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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2)

통감절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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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未]元封元年이라
詔曰 南越, 東甌 咸伏其辜호되 西蠻, 北夷 頗未輯睦하니
將巡邊하야 擇兵振旅하야 躬秉武節하야 置十二部將軍하고 親帥(率)師焉호리라하고
乃行할새 自雲陽으로 北歷上郡, 西河, 五原注+[釋義]括地志 勝州連谷縣 本秦九原郡이니 漢更名五原이라하야 北登單于臺하고 至朔方, 臨北河하야 勒兵十八萬騎하니
旌旗徑千餘里 威振匈奴러라
遣使告單于曰 南越王頭 已懸於漢北闕注+[附註]卽玄武門也 未央殿雖南向이나 而上書奏事謁見之徒 皆詣北闕하고 公車司馬亦在北하니 則是以北闕爲正門이라로니 單于能戰이어든 天子自將待邊이요 不能이어든 亟來臣服하라
何但亡匿幕北寒苦之地爲 匈奴하여 終不敢出이어늘
上乃還하다
〈出本紀〉
東越王餘善이어늘 漢兵 擊之한대 東越 殺餘善하고 以其衆降하다
以閩地險阻하여 反覆하니 終爲後世患이라하야 乃徙其民於江, 淮之間하고 遂虛其地하다
○ 正月 行幸注+[頭註] 巡視也 車駕所至 民被其德하야 以爲喜幸이라注+[附註]山名이라 列仙傳 王子喬好笙하야 作鳳凰鳴於緱氏山頭하고 乘白鶴去라하니라 周文王二十二世孫靈王 太子晉也하야 禮祭中嶽太室注+[釋義]中嶽 嵩高山이니 在潁川陽城縣이라 禹貢 爲外方이라 蔡氏傳曰 地志 潁川嵩高縣 有嵩高山하니 古文以爲外方山이라하니 在今西京登封縣이라 括地志 嵩高山 一名太室山이니 在陽城西北卄三里할새 從官 在山下라가 聞若有言萬歲者三이라하야늘 詔加增太室祠하다
〈二句 參用本紀文〉 上 遂東巡海上하야 行禮祠八神注+[釋義]八神 卽封禪書所說 一天主 祠天齊하고 二地主 祠泰山梁父하고 三兵主 祠蚩尤하고 四陰主 祠三山하고 五陽主 祠之罘也하고 六月主 祠之(來)[萊]〈山〉하고 七日主 祠成山하고 八四時主 祠琅琊할새 公孫卿 見大人迹甚大하고 群臣 言見一老夫牽狗라가 忽不見이라한대
以爲仙人也라하야 宿留注+[原註]謂有所須待也海上하고 還封禪하니 其封禪祠 夜若有光하고 晝有白雲 出封中注+[釋義]封用五色土하야 (蓋)[益]雜封之 白雲出其中하니 此瑞也이러라
天子還한대 群臣 上壽하야 頌功德하다
天子旣已封泰山하니 無風雨
而方士言 蓬萊諸神 若將可得이라하니 於是 欣然庶幾遇之하야 復至海上하야 望焉이러라
〈出史封禪書〉
欲自浮海하야 求蓬萊러니 東方朔曰 陛下第還宮하사 靜處以須之하시면 仙人 將自至하리이다 乃止하고
遂去竝(傍)海上하야 北至碣石하고 巡自遼西하야 歷北邊, 至九原하고 五月 至甘泉하니 凡周行 萬八千里云이러라
○ 先是 桑弘羊 領大農하야 盡管天下鹽鐵하야 作平準之法注+[頭註] 所以持平之器也 因名焉이라할새 令遠方으로 各以其物 如異時商賈所轉販者하야 爲賦而相灌輸注+[釋義]謂以其土地所有者 轉輸於所無之地하야 互相灌注하고 互相輸送이니 輸者旣便而官有利하고 置平準注+[釋義]官名也 屬大農하니 有令丞이라于京師하야 都受天下委輸注+[釋義]委積輸轉也 謂輸送委積者하고 盡籠天下之貨物하야 貴卽賣之하고 賤則買之하야
欲使富商大賈 無所牟大利注+[頭註] 取也 進也 奪也하고 而萬物 不得騰踊이러니
