 이때 상산군常山郡의 아홉 현縣 중에 일곱 현은 관군官軍에 붙고 오직 구문九門과 고성藁城 두 현만이 적에게 점거당하였다.
이에 앞서 초군譙郡 태수太守 양만석楊萬石이 군郡을 가지고 안녹산安祿山에게 항복하고는 진원현령眞源縣令 장순張巡을 핍박하여 그를 장사長史로 삼아 서쪽에서 적을 맞이하게 하였다.
장순張巡이
진원현眞源縣에 이르러 관리와 백성을 거느리고
현원황제玄元皇帝의
注+[頭註]고종高宗이 노자老子에게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태상현원황제太上玄元皇帝라 하였으니, 당唐나라는 노자老子를 시조로 하였다. 사당에서 곡한 다음 군대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니, 관리와 백성으로서 기꺼이 따르는 자가 수천 명이었다.
장순張巡이 정예병 천 명을 선발하여
옹구현雍丘縣에 이르러
가분賈賁와
注+[頭註]분賁는 파의반波義反(비)이다. 가분賈賁는 하남도지병마사河南都知兵馬使이니, 앞서 옹구현雍丘縣에 이르러 2천 명의 병력을 보유하였다. 연합하였다.
영호조令狐潮가
注+[頭註]영호令狐는 복성複姓이니, 옹구현령雍丘縣令이었다. 적의 정예병을 이끌고서
옹구현雍丘縣을 공격하였다.
注+[附註]영호조令狐潮가 옹구현雍丘縣을 가지고 적에게 항복하자, 적이 그로 하여금 회양淮陽을 공격하게 하였다. 영호조令狐潮가 백여 명을 사로잡아 옹구현雍丘縣에 가두고 장차 이들을 죽이려 하자, 회양淮陽의 병사들이 난리를 일으키니, 영호조令狐潮가 처자식을 버리고 달아났다. 가분賈賁가 그 틈을 타서 옹구현雍丘縣에 들어가 점거하였다.
가분賈賁가 나와 싸우다가 패하여 죽자 장순張巡이 강력히 싸워 적을 물리치고 인하여 가분賈賁의 군대를 겸하여 통솔하였다.
장순張巡이 마침내 천 명으로 하여금 성에 올라가게 하고 자신은 천 명을 거느리고 몇
대隊로 나누어서 성문을 열고
돌출突出하였는데,
장순張巡이 몸소
사졸士卒들 앞에 나서서
적진賊陣으로 곧바로 돌격하니, 적의 군사와 말들이 피하여 흩어졌다.
注+[釋義]벽역辟易은 놀라서 퇴각하는 모양이다. 《한서漢書》의 주註에 이르기를 “옆으로 벌려 그 본래 있던 장소를 바꾸는 것이다.” 하였다.
적이 마침내 피하였다가 다음날 다시 성을 진격하고 백 개의
포거抛車를 설치하여 성을 둘러싸니, 망루와 성가퀴가 다 부서졌다.
注+[釋義]설백포設百礟(砲)環城 누첩개진樓堞皆盡:[釋義]포礟는 피교반披敎反(표)이니 기계로 돌을 날리는 것이다. 환環은 음이 환이니 둘러싸는 것이다. 첩堞은 달협반達叶反(접)이니 성 위의 여원女垣(女墻)이다. [通鑑要解]포礟는 시속에서 포砲로 쓰니, 돌을 날려 싸우는 것이다. 기구로 돌을 발사하는 것이니, 《당서唐書》 〈이밀전李密傳〉에 “기구로 돌을 날려서 성城을 공격하는 도구로 썼다.” 하였다.
장순張巡이 성 위에 목책木柵을 세워 적을 막았는데 적이 개미떼처럼 붙어 올라왔다.
장순張巡이 쑥을 묶고 여기에 기름을 부어 불을 붙여 던지니, 적이 올라오지 못하였다.
장순張巡은 때로 적의 틈을 엿보아 군대를 내보내 공격하였고, 혹은 밤중에 밧줄로 군사들을 매달아 성 밖으로 내보내 적의 진영을 공격하였다.
注+[釋義]추縋는 직위반直爲反(추)이니 밧줄을 드리우는 것이다. [通鑑要解]추縋는 《설문說文》에 ‘끈을 가지고 매다는 것이다.’ 하였다. 작영斫營은 적賊의 영루營壘를 기습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60여 일 동안 크고 작은 싸움을 벌여 300여 차례 전투하였는데, 갑옷을 입은 채 밥을 먹으며 상처를 싸매고 다시 싸우니, 적이 마침내 패주敗走하였다.
장순張巡이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오랑캐 병사 2천 명을 사로잡고 돌아오니, 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쳐졌다.
5월에 영호조令狐潮가 다시 군대를 이끌고 옹구雍丘를 공격하였다.
영호조令狐潮는
장순張巡과 구면이었으므로 성 아래에서 평소처럼 서로 노고를 위로하고는,
注+[釋義]노勞는 랑도반郞到反(로)이니, 위로함이다. 해석에 이르기를 “노고함을 걱정하는 것이다.” 하였다. 영호조令狐潮가 이 틈을 타
장순張巡을 설득하기를 “천하의 일이 이미 틀렸다.
족하足下가 위태로운 성을 견고히 지켜 누구를 위하고자 하는가?” 하였다.
장순張巡이 대답하기를 “족하足下는 평소 충의 있는 사람으로 자부하더니, 오늘의 일은 충의가 어디에 있는가?” 하니, 영호조令狐潮가 부끄러워하며 물러갔다.
곽자의郭子儀와
이광필李光弼이
상산常山에서 돌아오니,
사사명史思明이
注+[頭註]사사명史思明은 적장賊將이다. 흩어진 군대 수만 명을 수습하여 그 뒤를 따라왔다.
곽자의郭子儀가 항양恒陽에 이르니, 사사명史思明이 뒤따라 왔다.
이에 곽자의郭子儀는 해자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게 쌓아 대비하였는데, 적이 오면 지키고 떠나가면 추격하며, 낮에는 병력을 과시하고 밤에는 적의 진영을 공격하니, 적이 휴식할 수가 없었다.
