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通鑑節要(2)

통감절요(2)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통감절요(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己卯]二年이라
帝以皇后弟竇廣國 賢有行이라하야 欲相之러니 曰 恐天下以吾私廣國이라하고 久念不可라하야 乃以申屠嘉爲相하니
嘉爲人 廉直하야 門不受私謁이라
是時 鄧通 方愛幸하야 賞賜累鉅萬이요 寵幸無比
嘉嘗入朝 而通居上旁(傍)하야 有怠慢之禮어늘
嘉奏事畢 因言曰 陛下愛幸群臣이시면 則富貴之어니와 至於朝廷之禮하야는 不可以不肅이니이다
罷朝 嘉坐府中하야 爲檄召通호되 詣丞相府하라
不來 且斬하리라
하야 言上한대 上曰 汝第往하라
詣丞相府하야 免冠徒跣하고 頓首謝어늘 嘉坐自如하야 弗爲禮하고 責曰
夫朝廷者 高帝之朝廷也어늘 小臣으로 戲殿上하니 大不敬이라
當斬이니 吏今行斬之하라
頓首出血호되 不解
丞相已困通하고 使使持節하야 召通而謝丞相曰 此 吾弄臣注+[釋義] 戲也 謂狎褻하야 無關大體이니 釋之하라
鄧通 旣至 爲上泣曰 丞相 幾殺臣이러이다
〈出嘉本傳〉
朱黼曰
人主不能行法於天下어든 能容臣下之守法이니 而後 人主之勢尊하고 人臣奉法於天下인댄 能不容人主之撓法이니 而後 人主之法信이라
文帝寬厚仁恕하여 非有震世之威하고 坦夷平易하여 非有絶物之勢하고 柔巽謙抑하여 非有獨運之權이라
이나 權不求重而人莫之褻하고 威不求震而人莫之抗하고 勢不求尊而人莫之幷者 何也
以其能容臣下守法而不撓也
至貴也로되 一戲殿上이면 則丞相得以檄召而議斬하고 非至於困辱이면 則不之召而且遣使以謝丞相하며 太子 君之貳 藩王 帝之愛子也로되 一不下司馬門注+[附註]張釋之拜公車令이러니 太子與梁王으로 共車入朝할새 不下司馬門한대 釋之追止之하고 劾不敬이어늘 薄太后詔謝公車하니라 司馬令一人 掌宮南闕門하니라이면 則六百石之公車令 得以劾奏而遮留하고 非太后之詔 則不得赦而且謝敎子之不謹하며 하고
軍門都尉 冗官也로되 得以將軍之令而遏天子之乘輿注+[頭註]天子至尊하야 不敢斥言之 故托於乘輿 天子以四海爲家故 行曰乘輿 止曰行在
人臣執法하여 不以天子之故而喪其所守하고 人主徇法하여 不以臣下之微而撓其所執하니 此漢室之所以興隆이요 而文帝之柔道 所以能致治安歟인저