至是 天子巡狩郡縣할새 所過 賞賜用帛 百餘萬匹注+[頭註]言帛則他物可知이요 錢金 以巨萬計로되 皆取足大農이러라
弘羊 又請令吏得入粟補官하고 及罪人贖罪하니 山東漕粟 益歲六百萬石이라
一歲之中 太倉, 甘泉倉 滿하고 邊餘穀하며 諸物均輸하여 五百萬匹이라
民不益賦로되 而天下用饒어늘 於是 弘羊 賜爵左庶長하다
是時 小旱이어늘 令官求雨한대
卜式言曰 縣官 當食租衣稅而已어늘 今弘羊 令吏坐市列肆注+[頭註] 陳物處 買賤賣貴曰販이라하니 吏坐市肆行列之中이라하야 販物求利하니 烹弘羊이라야 天乃雨하리이다
〈出史平準書〉
[新增] 尹氏曰
弘羊 一賈人子爾어늘 以言利得幸하여 至於賜爵하니 豈非以其善理財歟
이나 弘羊 非能取其家之貲以助國也 又非能神運鬼輸以生財也 不過假權勢以漁奪民財而已
善乎
我朝司馬公光 對神祖之言曰 天地所生財貨百物 止有此數하여 不在民則在官이니 譬如雨澤 夏澇則秋旱이라
不加賦而上用足 不過設法하여 陰奪民利 其害甚於加賦
此乃桑弘羊欺武帝之言이니 太史書之하여 以見武帝之不明爾
至其末年하여 盜賊蜂起하여 幾至於亂하니 若武帝不悔禍하고 昭帝不變法이면 則漢幾亡이라하니
嗚呼 此言 眞萬世之藥石注+[頭註]石鍼以刺病者
愚因賜爵之事하여 備載司馬公之言하여 爲萬世法하노라


원봉元封원년元年(신미 B.C.110)
조서를 내리기를 “남월南越동구東甌가 모두 그 죄에 굴복하였으나 서만西蠻북이北夷가 자못 화목하지 않으니,
짐이 장차 변경을 순행하여 군사를 가려 뽑고 군대를 정돈하여 몸소 무절武節(군대를 통솔하는 부절符節)을 잡고서 12의 장군을 두고 친히 군대를 거느려 정벌하겠다.” 하고는
이에 길을 떠나서 운양雲陽으로부터 북쪽으로 상군上郡서하西河오원五原注+[釋義]괄지지括地志》에 “승주勝州연곡현連谷縣은 본래 나라의 구원군九原郡인데, 나라가 오원五原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하였다. 지나 북쪽으로 선우대單于臺에 오른 다음 삭방朔方에 이르고 북하北河에 임하여 18만의 기병騎兵을 무장시키니,
깃발이 천여 리에 뻗쳐서 위엄이 흉노匈奴에 진동하였다.
사신을 보내어 선우單于에게 고하기를 “남월왕南越王의 머리를 이미 나라 북쪽 대궐에注+[附註]북궐北闕은 바로 현무문玄武門이다. 미앙궁未央宮이 비록 남향南向하고 있었으나 글을 올리고 일을 아뢰며 알현謁見하는 자들이 모두 북궐北闕에 나아갔고, 공거사마公車司馬가 또한 북쪽에 있었다. 이 때문에 북궐北闕정문正門으로 삼은 것이다. 매달았으니, 선우單于가 전쟁할 수 있으면 천자天子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변방에서 기다릴 것이고, 전쟁할 수 없으면 빨리 와서 신하로 복종하라.
어찌 다만 사막 북쪽의 춥고 괴로운 땅에 도망쳐 숨기만 하는가?” 하니, 흉노匈奴가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이 마침내 돌아왔다.
- 《한서漢書무제기武帝紀》에 나옴 -
동월왕東越王여선餘善이 배반하자 나라 군대가 공격하니, 동월東越여선餘善을 죽이고 그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땅이 험하여 자주 반란을 일으키니, 끝내 후세의 근심이 될 것이라 하여, 이에 그 백성을 양자강揚子江회수淮水 사이로 옮기고 마침내 그 땅을 비웠다.