며칠 있다가 곽자의郭子儀와 이광필李光弼이 의논하기를 “적이 피로하니, 이제 출전할 수 있다.” 하고는 가산嘉山에서 싸워 적을 대파하여 4만 명의 수급을 베고 포로 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사사명史思明이 말에서 떨어져 박릉博陵으로 도망하자 이광필李光弼이 쫒아가 포위하니, 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쳐졌다.
이에 하북河北의 10여 군郡이 모두 적의 수령과 장수를 죽이고 조정에 항복하여 어양漁陽의 길이 다시 끊기니, 적의 장병 중에 집이 어양漁陽에 있는 자들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안녹산安祿山이 크게 두려워하여 낙양洛陽을 버리고 범양范陽으로 돌아갈 것을 의논하였다.
이때 마침 황제에게 ‘
최건우崔乾祐가
注+[頭註]최건우崔乾祐는 적장賊將이다. 섬주陝州에 있는데 군대가 채 4천 명이 되지 못하고 모두 파리하고 약하여 수비가 없다.’고 아뢰는 자가 있었다.
상上이 사자를 보내어
가서한哥舒翰을
注+[頭註]취趣는 촉促으로 읽는다. 양국충楊國忠은 가서한哥舒翰이 자기를 도모하는가 의심하여 이르기를 “가서한哥舒翰이 머뭇거리고 전진하지 아니하여 장차 좋은 기회를 잃게 생겼다.”라고 하자, 상上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독촉해서 목과 등이 서로 이어지듯 빈번하였다. 재촉해서 진군하여
섬주陝州와
낙주洛州를 수복하게 하니,
가서한哥舒翰이 마지못하여 가슴을 치면서
注+[頭註]무응撫膺은 가슴을 치는 것이다. 통곡하고는 군대를 이끌고 관문을 나갔다가
최건우崔乾祐의 군대를
영보靈寶의
서원西原에서 만나 싸워
가서한哥舒翰이 크게 패하니, 군사들의 고함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적이 승세를 타고 압박하니, 뒤의 군대가 또한 무너졌고 하북河北의 군대가 이것을 보고 또한 무너져서 순식간에 두 강안江岸이 모두 텅 비게 되었다.
가서한哥舒翰은 홀로 휘하 기병 백여 명과 함께 관문에 들어갔는데,
최건우崔乾祐가
동관潼關으로 진격하여 함락시키고,
번장蕃將 화발귀인火拔歸仁이
注+[頭註]화발火拔은 오랑캐의 복성複姓이다. 가서한哥舒翰을 사로잡아 적에게 항복시키니,
注+[通鑑要解]가서한哥舒翰이 항복하자, 안녹산安祿山이 가서한哥舒翰에게 묻기를 “너는 항상 나를 깔보더니, 오늘 어떠한가?” 하니, 가서한哥舒翰이 땅에 엎드려 대답하기를 “신臣은 육안肉眼이라 성인聖人을 몰라 뵈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안녹산安祿山이 크게 기뻐하였다. 안녹산安祿山이
가서한哥舒翰을
사공司空 동평장사同平章事로 삼았다.
상上이 두려워하여
注+[通鑑要解]가서한哥舒翰의 휘하가 와서 위급함을 알렸는데, 날이 저물도록 평안平安함을 알리는 봉화烽火가 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상上이 비로소 두려워한 것이다. 재상宰相들을 불러 상의하자,
양국충楊國忠이 제일 먼저
촉蜀 지방으로 파천할
注+[附註]상上이 진현례陳玄禮에게 명하여 육군六軍을 정돈해서 돈과 비단을 후히 내려주고 황제의 어구마 900여 필을 선발하니, 바깥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을미일乙未日 여명黎明에 황제가 양귀비楊貴妃와 귀비貴妃의 자매, 황자皇子와 비妃, 공주와 황손皇孫, 양국충楊國忠과 위견소韋見素 등과 친근한 환관宦官과 궁인들과 함께 도성을 나갈 적에, 상上이 환관인 왕낙경王洛卿을 보내어 먼저 가서 군현郡縣에 알려 머물 곳을 설치하게 하였으나 왕낙경王洛卿은 현령縣令들과 함께 모두 도망하였고 관리와 백성들을 불렀으나 응하는 자가 없었으니, 이익이 작기 때문이었다. 계책을 제창하니,
상上은 그의 말을 옳게 여겼다.
을미일乙未日(6월 13일)에 상上이 연추문延秋門을 나가 함양咸陽에 이르니, 해가 중천에 있었으나 상上이 아직도 밥을 먹지 못하였다.
양국충楊國忠이 스스로
호병胡餠(호떡)을
注+[頭註]호병胡餠은 바로 증편이니, 호마胡麻(참깨)를 붙이기 때문에 호병胡餠이라 한 것이다. 일설一說에는 “화로에 굽는 떡이니, 호인胡人들이 먹는 것이기 때문에 호병胡餠이라 한다.” 하였다. 사서 올리니, 이에 백성들이 다투어 조밥을 올렸다.
注+[頭註]1곡斛의 곡식을 찧어서 일곱 말의 쌀을 얻는 것을 여糲라 한다. 열 말을 곡斛이라 한다.
노부老父인 곽종근郭從謹이 말을 올리기를 “안녹산安祿山이 나쁜 마음을 속에 감추고 있었음은 진실로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닙니다.
또한 대궐에 나가서 그의 음모를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폐하께서는 종종 그를 죽이시어
안녹산安祿山으로 하여금 그 간사함과 반역함을 이루게 하여
注+[頭註]영逞은 멋대로 부려서 마음에 유쾌하게 하는 것이다. 폐하께서 파천하도록 만들었습니다.
注+[頭註]파월播越은 파천播遷하고 전월顚越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왕이 충량忠良한 자들을 맞이하고 그들의 의견을 물어서 총명을 넓힐 것을 힘썼으니, 이는 이런 까닭에서입니다.
신臣은 아직도 기억하건대 송경宋璟이 재상이 되었을 적에 자주 직언直言을 올려서 천하가 힘입어 편안하고 평화로웠는데, 지난 해 이래로는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말하는 것을 꺼리고 오직 아첨하여 용납되기를 취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대궐 문 밖의 일을 폐하께서 전혀 알지 못하셨으니, 초야草野의 신은 반드시 금일의 난이 있을 줄 안 지가 오래입니다.
