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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2)

통감절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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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午]六年이라
衛靑 復將하고 出定襄注+[釋義]幷州定襄郡이니 隋置忻州하니 有定襄縣故城 在朔州善陽縣北三百里하야 擊匈奴하야 斬首虜萬餘人하다
〈出匈奴傳〉
○ 是時 比歲發十餘萬衆하야 擊胡하니 斬捕首虜之士 受賜黃金 二千餘萬斤이요 而漢軍士馬死者十餘萬이며 兵甲轉漕之費 不與焉이라
於是 大司農 經用注+[釋義] 常也 謂常用之錢竭盡이라하야 不足以奉戰士
六月 詔令民으로 得買爵及贖禁錮하고 免臧(贓)罪注+[頭註] 亦作贓하니 吏受賄也 凡非理所得財賄 皆曰贓이라하고 置賞官하야 名曰武功爵注+[釋義]王氏曰 瓚曰 茂陵中書 有武功爵十一級하니 一造士 二閑輿衛 三良士 四元戎士 五官首 六秉鐸이요 七千夫 八樂卿이요 九執戎이요 十政戾庶長이요 十一軍衛이라하니 吏道雜而多端이라 官職 耗廢注+[釋義]食貨志註 音帽 亂也러라
〈出漢書食貨志〉


원삭元朔 6년(무오 B.C.123)
여름에 위청衛靑이 다시 6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정양定襄注+[釋義]정양定襄병주幷州정양군定襄郡이니, 나라에서 흔주忻州를 두었는 바, 정양현定襄縣의 옛 성이 삭주朔州선양현善陽縣 북쪽 3백 리 지점에 있다. 나가서 흉노匈奴를 공격하여 수급首級을 베고 포로로 잡은 것이 만여 명이었다.
- 《한서漢書흉노전匈奴傳》에 나옴 -
이때에 나라가 매년 10여만 명의 군대를 징발하여 오랑캐를 공격하니, 수급을 베고 포로를 잡은 군사들이 하사받은 황금이 2천여만 근이었고 나라 군사와 말이 죽은 것이 십여 만이었으며, 병갑兵甲전조轉漕의 비용은 여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이에 대사농大司農의 경비가 고갈되어注+[釋義]은 떳떳함이니, 일정하게 사용하는 돈이 고갈됨을 말한 것이다. 전사戰士를 봉양할 수가 없었다.
6월에 조서를 내려 백성들로 하여금 〈돈을 내어〉 관작을 사고 또 금고禁錮를 속죄하고 장죄贓罪를 면할注+[頭註]은 또한 으로도 쓰니, 관리들이 뇌물을 받는 것이다. 무릇 비리로 얻은 재물을 모두 이라 한다. 수 있게 하였으며, 상관賞官을 두어 이름하기를 무공작武功爵이라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설찬薛瓚이 말하기를 ‘《무릉중서茂陵中書》에 무공작武功爵 11계급이 있으니, 첫 번째는 조사造士, 두 번째는 한여위閑輿衛, 세 번째는 양사良士, 네 번째는 원융사元戎士, 다섯 번째는 관수官首, 여섯 번째는 병탁秉鐸, 일곱 번째는 천부千夫, 여덟 번째는 낙경樂卿, 아홉 번째는 집융執戎, 열 번째는 정려서장政戾庶長, 열한 번째는 군위軍衛이다.’ 하였다.” 하니, 관리로 진출하는 길이 뒤섞이고 갈래가 많아 관직이 어지럽고 폐해졌다.注+[釋義]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의 에 “는 음이 모이니, 어지러움이다.” 하였다.
- 《한서漢書식화지食貨志》에 나옴 -


역주
역주1 六將軍 : 頭註에는 公孫敖, 公孫賀, 趙信, 蘇建, 李廣利라고 하였으나 한 명이 부족하며, 《漢書》 〈五行志〉에 나오는 顔師古의 주를 살펴보면 “衛尉蘇建이 游擊將軍이 되고 左內史李沮가 彊弩將軍이 되고 太僕公孫賀가 騎將軍이 되고 代相李蔡가 輕車將軍이 되어 함께 朔方으로 진출하였으며, 大行李息과 岸頭侯張次公이 將軍이 되어 右北平으로 진출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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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오] 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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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오] 6년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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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오] 6년 213

통감절요(2) 책은 2022.01.1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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