정월正月구지緱氏注+[附註]구지緱氏는 산 이름이다. 《열선전列仙傳》에 “왕자王子가 생황을 좋아하여 구지산緱氏山 위에서 봉황의 울음소리를 내고 백학을 타고 갔다.” 하였다. 나라 문왕文王의 22세손인 영왕靈王태자太子이다. 행차하여注+[頭註]순행巡幸하여 살펴보는 것이다. 어가御駕가 이르는 곳에는 백성들이 그 은덕을 입어 기뻐하고 다행으로 여긴다 하여 이름한 것이다. 중악中嶽태실太室注+[釋義]중악中嶽숭고산嵩高山이니, 영천潁川양성현陽城縣에 있다. 《서경書經》 〈우공禹貢〉에는 외방外方이라 하였는데, 채침蔡沈에 이르기를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영천潁川숭고현嵩高縣숭고산嵩高山이 있으니, 고문古文에는 외방산外方山으로 되어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서경西京등봉현登封縣에 있다.” 하였다. 《괄지지括地志》에 “숭고산嵩高山은 일명 태실산太室山이니, 양성陽城의 서북쪽 23리 지점에 있다.” 하였다. 로 제사할 적에 수행하던 관원이 산 아래에 있다가 마치 만세萬歲라고 말하는 듯한 소리를 세 번 들었다고 하자, 조서를 내려 태실太室의 사당을 증축하였다.
- 두 는 《한서漢書무제기武帝紀》의 내용을 참고하여 썼음 - 이 마침내 동쪽으로 해상海上을 순행하여 팔신八神에게 로 제사 지낼 적에注+[釋義]팔신八神은 바로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에서 말한 것으로, 첫 번째는 천주天主이니 천제天齊에 제사하고, 두 번째는 지주地主이니 태산泰山양보梁父에 제사하고, 세 번째는 병주兵主이니 치우蚩尤에 제사하고, 네 번째는 음주陰主이니 삼산三山에 제사하고, 다섯 번째는 양주陽主이니 지부산之罘山에 제사하고, 여섯 번째는 월주月主이니 내산萊山에 제사하고, 일곱 번째는 일주日主이니 성산成山에 제사하고, 여덟 번째는 시주時主이니 낭야琅琊에 제사한다. 공손경公孫卿대인大人의 발자국이 매우 큰 것을 보았고,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한 노부老夫가 개를 끌고 가다가 갑자기 사라진 것을 보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이것을 선인仙人이라고 여겨 해상海上에 머물면서注+[原註]숙류宿留는 기다리는 바가 있음을 이른다. 기다렸으며 돌아와 봉선封禪하니, 봉선封禪한 사당에 밤에는 빛이 있는 듯하였고 낮에는 흰 구름이 봉토封土 가운데서 나왔다.注+[釋義]其封禪祠……出封中:할 때에는 오색토五色土를 사용하여 뒤섞어서 더 높이 쌓는 바, 백운白雲이 그 가운데에서 나왔으니, 이는 상서祥瑞이다.
천자天子가 돌아오자, 여러 신하들이 축수祝壽를 올려 공덕功德을 칭송하였다.
천자天子태산泰山봉선封禪한 뒤에는 비바람의 폐해가 없었다.
방사方士들이 번갈아 ‘봉래산蓬萊山의 여러 신선들을 찾을 수 있을 듯하다.’고 말하자, 이에 이 기뻐하여 행여 신선들을 만날까 하여 다시 해상海上에 이르러 바라보았다.
- 《사기史記봉선서封禪書》에 나옴 -
이 직접 바다를 항해하여 봉래산蓬萊山을 찾고자 하였는데, 동방삭東方朔이 아뢰기를 “폐하께서 다만 궁으로 돌아가서 고요히 거처하면서 기다리시면 선인仙人이 장차 스스로 이를 것입니다.” 하니, 이에 중지하였다.
마침내 길을 떠나 해상海上을 따라 북쪽으로 갈석碣石에 이르고 요서遼西로부터 순행하여 북변北邊을 거쳐 구원九原에 이르고 5월에 감천甘泉에 이르니, 무릇 일주한 거리가 1만 8천 리였다.
이보다 앞서 상홍양桑弘羊대농大農을 맡아 천하의 소금과 쇠를 모두 관장하여 평준법平準法注+[頭註]은 수평을 유지하는 기구이므로 인하여 이름한 것이다. 만들 적에 먼 지방으로 하여금 각각 그 지방에서 나오는 물건을 가져다가 예전에 장사꾼이 물건을 사다가 다른 곳에 팔 경우 세금을 물리는 것처럼 하여 서로 물건을 대주고 실어 보내게 하였으며,注+[釋義]관수灌輸는 그 지방에서 나오는 물건을 그 물건이 없는 지역에 옮겨 보내어 서로 대주고 서로 실어 보내는 것이니, 수송하는 것이 이미 편하고 관청에도 이익이 있었다. 평준서平準署注+[釋義]평준平準은 관명이다. 대농大農에 소속하였으니, 이 있었다. 경사京師에 두고는 천하에서 실어 보낸注+[釋義]위수委輸는 쌓아놓은 물자를 다른 곳에 실어 보내는 것이니, 쌓아놓은 곡식을 수송함을 이른다. 물건들을 모두 받고 천하의 화물貨物을 다 독점하여 값이 비싸면 즉시 팔고 값이 싸면 사들였다.