다만 구중궁궐이 엄하고 깊어서 구구한 마음을
注+[頭註]구구區區는 근근勤勤(간절하고 지성스러움)이란 말과 같다. 상달할 길이 없었으니, 일이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면 신이 어떻게 폐하의 얼굴을 뵙고 하소연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上이 말하기를 “이는 짐이 밝지 못해서이니, 후회해도 미칠 수 없다.” 하고는 위로하여 타일러서 보내었다.
〈
상上의 행차가〉馬嵬驛에 이르니,
注+[釋義]마외馬嵬는 지명이니, 함양현咸陽縣 서쪽에 있다. 지금 안서로安西路 흥평현興平縣 정서쪽 35리 지점에 마외파馬嵬坡가 있다. 장병들이 굶주리고 피로하여 모두 분노하였다.
진현례陳玄禮는
注+[頭註]진현례陳玄禮는 용무대장군龍武大將軍이다. 화禍가
양국충楊國忠에게서 연유하였다 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는데, 마침
토번吐蕃의 사신 20여 명이
양국충楊國忠의 말을 가로막고 양식이 없다고 하소연하였다.
양국충楊國忠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군사가 큰 소리로 고함치기를 “양국충楊國忠이 오랑캐와 반역을 도모한다.” 하고는 쫒아가 그를 죽여서 창끝에다 그 머리를 매달았다.
상上이 지팡이를 짚고 신을 신고 역문驛門을 나와 군사들을 위로하고, 군사들로 하여금 대오를 수습하여 떠나가게 하였으나 군사軍士들이 응하지 않았다.
상上이 고역사高力士를 시켜 묻게 하자, 진현례陳玄禮가 대답하기를 “양국충楊國忠은 반역을 도모하였으니, 양귀비楊貴妃를 공양하여 받들 수가 없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은정을 끊어 〈양귀비楊貴妃를 죽여〉법을 바로잡으소서.” 하였다.
상上이 말하기를 “귀비貴妃는 항상 깊은 궁궐에 있었으니, 양국충楊國忠의 모반하는 계책을 어찌 알았겠는가?” 하였다.
고역사高力士가 아뢰기를 “귀비貴妃는 진실로 죄가 없으나 장병들이 이미 양국충楊國忠을 죽였는데, 귀비貴妃가 폐하의 좌우에 있으면 어찌 감히 스스로 편안히 여기겠습니까?
장병들이 편안하면 폐하께서도 편안하실 것입니다.” 하였다.
상上은 마침내 고역사高力士에게 명하여 귀비貴妃를 불당佛堂으로 데리고 가서 목을 매어 죽이게 하고는 시신을 수레에 싣고 와서 마외역馬嵬驛의 뜰에 두고 진현례陳玄禮 등을 불러 들어와 보게 하니, 진현례陳玄禮가 이에 비로소 대오를 정돈하여 떠나갈 계책을 하였다.
상上이
마외역馬嵬驛을 출발하려 할 적에
부로父老들이 모두 길을 막고 머물 것을 청하며 말하기를 “
궁궐宮闕은
폐하陛下의 집이고
능침陵寢은
注+[頭註]옛날에 종묘宗廟는 앞에는 사당이 있고 뒤에는 침寢이 있었는데,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침寢을 내어 사당 곁에 세웠다. 그러므로 능상陵上을 침전寢殿이라 칭하였으니, 여기에는 죽은 황제의 옷과 관冠과 안석과 지팡이 등 생전을 상징하는 도구가 있었다. 폐하陛下의
분묘墳墓이니, 지금 이곳을 버리고 어디로 가고자 하십니까?” 하였다.
상上이 이 때문에 고삐를 잡고 오랫동안 있다가 마침내 태자에게 명하여 뒤에서 부로들을 선위宣慰하게 하니,
부로父老들이 인하여 말하기를 “지존至尊께서 이미 머물려 하지 않으시니, 저희들은 원컨대 자제들을 거느리고 태자전하를 따라 동쪽으로 가서 적을 격파하고 장안長安을 탈취하겠습니다.
만약 태자전하께서 지존至尊과 함께 모두 촉蜀으로 들어가신다면 중원中原의 백성百姓들로 하여금 누구를 주인 삼게 하시렵니까?” 하였다.
태자太子가 불가不可하다 하며 말하기를 “지존至尊께서 멀리 험한 곳을 무릅쓰고 가시니, 내 어찌 차마 아침저녁으로 좌우를 떠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내가 아직
지존至尊을 대면하여 하직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돌아가
지존至尊에게 아뢰어서 다시 가부를 여쭈어
거류去留를 결정하겠다.” 하고는 눈물을 흘리고 말을 돌려
注+[釋義]발跋은 돌리는 것이다. 서쪽으로 가려 하였다.
건녕왕建寧王 담倓(담)이
이보국李輔國과 함께 말고삐를
注+[釋義]공鞚은 고공반苦貢反(공)이니, 말굴레이다. 잡고 간하기를 “역적 오랑캐가 대궐을 침범하여 온천하가 분열되어 와해되었으니,
인정人情을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흥복興復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 지존至尊을 따라 촉蜀으로 들어가셨다가 만약 적병賊兵이 잔도棧道를 불태워 끊는다면 중원中原의 영토를 팔짱을 끼고 적에게 주게 될 것입니다.
서북 지방의 변경을 지키는 군대를 수습하고,
곽자의郭子儀와
이광필李光弼을
하북河北 지방에서 불러와
注+[頭註]곽이郭李는 곽자의郭子儀와 이광필李光弼이다. 그들과 더불어 병력을 연합하는 것만 못하니, 동쪽으로 역적을 토벌하여
장안長安과
낙양洛陽 두 서울을 수복하고 사해를 평정하여
지존至尊을 맞이하는 것이 어찌 큰 효도가 아니겠습니까?
하필 구구하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드리는 작은 효도를 다하여 아녀자의 온정을 행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광평왕廣平王 숙俶도 또한 태자太子에게 머물 것을 권하였고, 부로父老들이 함께 태자太子의 말을 가로막아서 태자太子가 갈 수가 없었다.
상上이 고삐를 잡고 태자가 오기를 기다렸으나 오래도록 오지 않자 사람을 보내 염탐하게 하였는데,
注+[釋義]정偵은 축정반丑正反(정)이니, 묻는 것이다. 돌아와 이러한 내용을 아뢰었다.