2년(기묘 B.C.162)
황제가 황후의 동생 두광국竇廣國이 어질고 훌륭한 행실이 있다 하여 정승으로 삼고자 하였는데, 말하기를 “천하 사람들이 나더러 두광국竇廣國을 사사로이 한다(봐준다)고 할까 두렵다.” 하고는 오랫동안 생각하고는 불가하다 하여 마침내 신도가申屠嘉를 정승으로 삼았다.
신도가申屠嘉는 사람됨이 청렴하고 정직하여 집에서 사사로운 청탁을 받지 않았다.
이때 등통鄧通이 한창 군주의 총애를 받아서 상으로 하사받음이 여러 거만鉅萬(수백만 전)이었고, 총애가 견줄 자가 없었다.
신도가申屠嘉가 일찍이 들어가 조회할 적에 등통鄧通의 곁에 있으면서 태만한 가 있자,
신도가申屠嘉가 일을 다 아뢰고 인하여 아뢰기를 “폐하께서 여러 신하를 총애하신다면 그를 부귀하게 해줄 수는 있지만 조정의 에 있어서는 엄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조회를 파하자, 신도가申屠嘉승상부丞相府에 앉아서 격문檄文을 만들어 등통鄧通을 부르기를 “승상부로 오라.
오지 않으면 장차 목을 베겠다.” 하였다.
등통鄧通이 두려워하여 에게 말하자, 이 말하기를 “너는 우선 가라.” 하였다.
등통鄧通이 승상부에 나아가서 을 벗고 맨발로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였으나 신도가申屠嘉는 그대로 앉아서 답례를 하지 않고 꾸짖기를
“조정이라는 것은 고제高帝의 조정인데, 등통鄧通이 낮은 신하로서 대궐 위에서 희롱하였으니, 크게 불경하다.
참형에 해당하니 관리는 지금 즉시 참형을 시행하라.” 하였다.
등통鄧通이 머리를 조아려 피가 났으나 풀어주지 않았다.
승상丞相이 이미 등통鄧通에게 곤욕을 주었을 것이라고 헤아리고는 사자使者를 시켜 을 가지고 가서 등통鄧通을 부르고, 승상에게 사례하기를 “이는 내가 희롱하는 신하이니,注+[釋義]은 희롱함이니, 친압하고 설만하여 대체大體에 관계됨이 없음을 이른다. 그대는 풀어주라.” 하였다.
등통鄧通이 이미 이르자, 에게 울면서 아뢰기를 “승상이 거의 신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 《한서漢書신도가전申屠嘉傳》에 나옴 -
주보朱黼가 말하였다.
“군주가 천하에 법령法令을 제대로 시행할 수 없으면 신하들이 법을 지키는 것을 용납해 준 뒤에야 군주의 권위가 높아지고, 신하가 천하에 법을 받들어 시행하려고 하면 군주가 법을 동요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은 뒤에야 군주의 법이 신임을 받게 된다.
문제文帝관후寬厚하고 인서仁恕하여 세상을 진동하는 위엄이 있지 않았고, 평탄하고 평이하여 남보다 뛰어난 권세가 있지 않았고, 유순하고 겸손하여 홀로 운용하는 권력이 있지 않았다.
그러나 권력이 무겁기를 구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고, 위엄이 진동하기를 구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감히 항거하지 못하였고, 권세가 높기를 구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견줄 수 없었던 것은 어째서인가?
신하들이 법을 지키는 것을 용납하여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중대부太中大夫중이천석中二千石은 지극히 귀한 신분이었으나 대궐 위에서 한 번 희롱하면 승상丞相격문檄文으로 불러서 참형斬刑을 논하였고, 곤욕을 치름에 이르지 않으면 황제가 부르지 않고 또 사자使者를 보내어 승상丞相에게 사례하였으며, 태자太子는 임금의 저이儲貳이고 번왕藩王은 황제의 총애하는 아들이었으나 사마문司馬門에서 한 번 내리지 않으면注+[附註]장석지張釋之공거령公車令에 제수되었는데, 태자太子양왕梁王(劉揖)과 함께 수레를 타고 들어와 조회하면서 사마문司馬門에서 내리지 않았다. 장석지張釋之가 쫓아와 저지하고 불경不敬하다고 탄핵하자, 박태후薄太后는 두 아들에게 명하여 공거령公車令에게 사과하게 하였다. 사마령司馬令 한 사람이 궁궐 남쪽 문을 관장하였다.육백석六百石공거령公車令이 탄핵하여 아뢰고 길을 막았으며, 태후太后의 명령이 아니면 사면하지 못하였고 또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였음을 사례하게 하였으며, 낭중령郎中令은 작은 신하였으나 의 신분에 따라 신부인愼夫人의 앉는 자리를 뒤로 물렸으며, 군문도위軍門都尉는 하찮은 벼슬이었으나 장군將軍의 명령에 따라 천자天子의 수레를注+[頭註]천자天子가 지극히 높아 감히 지척指斥하여 말할 수가 없으므로 승여乘輿라고 칭탁한 것이다. 천자天子사해四海를 집안으로 삼기 때문에 출행하면 승여乘輿라 하고 멈추면 행재行在라 한다. 막을 수 있었다.
신하가 법을 소신대로 집행하여 천자天子 때문에 지키는 바를 상실하지 않고, 군주가 법을 따라 신하가 미천하다 하여 지키는 바를 동요하지 않았으니, 이는 나라 황실皇室흥륭興隆하게 된 이유이고, 문제文帝의 유순한 치안治安을 이룩할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역주
역주1 : 탁
역주2 太中大夫中二千石 : 太中大夫는 鄧通을 가리키고 中二千石은 그의 연봉이 2천 석이므로 말한 것이다.
역주3 郎中令……徹夫人之坐席 : 郎中令은 袁盎을 가리키며, 夫人은 愼夫人을 가리킨다. 愼夫人은 文帝가 총애하는 후궁이었는데 일찍이 皇后와 자리를 함께 하여 앉자, 郎中令으로 있던 袁盎이 愼夫人의 자리를 뒤로 물렸는 바, 이 내용은 앞의 前二年(B.C.178) 癸亥年條에 보인다.
역주4 軍門都尉……遏天子之乘輿 : 文帝가 細柳에 주둔하고 있는 周亞夫를 위로하기 위하여 직접 군영에 이르렀으나 軍門都尉가 장군의 명령이 없다 하여 통과시키지 않은 것으로 이 내용은 바로 다음해인 癸未年條에 보인다.
동영상 재생
1 [기묘] 2년
동영상 재생
2 [기묘] 2년 479
동영상 재생
3 [기묘] 2년

통감절요(2) 책은 2022.01.1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