그리하여 부유한 상인과 큰 장사꾼들로 하여금 큰 이익을 도모하는 바가 없게 하고,注+[頭註]는 취함이고 나아감이고 빼앗음이다. 모든 물가가 뛰지 못하게 하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천자天子군현郡縣순수巡狩할 적에 지나가는 곳마다 을 하사하여 소용된 비단이 백여만 필이었고注+[頭註]비단을 말했으면 다른 물건은 미루어 알 수 있다. 돈과 금이 몇만으로 헤아려졌으나 모두 대농大農에게서 취하여 충당하였다.
상홍양桑弘羊은 또 관리들로 하여금 곡식을 바쳐 관직에 보임補任되고 죄인들이 곡식을 바치고 속죄할 수 있게 해줄 것을 청하니, 〈이 제도를 시행한 결과〉 산동山東 지방에 조운漕運해 오는 곡식이 해마다 6백만 석이 증가하였다.
1년 안에 태창太倉감천창甘泉倉이 가득 차고 변경에는 곡식이 남았으며 여러 물건을 균수均輸하여 얻은 비단이 5백만 필이었다.
백성들이 세금을 더 내지 않았으나 천하의 재용이 풍족하니, 이에 상홍양桑弘羊에게 좌서장左庶長의 벼슬을 내렸다.
이때에 날이 약간 가물었는데, 이 관원들로 하여금 기우제를 지내게 하자,
복식卜式이 말하기를 “현관縣官은 마땅히 조세로 거둔 것을 가지고 밥을 먹고 옷을 해 입어야 할 뿐인데, 지금 상홍양桑弘羊이 관리들로 하여금 시장에 앉아서 가게를 벌여놓고注+[頭註]는 물건을 진열하여 파는 곳이다. 값이 쌀 때에 사고 값이 비쌀 때에 파는 것을 이라 하니, 관리들이 시장 가게의 행렬 가운데에 앉아 있는 것이다. 물건을 팔아 이익을 구하게 하니, 상홍양桑弘羊을 삶아 죽여야 하늘이 비로소 비를 내릴 것입니다.” 하였다.
- 《사기史記평준서平準書》에 나옴 -
윤씨尹氏가 말하였다.
상홍양桑弘羊은 한 장사꾼의 자식이었는데, 이익을 말함으로써 총애를 얻어 작위를 하사받음에 이르렀으니, 어찌 이재理財를 잘하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상홍양桑弘羊이 자기 집의 재물을 가져다가 나라를 도운 것도 아니고, 또 귀신이 실어 와서 재물을 생산한 것도 아니요, 권세權勢를 빌려서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한 것에 불과할 뿐이었다.
아, 훌륭하다.
우리 조정의 사마공司馬公(司馬光)이 신종神宗에게 대답한 말씀에 이르기를 ‘천지天地가 생산한 재화財貨와 온갖 물건은 오직 이 숫자만 있을 뿐이어서 백성들에게 있지 않으면 관청에 있으니, 비유하건대 빗물이 여름에 많이 내리면 가을에는 가무는 것과 같습니다.
세금을 더 늘리지 않고서 윗사람들의 재정이 풍족한 것은 교묘하게 법을 만들어서 은근히 백성들의 이익을 수탈함에 지나지 않으니, 그 폐해가 세금을 올리는 것보다 더 심합니다.
이는 바로 상홍양桑弘羊무제武帝를 속인 말이니, 태사太史가 이것을 써서 무제武帝의 총명하지 못함을 드러낸 것입니다.
무제武帝말년末年에 이르러 도적盜賊봉기蜂起하여 거의 혼란함에 이르렀으니, 만약 무제武帝가 화를 다시 받지 않도록 뉘우치지 않고 소제昭帝가 이 법을 바꾸지 않았더라면 나라가 거의 망할 뻔했습니다.’ 하였다.
아, 이 말씀은 참으로 만세萬世약석藥石이라注+[頭註]돌침으로 병든 자에게 침을 놓는 것이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상홍양桑弘羊에게 관작을 하사한 일을 인해서 사마공司馬公의 말씀을 자세히 기재하여 만세萬世으로 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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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절요(2) 책은 2022.01.1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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