상上은 말하기를 “천운이다.” 하고는 마침내 명하여 후군 2천 명과
비룡飛龍의 어구마를 나누어서
注+[頭註]비룡飛龍은 황제의 마구간 이름이니, 장내仗內의 여섯 마구간 중에 비룡구飛龍廐가 가장 상등이었다. 태자를 따르게 하고, 또 장병들에게
유시諭示하기를 “태자는 어질고 효성스러워서
종묘宗廟를 받들 만하니, 너희들은 그를 잘 보좌하라.” 하였다.
또 태자에게 유시하기를 “서북 지방의 여러 오랑캐를 내가 평소 후대하여 어루만졌으니, 네가 반드시 그들을 쓸 수 있을 것이다.” 하니, 태자는 남쪽을 향하여 울부짖고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注+[頭註]상上이 이미 남쪽으로 갔으나 태자太子는 머물러 뒤에 있었다. 그러므로 남쪽을 향해 울부짖고 운 것이다.
상上이 또 성지聖旨를 내려서 태자太子에게 전위傳位하고자 하였으나 태자가 받지 않았다.
안녹산安祿山은 상上이 뜻밖에 갑자기 서쪽으로 파천하자, 사자를 보내 최건우崔乾祐의 군대를 중지시켜서 동관潼關에 머문지 10일 만에 마침내 손효철孫孝哲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장안長安에 들어가게 하였다.
그러나 적장들이 모두 거칠고 사나우며 원대한 지략이 없어서 장안長安을 점령한 뒤로는 스스로 뜻을 얻었다고 여겨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오로지 음악과 여색과 보물과 재물을 탐하는 것만 일삼고, 다시는 서쪽으로 진출할 뜻이 없었다.
그러므로 상上이 편안히 걸어서 촉蜀에 들어갈 수 있었고, 태자太子가 북쪽으로 갈 적에도 쫓겨서 급박한 근심이 없었다.
태자太子가
평량平凉에 이른지
注+[釋義]평량平凉은 옛날에 농우隴右에 속하였다. 지금 평량부平凉府에 평량현平凉縣이 있으니, 섬서성陝西省에 있다. 며칠 만에
삭방유후朔方留後 두홍점杜鴻漸이
태자太子를
평량平凉의 북쪽 경계에서 맞이하고,
태자太子를 설득하기를 “
삭방朔方은
천하天下의 강한 군대가 있는 곳입니다.
지금
토번吐蕃이 화친을 청하고
회흘回紇이
注+[頭註]회흘回紇은 그 선조가 흉노족匈奴族이었다. 내부內附(복종하여 따름)하며, 사방의
군현郡縣이 대체로 견고히 지켜 적을 막으면서
흥복興復을 기다리고 있으니,
전하께서는 이제 영무靈武에서 군대를 다스려 고삐를 잡고 길게 달려가며 사방에 격문을 돌려서 충의忠義로운 선비들을 거두어 잡는다면 역적은 굳이 도륙할 것도 못 될 것입니다.” 하였다.
가을 7월에
태자太子가
영무靈武에 이르니,
注+[釋義]영무靈武는 한漢나라 삭방군朔方郡이니, 지금의 하주夏州가 이곳이다. 《괄지지括地志》에 “영무靈武는 바로 소관蕭關이다.” 하였다. 배면裴冕과
注+[頭註]배면裴冕은 하서행군참군河西行軍參軍이었다. 두홍점杜鴻漸 등이
태자太子에게
전문牋文을 올려
注+[釋義]전牋은 표식表識하는 글이니, 글 가운데에 표기表記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마외역馬嵬驛에서의 명령을 따라 황제에 즉위할 것을 청하였으나 태자는 허락하지 않았다.
배면裴冕 등이 모두 말하기를 “장병들은 모두
관중關中 사람이라서 밤낮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되 어렵고 험한 길을 넘어 전하를 따라
注+[頭註]기구崎嶇는 산길이고, 또 어렵고 험함을 이른다. 멀리 사막 지방으로 건너온 까닭은 작은 공을 세우기를 바라서이니, 만약 이들이 하루아침에
이산離散한다면 다시 모을 수 없을 것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따라 사직社稷의 계책으로 삼으소서.” 하였다.
이들이 전문牋文을 다섯 번 올리자 태자가 비로소 허락하였다.
이날 숙종肅宗이 영무靈武에서 즉위하여, 현종玄宗을 높여 상황천제上皇天帝라 하고 천하天下에 사면하고 지덕至德으로 개원하였다.
《신당서新唐書》 〈예종본기睿宗本紀〉의 찬贊에 말하였다.
“
예종睿宗은 그 아들(玄宗)의 공을 인하여
注+[頭註]이 내용은 39권卷 경술년庚戌年(710)에 보인다. 재위한 지가 오래지 않으니, 진실로 말할 것이 없다.
고조高祖로부터
중종中宗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 사이에 두 번이나 여색으로 인한 화에 걸려서
注+[頭註]두 번의 여화女禍는 측천무씨則天武氏와 중종中宗의 비妃인 위후韋后를 가리킨다. 당唐나라의 국통이 이미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으며,
중종中宗은 자신이 죽음을 면치 못하였고
注+[頭註]중종中宗은 위후韋后에게 시해당하였다. 위씨韋氏는 마침내 멸족당하였다.
현종玄宗이 몸소 이 난리를 평정하였으니
감계鑑戒로 삼을 만하였으나 또다시 여자 때문에 실패하였다.
注+[頭註]또다시 여자 때문에 실패하였다는 것은 양귀비楊貴妃가 천보연간天寶年間의 난리를 이룸을 말한다.
현종玄宗이 막 정신을 가다듬고 정사에 힘써 개원開元 연간年間에는 거의 태평성세를 이루었으니, 어찌 그리도 훌륭하였는가.
그러다가 사치한 마음이 한 번 움직이자, 천하의 욕망을 다하였으나 즐거움으로 삼기에 부족하여 매우 사랑하는 여인(楊貴妃)에게 빠지고 경계해야 할 바를 잊었다.
그리하여 몸을 숨기고 나라를 잃음에 이르렀는데도 뉘우치지 못하였다.
그 시작과 종말의 다름을 살펴보건대 성품과 습관이 서로 다름이 이와 같음에 이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숙종肅宗이 태자太子로서 적을 토벌하다가 마침내 스스로 황제를 칭하였으니, 이는 바로 태자가 아버지를 배반한 것이니, 어떻게 안녹산安祿山을 토벌할 수 있겠는가.
당唐나라가 천하天下를 소유한 지가 거의 300년이었으니, 한漢나라 이래로 국통을 이은 것이 가장 오래었다.
그러나 삼강三綱이 확립되지 못하여 부자간父子間과 군신간君臣間의 의리義理가 없어서 이익을 보면 행동하고 어버이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위에는 교화敎化가 없고 아래에는 염치廉恥가 없었다.
옛날의 왕자王者는 반드시 자기 몸을 바르게 하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여 천하에 표솔標率(모범)이 되었으니, 자신이 바르지 못하면서 남을 바로잡을 수 있는 자는 있지 않다.
당唐나라는 부자간이 바르지 못하면서 만사를 바로잡고자 한다면 어려우니, 국통을 장구하게 이은 것만 해도 요행이라 할 것이다.”
“현종玄宗이 이미 태자太子에게 전위傳位한다는 명령이 있었으니, 태자太子가 참으로 배반한 것이 아니다.
그 잘못은 현종玄宗이 명령을 빨리 행하지 않고 배면裴冕 등 여러 사람이 영화와 부귀에 급급한 데에 있었다.
만일 숙종肅宗이 부자간과 군신간의 의리에 밝았다면 어찌 여러 사람들의 권유에 마음이 동요되었겠는가.
동요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당唐나라 고조高祖와 예종睿宗과 현종玄宗의 잘못은 기미를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고, 태종太宗과 명황明皇과 숙종肅宗의 잘못은 속히 하고자 하고 작은 이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아버지 노릇을 못하고 자식은 자식노릇을 못했으니, 어찌 후세의 큰 귀감이 아니겠는가.”
이때 변방의 정예병은 모두 뽑혀 들어가 적을 토벌하고 오직 노약자만이 남아 변방을 지키고 있었으니, 문무文武 관원이 채 30명이 되지 못하였다.
잡초를 헤치고 조정을 세우니, 제도가 초창기여서 무인들이 교만하였다.
대장인
관숭사管崇嗣가
조당朝堂에 있으면서 대궐을 등지고 앉아 태연히 말하고 웃곤 하였는데,
감찰어사監察御史 이면李勉이
注+[通鑑要解]이면李勉은 고조高祖의 아들이고, 정왕鄭王 원의元懿의 증손曾孫이다. 아뢰어 탄핵해서 체포하여
유사有司에게 맡기니,
상上이 특별히
관숭사管崇嗣를 용서하고
注+[頭註]죄를 사면하는 것을 원原이라 한다. 감탄하기를 “나에게
이면李勉이 있어서 조정이 비로소 존엄해졌다.” 하였다.
처음에 경조京兆 이필李泌가 어려서 재주가 민첩하다고 알려졌다.
현종玄宗이 그로 하여금 평민의 신분으로 태자와 벗이 되게 하니, 태자가 항상 그를 일러 선생이라 하였는데 뒤에 영양潁陽에 은거하였다.
상上(肅宗)이 마외파馬嵬坡로부터 북쪽으로 갈 적에 사자를 보내어 부르니, 이필李泌가 영무靈武에서 상上을 알현하였다.
상上이 크게 기뻐하여 밖에 나갈 때에는 함께 나란히 고삐를 잡고 잘 때에는 침상을 마주하여 태자였을 때와 똑같이 하였으며, 정사의 크고 작음을 따지지 않고 다 그에게 자문하여 그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상上은 장수와 재상을 등용하고 물리침에 이르기까지 또한 그와 더불어 의논하였다.
상上이 이필李泌를 우상右相으로 삼으려고 하자, 이필李泌가 굳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폐하께서 신을 손님과 벗으로서 대우하신다면 재상보다 더 귀하니, 하필 저의 뜻을 굽히려 하십니까.” 하니, 상上이 마침내 중지하였다.
경진일庚辰日에 상황上皇이 성도成都에 이르니, 따라온 관원과 육군六軍으로 이른 자가 1,300명뿐이었다.
영호조令狐潮가 장순張巡을 옹구雍丘에서 포위하여 서로 대치한 40여 일 동안 조정의 소식이 통하지 못하였다.
영호조令狐潮는 현종玄宗이 이미 촉蜀으로 파천했다는 말을 듣고 다시 편지로 장순張巡을 불렀다.
장순張巡의 대장 6명은 벼슬이 모두 개부특진開府特進이었는데, 이들이 장순張巡에게 아뢰기를 “군세가 대적할 수 없고 또 상上의 생사生死를 알 수 없으니, 적에게 항복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장순張巡이 겉으로 허락하는 체하고 다음날 당상堂上에 천자의 화상을 설치하고서 장병들을 거느리고 조회하니, 사람마다 모두 눈물을 흘렸다.
장순張巡이 여섯 명의 장수를 앞으로 끌어내어 대의大義로 꾸짖고 목을 베니, 장병들의 마음이 더욱 권면되었다.
장순張巡은 성 안에 화살이 다 떨어지자, 짚을 묶어 인형 천여 개를 만들어 검은 옷을 입혀서 밤에 밧줄로 매달아 성 아래로 내려 보내니,
注+[頭註]추縋는 밧줄을 드리우는 것이다. 영호조令狐潮의 병사들이 사람인 줄 알고 다투어 화살을 쏘다가 오랜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짚으로 만든 인형인 줄 알았다.
그리하여 장순張巡의 군대는 화살 수십만 개를 얻었다.
그 뒤에 장순張巡이 또다시 밤중에 사람을 밧줄로 매달아 내려 보내니, 적이 웃고 대비하지 않았다.
이에 결사대 500명으로 영호조令狐潮의 진영을 공격하니, 영호조令狐潮의 군대가 크게 혼란하여 보루를 불태우고 도망하였다.
10여 리를 쫓겨 달아나고는 영호조令狐潮가 부끄러워하여 병력을 증강하여 포위하였다.
장순張巡이 낭장郞將 뇌만춘雷萬春으로 하여금 성 위에서 영호조令狐潮와 서로 안부를 묻게 하였는데, 말이 끝나기 전에 적이 쇠뇌로 뇌만춘雷萬春을 쏘아 맞혀서 얼굴에 여섯 개의 화살을 맞았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영호조令狐潮는 그가 나무로 만든 사람인가 의심하여 첩자로 하여금 정찰하게 하고는 마침내 크게 놀라서 멀리 장순張巡에게 이르기를 “지난번 뇌장군雷將軍을 보니, 비로소 족하足下의 군령軍令이 엄하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장순張巡이 그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인륜人倫을 알지 못하니, 어찌
천도天道를 알겠는가?” 하였다.
注+[通鑑要解]군주君主를 배반하고 역적逆賊에게 붙어서 군신간의 윤리를 알지 못함을 이른다.
얼마 후에 장순張巡이 성문을 나가 싸워서 적장 14명을 사로잡고 백여 명의 수급首級을 베니, 적이 비로소 밤에 도망하여 군대를 거두어 진류陳留로 들어가서 감히 다시 나오지 못하였다.
진秦‧한漢 이래로 학자學者들이 이것을 알지 못하였는데 장순張巡의 말이 여기에 미쳤으니, 장순張巡의 재주와 식견이 어찌 다만 군대를 통솔하고 성을 지킬 뿐이겠는가.”
곽자의郭子儀 등이 5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하북河北으로부터 영무靈武에 이르니, 영무靈武 군대의 위엄이 비로소 강성해졌다.
이에 사람들은 당唐나라를 흥복興復할 희망이 있음을 깨달았다.
북해태수北海太守 하란진명賀蘭進明이
注+[頭註]하란賀蘭은 복성複姓이다. 녹사참군錄事參軍인
제오기第五琦를
注+[頭註]제오第五 또한 복성複姓이니, 제齊나라 전씨田氏의 후손이다. 한漢나라 초기에 전씨田氏 중에 원릉園陵으로 이사한 자가 많았기 때문에 차례를 가지고 성씨를 삼았다. 촉蜀에 들여보내어 일을 아뢰게 하였는데,
제오기第五琦가
상황上皇에게 말하기를 “방금 군대를 운용함에
재부財賦가 시급합니다.
재부財賦가 생산되는 것은 강회江淮 지방이 대부분을 차지하니, 바라건대 신에게 한 직책을 빌려 주시면 군대로 하여금 재용에 궁핍함이 없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황上皇이 기뻐하여 즉시 제오기第五琦를 감찰어사監察御史 강회조용사江淮租庸使로 임명하였다.
영무靈武의 사자가 촉蜀에 이르니, 상황上皇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 아들이 하늘의 뜻에 응하고 인심에 순종하니, 내 다시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제서制書를 내리기를 “지금으로부터
제칙制勅을 고쳐
고誥라 하고
注+[通鑑要解]고誥는 고함이니, 윗사람에게 아뢰는 것을 고告이라 하고 아랫사람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을 고誥라 한다. 표문表文과
상소문上疏文에
태상황太上皇이라 칭하며,
사해四海의
군국軍國에 관한 중요한 일을 모두 먼저
황제皇帝에게 아뢰어 가부를 결정한 다음 인하여 짐에게 아뢰어서 알게 하라.
상경上京(長安)을 수복收復하기를 기다린 뒤에 짐은 다시는 정사에 참여하지 않겠다.” 하였다.
인하여 위견소韋見素, 방관房琯, 최환崔渙에게 명하여 전국보傳國寶인 옥새와 옥책을 받들어 영무靈武에 나아가 전위傳位하게 하였다.
처음에
상황上皇이 매번
포연酺宴할 때마다
注+[附註]포酺는 음이 포蒲(포)이니, 왕王의 덕을 펴서 술을 마시게 하는 것이다. 한漢나라 법률에 세 사람 이상이 모여서 술을 마시면 벌금罰金 4양兩을 내게 하였는데 황제가 포酺를 하사하면 모여서 술을 마실 수가 있었다. 당唐나라 때에는 이런 금령이 없었으나 또한 포酺를 하사하는 경우에는 사람들이 모여 기악伎樂을 일으키고 국가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술과 면麵을 하사하였다. 먼저
태상아악太常雅樂으로
좌부坐部와
입부立部를
注+[釋義]명황明皇이 악공을 두 부部로 나누어 당하堂下에서 서서 연주하는 것을 입부기立部伎라 하고, 당상堂上에서 앉아서 연주하는 것을 좌부기坐部伎라 하였다. 연주하게 하고, 그 뒤에
고취악鼓吹樂과
注+[釋義]취吹는 거성去聲이니 북적北狄이 말 위에서 부는 악기소리이다. 한漢나라 이후로 이것을 고취鼓吹라 하였으니, 또한 군중軍中의 음악을 말 위에서 연주하였기 때문에 당唐나라 때 이것을 고취부鼓吹部에 예속시킨 것이다. 호악胡樂과
교방악敎坊樂과
부현府縣의
산악散樂(민간의 음악)과
잡희雜戲(광대놀이)로써
注+[釋義]산散은 상성上聲이다 명황明皇이 평왕平王이었을 때에 산악散樂 일부一部가 있었는데 위후韋后의 난리를 평정할 적에 이 모의에 참여한 자가 자못 있었다. 명황明皇이 즉위하자 형兄인 영왕寧王(成器)에게 명하여 번저蕃邸의 음악을 주관하게 해서 태상太常에 충원하고 무리를 둘로 나누어서 우열을 겨루게 하였으며, 봉래궁蓬萊宮 옆에 내교방內敎坊을 세우고 신성산악新聲散樂과 창우倡優의 기생들을 거처하게 하였다. 잇게 하였으며, 또
산거山車와
육선陸船으로
注+[頭註]산거山車는 수레 위에 붕각棚閣을 설치하고 채색비단을 가하여 산림山林의 모양을 만든 것이다. 육선陸船은 대나무를 엮어 배 모양으로 만들고 채색 비단으로 꾸며서 사람을 이 가운데에 나열하고 끌고 다녔다. 악기樂器를 싣고 왕래하게 하였다.
또 궁녀들을 동원하여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을
注+[釋義]명황明皇 때에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 양흠충楊欽忠이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 열두 편을 올리니, 모든 곡은 음악이 끝날 때에 반드시 곡조가 빠르지만 오직 이 곡만은 음악이 끝나려 할 때에 소리를 끌어 더욱 느리다. 춤추게 하고, 또 말 백 필에게 춤추는 법을 가르쳐서
注+[通鑑要解]황제는 말 백 필을 성대하게 꾸미고 좌와 우로 나누어 삼중三重의 목탑木榻을 설치한 다음 〈그 위에 올려놓고〉傾盃樂 수십 곡에 맞추어 춤을 추게 하였는데 장사壯士가 목탑木榻을 들어도 말이 움직이지 않았다. 술잔을 입에 물고 축수를 올리게 하였으며, 물소와 코끼리를 데리고 입장하여 혹은 절하고 혹은 춤추게 하였다.
안녹산安祿山이 이것을 보고 기뻐하였는데, 이미 장안長安을 점령하자, 명하여 악공들을 수색하여 체포하고 악기와 춤추는 옷을 수레에 싣고 무마舞馬와 무소와 코끼리를 몰아서 낙양洛陽으로 데려오게 하였다.
“
성인聖人은
도덕道德을 화려함으로 삼고
注+[通鑑要解]리麗는 음이 리이니, 신궐려愼厥麗의 리麗자와 같다. 또 본래 음은 려이다. 인의仁義를 즐거움으로 삼는다.
注+[釋義]락樂은 력락반力洛反(락)이니,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띠풀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덮고 흙으로 계단을 만들었으며,
注+[釋義]자茨는 질자반疾玆反(자)이니, 모자茅茨는 띠풀로 지붕을 덮는 것이다. 띠풀 끝을 가지런히 자르지 않고 흙 계단을 겨우 3척 높이로 한 것은 요堯‧순舜을 이른다. 거친 의복과 보잘것없는 음식이라도
注+[釋義]비菲는 무미반撫尾反(미)이니, 박한 것이다. 의복衣服을 나쁘게 하고 음식飮食을 나쁘게 한 것은 우왕禹王을 이른다. 그 누추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오직 봉양이 지나쳐서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고 재물을 허비할까 두려워하였다.
명황明皇은 태평함을 믿고서
注+[頭註]승承이 일본一本에는 승升으로 되어 있으니, 백성들이 3년의 저축이 있는 것을 승평升平이라 한다. 후일의 환난을 생각하지 아니하여 귀와 눈의 즐거움을 다하고
注+[釋義]탄殫은 다한반多寒反(단)이니, 지극함이다. 음악과 기예의 공교로움을 지극히 해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제왕帝王의 부귀가 자기만 못하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예전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미치지 못하게 하고,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넘지 못하게 하고자 해서, 단지 자신이 즐길 뿐만 아니라 또한 남에게 과시하였으니, 큰 도둑이 옆에 있으면서 이미 황제의 자리를 엿보는 마음이 있어서
注+[釋義]유窬는 용주반容朱反(우)이니, 몰래 보는 것이다. 끝내
명황明皇 자신으로 하여금
파천播遷하게 하고
생민生民으로 하여금 도탄에 빠지게 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이에 비로소 인군人君이 화려함을 숭상하여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은 다만 큰 도둑을 부르는 것일 뿐임을 알게 하였다.”
안녹산安祿山이
응벽지凝碧池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 적에
注+[頭註]응벽지凝碧池는 낙양洛陽의 금원禁苑에 있다. 모든 음악을 성대하게 연주하니,
이원梨園의
자제子弟들이 왕왕 흐느껴 울면서
注+[頭註]희허欷歔는 흐느껴 우는 소리이다. 눈물을 흘렸다.
적이 모두 칼날을 뽑아 들고 노려보았는데, 악공樂工인 뇌해청雷海淸이 슬프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악기를 땅에 던지고 서쪽을 향하여 통곡하니, 안녹산安祿山이 노하여 그를 시마전試馬殿 앞에 묶고는 사지를 찢어 죽였다.
안녹산安祿山은 지난날에 백성들이 혼란한 틈을 타서 창고의 물건을 많이 도둑질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장안長安을 점령하자 3일동안 크게 수색하도록 명령하여 백성들의 사사로운 재물까지 아울러 모두 노략질하였으며, 또
부府‧
현縣에 명하여 조사하게 해서 한 치와 한 냥의 작은 물건도
注+[頭註]10개의 기장 낟알을 유絫라 하고, 10유絫를 수銖라 하고, 8수銖를 치錙라 하고, 24수銖를 양兩이라 한다. 모두 끝까지 다스리게 하니, 이에 연루되어 수색하고 체포함에 얽히고 설켜 끝이 없었다.
백성들이 소란하여 당唐나라 황실을 더욱 생각하였다.
상上이 마외馬嵬를 떠나 북쪽으로 간 뒤로부터 민간에서 서로 전하기를 “태자가 북쪽으로 가서 병력을 수습해 가지고 와서 장안長安을 점령하려 한다.” 하니,
장안長安의 백성들이 밤낮으로 태자가 오기를 바라서 혹 때로 서로 놀라 이르기를 “태자의 대군이 이르렀다.” 하면 적들이 모두 도망해서 저잣거리와 마을이 텅 비곤 하였다.
적들은 북쪽에서 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고는 그때마다 놀라 도망하고자 하니, 경기京畿의 호걸豪傑들이 왕왕 적의 관리를 죽이고 멀리 관군官軍에게 호응하여, 이들을 죽여도 다시 새로운 호걸들이 일어나 서로 이어져 끊이지 않으니, 적이 통제하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경기京畿와
부주鄜州‧
방주坊州로부터
注+[頭註]부鄜와 방坊은 두 고을 이름이다. 부鄜는 음이 부이다. 기주岐州‧
농주隴州에 이르기까지 모두 적에게 붙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장안성長安城 서문西門의 밖은
注+[頭註]서문西門은 장안성長安城의 서쪽 문이다. 대부분 적의 보루가 되었으나 적의 병력이 미치는 곳은 남쪽으로
무관武關을 넘지 못하고 북쪽으로
운양雲陽을 넘지 못하고 서쪽으로
무공武功을 넘지 못하였다.
강회江淮에서
주청奏請하고 공물을 바쳐서
촉蜀으로 가고
영무靈武로 가는 자들이 다
양양襄陽으로부터
상진上津의 길을 취하여
注+[通鑑要解]상진上津은 한중漢中의 장리현長利縣이다. 부풍扶風에 이르러 도로가 막힘이 없었으니, 이는 모두
설경선薛景仙의 공 때문이었다.
注+[釋義]이때 설경선薛景仙이 진창령陳倉令이 되어 적의 수령과 장수를 죽이고 부풍扶風을 점령하여 지키고 있었다.
9월에
광평왕廣平王 이숙李俶을
注+[頭註]광평왕廣平王 이숙李俶이 바로 대종代宗이다. 천하병마원수天下兵馬元帥로 삼아서 여러 장수들을 모두 그에게 소속되게 하였다.
상上이
이필李泌와 함께 군대를 순행할 적에
注+[頭註]행行은 거성去聲이니, 행군行軍은 군대를 순행하여 살펴보는 것이다. 군사들이 모두 손가락질하고 속으로 은밀히 말하기를 “황색 옷을 입은 것은 천자이고
注+[釋義]의衣는 거성去聲이니 입는 것이다. 이하도 같다. [通鑑要解]성인聖人은 상上을 이르니, 당唐나라의 신하들은 모두 군부君父를 칭하여 성인聖人이라 하였다. 백색 옷을 입은 것은 처사
이필李泌이다.” 하니,
상上이 그 말을 듣고 이필李泌에게 고하기를 “국가가 이렇게 어려운 때에 감히 그대에게 관직을 주어 굽히게 할 수 없으나 우선 붉은 도포(관복)를 입어서 사람들의 의심을 끊으라.” 하였다.
이필李泌가 부득이 이 옷을 받아 입고 들어가 사례하자,
상上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미 이 관복을 입었으니, 어찌 관직의 명칭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품안에서 칙서를 꺼내어
이필李泌를
시모군국원수부행군장사侍謀軍國元帥府行軍長史로 임명하였다.
注+[頭註]시모군국원수부행군장사侍謀軍國元帥府行軍長史:시모侍謀라는 관직을 창건하여 이필李泌를 처하게 하였다.
이필李泌가 굳이 사양하자, 상上이 말하기를 “짐이 감히 경卿을 신하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어려움을 구제하기 위해서이니, 경卿은 적이 평정되기를 기다려서 높은 뜻을 마음대로 행하라.” 하니, 이필李泌가 마침내 관직을 받았다.
상上이 평소 방관房琯의 명성을 듣고 마음을 겸허히 하여 그를 대우하였다.
방관房琯이
상上을 뵙고 당시의 일을 말할 적에 말소리와 감정이 비분강개하자,
注+[釋義]강개慷慨는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상上이 감동되어 용모를 고쳤다.
이로 말미암아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을 방관房琯에게 많이 상의하였고, 방관房琯 또한 천하를 평정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겨서 아는 것을 힘써 실천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하여 오로지 자기 생각대로 결단하니, 여러 장수들이 팔짱을 끼고 그를 피하였다.
10월에 상上이 팽원彭原에 이르니, 제오기第五琦가 상上을 뵙고 각염법榷鹽法을 만들어서 재용을 풍요롭게 할 것을 청하였다.
방관房琯이 빈객賓客을 좋아하고 담론談論을 좋아하여 이름이 알려진 선비들을 많이 끌어오고 뽑았으나 미천하고 비루하니, 사람들이 많이 그를 원망하였다.
북해태수北海太守 하란진명賀蘭進明이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상上에게 아뢰기를 “
진晉나라는
왕연王衍을 등용하여
삼공三公으로 삼았는데, 부황하고 헛된 명예를 숭상하여
중원中原을 혼란하게 만들었습니다.
注+[釋義]중원판탕中原板蕩은 중화中華가 망하고 혼란함을 이른 것이니, 판板과 탕蕩은 모두 《시경詩經》의 편명篇名이다.
지금 방관房琯이 제멋대로 우활한 흰소리를 하여 헛된 명성을 세우고 이끌어 등용한 것은 모두 겉으로만 화려한 무리이니, 참으로 왕연王衍의 무리입니다.” 하였다.
상上이 이로 말미암아 방관房琯을 소원히 하였다.
방관房琯이 상소하여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양경兩京(長安과 낙양洛陽)을 수복할 것을 청하자, 상上이 이를 허락하였다.
방관房琯이 군대의 일을 모두
이읍李揖과
유질劉秩에게 맡기니, 두 사람은 다
서생書生이어서 군대의 일에 익숙하지 못하였으나
注+[頭註]한閑은 익힘이다. 방관房琯이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적의
예락하曳落河가
注+[釋義]처음에 안녹산安祿山이 동라同羅, 해奚, 거란契丹 등에서 항복한 자 8천여 명을 기르고 이들을 예락하曳落河라 이름하였다. 오랑캐 말의 예락하曳落河는 중국말로 장사壯士이다. 예曳은 양렬반羊列反(열)이다. 비록 많으나 어찌 우리
유질劉秩을 대적하겠는가?” 하였다.
방관房琯의 군대가 적장
안수충安守忠을
함양咸陽의
진도사陳濤斜에서 만났다.
注+[釋義]진도사陳濤斜는 함양咸陽에 있는 지명이다. [通鑑要解]진도택陳燾澤은 함양현咸陽縣 동쪽에 있었는데, 그 길이 기울게 났기 때문에 진도사陳燾斜라 한 것이다.
방관房琯은 옛 병법을 모방하여 전차전戰車戰하던 방법을 사용하여 소가 끄는 수레 2천 승乘으로 전진하고 기마군과 보병은 협공하게 하였는데, 적이 바람을 타고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니, 소가 모두 놀랐다.
적이 불을 놓아 불태우니, 사람과 가축이 크게 혼란하여 관군으로 죽은 자는 4만여 명이었고, 생존한 자는 몇천 명뿐이었다.
“방관房琯이 높은 뜻과 허명虛名만 있고 실제 재주가 없었는데 숙종肅宗이 이미 그를 소원히 하였으나 오히려 장수로 삼았으니 이는 그 신하를 알지 못한 것이요, 방관房琯은 참소로 소외를 당했는데도 오히려 적을 토벌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으니 이는 그 군주를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군주는 그 신하를 알지 못하고 신하는 그 군주를 헤아리지 못하고서 천하의 일을 이루고자 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숙종肅宗은 방관房琯에게 맡기고 방관房琯은 유질劉秩에게 맡겨서 군주와 신하가 사람을 알지 못함이 이와 같았으니, 어찌 실패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